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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온도 - 나를 품어주는 일상의 사소한 곳들
박정은 지음 / 다온북스 / 2016년 12월
평점 :
잔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예쁜 그림이 있어 보기에 편안하다. 저자는 고등학교 자퇴 과정을 차분하고 간결하게 쓴다. 사생대회에 나가 포기할 뻔하다가 다시 완성하여 상을 받은 일화와 더불어 저자의 이 말을 명심하자. "망하기 전까지는 망한 게 아니다."
* 이 책에 나온 '드므' - 고궁에서 보기는 했지만 이름은 새롭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41782#home 쓰레기통 아니에요, 궁궐 지키는 '드므' 랍니다
"인생에서 터닝포인트는 어떤 것이었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선택은 뭔가를 하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이제는 그만하겠다는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터닝포인트가 되어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학교에 가기 위해서 미술학원을 다니고, 때론 매를 맞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나의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늘 비교와 평가를 받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겹게 만들었다. 중학생 때는 괜찮았는데 고등학생이 되니 압박이 심해졌다. 입시를 위한 그림을 그리는 로봇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림 그리는 것을 정말 좋아했는데, 점점 지겨워하다가 결국은 싫어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을 본 것은 하루뿐이었는데 예술의 전당에 가면 그날 기억이 많이 난다.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시원하게 실패해버린 10대 후반의 내가 여전히 그곳에 서 있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온 30대 초반의 나는 시무룩해 있는 어린 내가 창피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이제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사라지지 않는다.
다행히 내가 그림을 그리던 곳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라 그림은 내가 버린 상태 그대로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그림을 다시 꺼내어 작업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에 제출을 했는데, 얼마 후 운 좋게 상을 받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쓰레기통에 버렸던 그림이었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더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일은 이후로도 마음에 강렬하게 남아서 어떤 그림도 끝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정말 망하기 전까지는 망한 게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작업을 한다.
한 신부님께서 내게 해주신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그 말은 죽어서 진짜 천국이라는 공간을 간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면서 종교로 인해 믿음이 생기거나, 좋은 책을 읽어 깨달음을 얻거나, 귀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등 어떤 반짝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들을 통해서 생각이 바뀌고 시선이 바뀐다면 똑같은 세상이라도 전과는 다르게 보고 느낄 수 있게 되고, 현실을 천국과 같이 느끼며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하셨다. 결국 어떤 계기로든 자기 자신이 변하면 바로 그곳이 천국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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