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탑의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1830 By 폴 들라로슈


정치적 제물이 된 에드워드 5세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12600040





이 단편은 사실처럼 죽죽 내려썼지만 실은 그 태반이 상상의 산물이므로 읽는 이는 그런 마음으로 읽기를 바란다. 탑의 역사에 관해서는 희곡적으로 재미있을 듯한 사건만 골라 삽입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군데군데 부자연스러운 흔적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가운데 엘리자베스(에드워드4세의 왕비)가 유폐 중인 두 왕자를 만나러 오는 장면과 두 왕자를 죽인 자객의 술회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리처드3세> 속에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클라렌스 공작이 탑 속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그릴 때는 정공법을 이용,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왕자를 교살하는 장면을 그릴 때는 암시적 수법을 이용, 자객의 말을 빌려 이면에서 그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일찍이 이 희곡을 읽었을 때 그 점을 제일 재미있게 생각했으므로 그 취향을 그대로 이용해보았다. 그러나 대화의 내용, 주위의 광경 등은 물론 내 공상으로 셰익스피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 런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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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이 알려준 재작년 오늘의 독서로부터.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 '런던탑'(을유문화사)이 아래 글의 출처로서 런던탑에 갇힌 어린 왕자들을 보려고 어머니가 찾아온 장면이다.

 

《1483년 런던탑의 두 왕자 에드워드와 리처드》1878년 By 존 에버렛 밀레이 - Royal Holloway Art & Culture


'런던탑'은 문예출판사판 '도련님'(나쓰메 소세키)에도 실려 있다.




홀연히 무대가 빙빙 돈다. 탑 문 앞에 여자가 홀로 검은 상복을 입고 꿈인 양 서 있다. 얼굴은 창백하고 까칠하게 여위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넘치는 부인이다. 이윽고 자물쇠 따는 소리가 들리고 끼익, 하고 문짝이 무겁게 열리자 안에서 사내가 하나 나와 부인 앞에 공손히 절을 한다.

"만나는 걸 허락받았는가?" 하고 여자가 묻는다.

"아니옵니다." 측은하다는 듯 사내가 대답한다. "만나게 해드리고 싶어도 국법이 추상같사오니 체념해 주시옵소서. 제 힘이 못 닿음을 용서해주소서." 그리고는 갑자기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문 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호 안쪽에서 농병아리 한마리가 훌쩍 튀어오른다.

여자가 목덜미의 금목걸이를 풀어 사내에게 건네며, "그저 한순간 얼핏만 보아도 한이 없겠네. 내 이 소망을 그대는 들어주지 않으려나." 하고 간절히 청을 넣는다.

사내는 목걸이를 손가락 끝에 감고 생각에 잠기는 눈치다. 농병아리가 휙 물 속에 잠긴다. 잠시 후 사내가, "옥지기는 옥의 법을 부수지 못하옵니다. 왕자님들은 별 탈 없이 있사오니 그리 아시고 돌아가 주시옵소서." 하며 금목걸이를 되돌려준다.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돌위에 떨어진 목걸이가 쨍 날카롭게 운다.

"도저히 못 만난다는 얘긴가?" 여자가 묻는다.

"황송하오나." 문지기가 단언한다.

"검은 탑 그림자, 단단한 탑벽, 인정 없는 탑지기." 여자가 중얼거리며 하염없이 운다. - 런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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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과 성수를 무대로 한 장편소설 '위대한 그의 빛'(심윤경) 때문에 지난 해 12월 별세한 고 정아은 작가의 '잠실동 사람들'(2015)이 생각났다. 아래 옮긴 글은 '작가의 말' 일부이다.

By C. J. Lee - 잠실, CC BY 2.0 (2017)


“소설을 쓰기 전엔 교육이 바뀌어야 나라가 바뀌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는 나라가 바뀌어야 교육이 바뀌겠구나, 생각했지요. 소설을 마칠 때쯤엔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참으로 어리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소설가 정아은, 장편 ‘잠실동 사람들’ 펴내] https://www.segye.com/newsView/20150212003592?OutUrl=daum


올초 새로 발간되었다. 목차가 동네 주민들로 짜여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원래 누구의 소유였는가? 그는 어떻게 해서 이곳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의문은 점점 증폭되어 종내는 해방 전후의 사회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힘들의 우열은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그 과정은 정당했는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았던 일상의 시공간들이 갑자기 커다란 물음표로 다가왔고, 저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 사이를 넘나들며 울고 웃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잠실은 70년대에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조성했던 5층짜리 아파트 단지 네 개를 모두 밀어버리고 30층에 가까운 고층 아파트로 가득 채운,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와 가치관을 보여주는 전형과도 같은 동네입니다. 길고 날카로운 칼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고층 빌딩 숲 바로 건너편에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재래시장과 낮은 빌라촌이 공존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의 오래된 아파트들 대부분이 재건축을 거쳐 30층 이상의 고층아파트로 올라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잠실은 대한민국 거주문화의 명징한 미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소설의 배경으로 잠실을 택한 이유이고, 또한 이 소설이 잠실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 이유입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단지 고층아파트라면 어디에서든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전형에 불과합니다. 부디 그 인물들이 잠실동 주민 모두를 대변한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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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04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으로 보더라도 안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마음속에 “스스로 믿는 바”가 있거든요. “스스로 믿는 바”하고 어긋나거나 틀리거나 엉뚱하도록 다른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들, “스스로 새길을 열려는 마음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꼼짝을 안 합니다.

눈앞에서 안 보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나 꾸준히 있습니다. 눈앞에서 안 보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이미 마음을 “스스로 활짝 열고서 사랑으로 바라보려는 눈빛”이거든요. “스스로 사랑으로 바라보는 눈빛”일 적에는, 이이한테 누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적에 참인지 거짓인지 아름빛인지 눈속임인지 이내 알아차립니다.

눈으로 보더라도 안 믿는 사람을 바꾸거나 돌려세울 수는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어느 누구도 못 건드리고 못 깹니다. 다만 “돌덩이 마음을 스스로 붙잡은 사람”을 햇볕과 별빛처럼 부드러이 타이르고서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저 이이한테 참사랑과 아름빛을 보여주고서 “네가 스스로 알아서 하렴” 하는 말 한 마디를 남길 수 있어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은 “누구 것(소유)”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누구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 별은 “사람 것”만이라고 할 수 없어요. 사람도 살고, 사람인 나도 살고, 사람인 너도 살고, 풀벌레와 새와 지렁이와 벌나비도 살고, 풀과 꽃과 나무도 살아요. 바람이 지나가고 비가 내립니다. 눈이 날리고 구름이 흘러요. 모두 어우러지는 터전인 줄 제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서울 한복판도 시골 한켠도 앞으로는 아름살림으로 거듭날 만하리라고 봅니다.

서울 잠실이라는 곳은 어떠한 삶터였나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그리고 이 나라 모든 시골도......
 

올해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백주년이라는데 작년 가을 소설가 심윤경이 대한민국 서울을 배경으로 개츠비를 다시쓰기한 '위대한 그의 빛'을 발표했다. 구부촌 압구정과 신부촌 성수가 소설 속 공간이라고 한다.


[압구정을 욕망하는 성수, 성수를 시기하는 압구정] https://h21.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6149.html

1759년 압구정(鴨鷗亭), 세조 때 공신 한명회의 별장으로 현재 강남구 압구정동, 종이에 담채, 간송미술관 By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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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 Daum 백과 cf. 1925년 작이므로 올해가 백주년이다.


아래 옮긴 글은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이 출처.

영화 '위대한 개츠비'(1926) By w:Famous Players-Lasky/w:Paramount Pictures


[K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뉴욕 홀리고 국내 상륙] https://v.daum.net/v/20250101161201342 작년 브로드웨이 초연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이 제작했다.




개츠비가 붙잡고자 한 ‘초록색 불빛’은 데이지가 상징하는 ‘사랑, 돈, 혹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현실 같은 것들’과 그리 멀지 않다. 결국 개츠비와 닉은 모두 세속적 성공과 부를 추구했다. 그러나 한없이 가볍고 쾌락적인 욕망의 세계에 강하게 이끌리면서도 그 세계에 ‘너무’ 몰입하는 것에는 저항하는 교양 있는 중산층 남성 닉에게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이다. 닉이 개츠비에게 강하게 이끌린 것은 개츠비가 그 세계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다가 몰락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닉과 같이 매혹과 불안 사이에서 방황하는 교양 있는 중산층 남성들은 개츠비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죽음에 존재론적, 철학적, 역사적 의미를 덧붙인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바로 이러한 닉들 Nicks 의 불안을 먹고 자란다. - ‘위대함’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_심진경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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