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 식민지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탈향, 망향, 귀향의 서사
차은정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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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간한 책으로 ‘한국 출신’일본인들의 ‘일본이주 ‘와 패전이후 이들이 기억하던 ‘식민지 조선’이 1965년 한일정상화 이후의 한국을 통해 어떻게 인식되어지는지 인터뷰와 동창회지, 한국 출신 일본인들의 회고록, 이들과 동창 관계에 있던 소수의 조선인 동창과의 교류를 살펴 봅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살 때 인식하지 못했던 ‘식민자 ‘로서의 자각을 일본의 패망이후 일본으로 다시 이주한후 일본에서 살아온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또 다른 존재로 바라 보았을 때 비로소 느꼈다고 고백한 점입니다.

흔히 일제 강점기를 볼 때 억압받는 조선인들의 입장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인데 비해 당시 일본 본토( 내지, 內地라고 불리던)에서 조선으로 ‘이주’해온 재조 일본인에 주목한 점은 그래서 참신합니다.

인터뷰를 한 한국 출신 일본인들 중 이미 고령으로 고인이 된 분이 많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1920-1940년대 이들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과 경험담, 그리고 당시 조선인들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지(ethnography)적’ 기록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1930년대 말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에 이들이 경험했던 학교 생활과 조선인들과의 생활경험은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략침략과 그들의 군사물자 동원 , 식량 증산계획 등을 숫자가 아닌 일차적 경험으로 알려주는 것이기에 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케이스 스터디에 해당하는 경성사범학교 출신들의 경험담과 경성중학교 출신의 경험담은 시대의 차이를 두며 약간 다른 양상을 띄지만 이미 일제는 1930년대부터 사범학교 출신 국민학교 교원들을 조선 각지의 농촌에 발령내고 이들을 통해 식량 중산을 꾀했고 이들을 통해 지역을 조선총독부 정책 실행의 최전선에 앞세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 경희궁 자리에 있었던 경성중학교는 설립 당시 이미. 조선총독부 자녀들만을 위한 일본인 학교였으며 아주 소수의’양반가 ‘ 조선인이나 사업가 자제들만이 이 학교에 입학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산 그룹을 세운 박승직 상점가 장남 박두병이나 한은 초대총재 구용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 등이 경성중학교 출신인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국가정책에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했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계층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고, 일제가 아무리 조선을 일본화하려 해도 조선의 촌부들이 일본어를 잘 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농촌에 발령받은 경성사범 출신 일본인들은 학교에서 배운 조선어로 의사소통 할 수 밖에 없다고 회고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당시 졸속으로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의 막후 접촉을 위해 일본의 자민당 간사장 출신 정치인이 청와대를 방문하고 비밀협상을 한일 양측 모두 ‘일본어’로 진행했다는 후일담이 나왔을 때 매우 놀랐고 경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는 일제시대를 산 인물들이라 일본과 관계가 긴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 딸까지 일본에게 어쩔줄 몰라하다니. 부녀가 일본에게 한국을 얕잡아볼 기회를 제대로 주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때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식민지 시대에 교육받은 소위 한국사회의 ‘원로’라는 집단을 통해 한국에 분명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1960년대는 한국 전쟁이 끝난지 10여년 해방이 된지 2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때로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엘리트들이 넘쳐나던 시대였습니다.

위의 경성중학교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한국 출신 일본인들이 자신의 동기 동창들이 한국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고 젊었을 때 하던 것처럼 ‘요정’에서 술을 마시고 즐기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알던 산업화 세대가 은퇴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1960-70년대 처럼 일본이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는 하기 어려울 것으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지난 40여년간 일본에서 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면 몹시 불편한 기분입니다.

또 한가지 이들의 인터뷰에서 불편했던 점은 한국 출신 일본인들이 1930-40년대 당시 조선인들과 ‘잘 지냈다’는 이유로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에 명시적으로 드러났던 차별을 은폐하려 했던 경향이나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이 본격화되었는데도 본인들의 경험으로 자신들이 농촌 부락의 생산성 증대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무마하고 자신들이 총독부 정책을 충실히 집행한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회피하는 듯 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반성이나 청산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온 한국이나 일본모두 그래서 애매하게 상황을 마무리짓고 어물쩡 넘어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륙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태평양 해양 세력으로 떠오른 미국이 러시어와 중국의 힘을 압박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 모두 일제 강점기 상황을 그대로 놔둔 체 ‘현상유지 (status quo)’를 채택해 온 것이 해방이후 70여년이 넘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현재의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경성중학교 자리는 일제가 한일병합이후 경복궁 에 조선총독부를 1925년 완공해 입주한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관료들을 위해 관사를 만들고 또 이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만든 것이 시작입니다. 사유지를 피하기 위해 경희궁이라는 조선의 궁궐 자리에 학교를 지은 것도 사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19세기 말 경성에 진출한 당시에 모여살던 현재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서 점차 양반들이 모여살던 북촌으로 거주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경성중학교 자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립된 것입니다. 종로와 북촌일대에서 많이 모여살던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인들이 침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성에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따로 모여 살았는지 같이 섞여 살았는지는 연구서들마다 약간씩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섞여 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부는 대체로 일본인들이 독점해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빈부격차는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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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려고 했던 책 중에 ‘유럽과 역사가 없는사람들 (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2010)’이라는 오리엔탈리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저작이 있습니다. 아마존의 책소개에 따르면 책의 기본 개념과 용어 자체가 다분히 서구 중심적(Eurocentric)으로 유럽과 그 외의 지역을 ‘양분’하고 있습니다.
비서구를 ‘몰역사적(ahistorical)’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정적으로 존재하는 변화없는 보여지는 존재가 바로 서구가 비서구를 바라보는 시각(perspective)입니다. 나름 진보적이라는 뉴욕시립대 (CUNY) 교수의 저작 제목이 이럴정도라면 다른 보수적 교수들의 저작은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위에 소개한 책은 기회가 되면 다시 리뷰를 본격적으로 할 생각입니다.

반면 오늘 소개할 강인욱 교수의 책은 위의 책과 정반대를 지향합니다.

역사는 승자가 집필한 기록으로 이해되고 ‘주류(mainstream)’들의 생각과 기록만이 남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당시의 사회상을 제대로 재구성하기가어려운 현실 속에 소위 역사학의 인접학문인 고고학과 인류학 등이 이 기록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과거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은 단순한 문서기록뿐만 아니라 지나간 삶의 생활흔적을 보고 당시의 생활을 재구성(r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점에서 수사와 비슷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소위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것도 19세기 제국주의가 극에 달했을 당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서구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자랑하는 박물관은 사실 이들이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것들입니다.

고고학자인 저자의 고백처럼 고고학은 제국주의를 위해 철저히 봉사한 일종의 관학(官學)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국주의(imperialism)의 내러티브는 언제나 근대화된 ‘문명국’이 ‘미개한’ 식민지에 ‘문명’을 가져다 준다는 주장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오키나와와 에조치(蝦夷地, 현재 홋가이도 ), 대만과 만주를 침략할때 앵무새처럼 같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참고로 일본은 본인들의 기원이 유럽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주장했다고 저자는 전합니다.
탈아입구에 목마른 건 알겠는데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똑같은 주장을 지구 반대편의 스페인이 마야제국을 파괴하고 마야인이 미개인이며 이교도라고 학살하면서 했던 주장입니다.

하지만 정작 파리의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에서 직접 이들이 약탈해온 유물과 본국의 유물을 비교해서 보면 유물이나 미술에 문외한인 저의 눈에도 서구유럽의 ‘선진적 문화’가 과연 있기는 한건지 의심이 든 경험이 있습니다. 서양공예의 조잡한 형태를 보면서 이들이 왜 중국도자기에 열광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

제 개인적으로 1990년대 말 대영박물관에서 캄보디아의 이름모를 고대왕국의 섬세하고 복잡한 도자기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후진국이라고 배웠고 동남아시아나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했던 20대 후반의 사회초년생이 몰락한 제국의 수도에서 그 진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학술적인 성격이 전혀 없지 않으면서도 대중서의 성격을 가진 이 책은 저자가 한겨레에 연재한 글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저자후기에 썼습니다. 저도 이 책의 글중 몇편은 안터넷으로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300쪽이 조금 넘는 작은 책이지만 각 글에서 인용한 필수 참고문헌을 충실히 실어 다른 한국의 논픽션류와 다른 차별성을 보입니다.

저는 소설이나 문학작품이 아닌 모든 논픽션, 사회과학, 자연과학서 그리고 역사서들은 반드시 참고문헌과 각주와 찿아보기가 뒤에 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누구든 이를 제공하지 않는 책을 믿지 않습니다. 책을 머리말부터 후기까지 모두 읽는 저는 한국의 저자들이 대체로 자신의 저작에 기여한 이들을 드러내는데 안색하고 이런 좋지 않은 관습이 책 내용을 심각하게 저하시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책 내용으로 잠시 돌아가서 이 책이 ‘미지의 땅’에 사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삼다보니 동아시아에서 ‘화이사상(華夷思想)’의 지배 속에 오랑캐로 치부되었던 돌궐, 말갈, 흉노, 소그드인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고 지금도 여전히 베일에 싸인 극동 시베리아의 동쪽 끝 오오츠크해와 배링해의 애스키모 민족들, 일본 본토에서 살다 홋가이도까지 쫓겨 올라간 아이누인들과 막부시대 청과 일본에 복속했던 류큐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베링해협을 통해 북아메리카에 건너갔을 가능성도 이야기 되고 있고 마야문명과 중국문명과의 관련성도 이야기됩니다.

글을 읽다보면 아메리카 대륙이 15세기에 ‘발견’되었다는 건 서구 유럽에서 그들의 시각애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문명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유럽문명울 신대륙에 ‘이식’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영문도 모른체 서구인들에 의해 ‘아메리카 인디언 ‘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영화에서 백인들에게 못된짓을 하는 야만인으로 묘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영상 속 ‘이미지’일 뿐 그 실체가 아니고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는 것이 우리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끝으로 저는 강인욱 교수 책을 처음 읽어 보았는데, 이야기 자체가 설득력도 있고 쉽게 쓰여 좋았고 보기 드문 시베리아 고고학을 전공한 저자의 책이어서 이 지역에 관심이 있다면 개론서로 읽어도 좋을 듯 합니다.

이 책에서 신라를 다루면서 언급한 흉노족에 대한 국내 저자의 책은 현재 없습니다. 다만 10여년 전 나온 ‘흉노제국이야기(아이필드,2010)’이 거의 유일합니다. 중국학자가 쓴 책을 번역한 책입니다.
흉노가 현재 터키를 이룬 튀르크족의 조상이라고 하고 서양 고대 시대를 끝낸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The Huns)라고 믿어지는데도 국내 저자가 쓴 책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학계가 한반도 북쪽인 평안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에 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이전에 말한 적 있는데,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으면 바로 마주치는 ‘오랑캐’들이 바로 흉노와 여진, 돌궐 등 유목민족이었을텐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비난은 하면서도 이들 유목민족과 이 초원지역에 대해 거의 손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혹시 학계가 아직도 ‘소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서구중심주의니 해서 비판을 했지만 서구의 보수적 학자들이 연구하는 걸 보면 무섭습니다.

서술경향을 떠나 한 전문연구자가 특정주제에 대해 1000쪽 저작을 내는 경우는 흔하고 역사학자나 정치학자가 단독 저서로 약 2000쪽에 달하는 책을 저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 저자의 같은 사례를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미권 학자들은 그렇게 하더군요.

책의 두께가 필요충분조건은 안되더라도 필요조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컨텐츠란 쌓여야 축적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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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본 역사 - 개방, 경합, 공생 - 동아시아 700년의 문명 교류사
하네다 마사시 지음, 조영헌 옮김, 고지마 쓰요시 감수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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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학자들이 3년간 공동연구 공동집필 후 나온 동아시아 해역사를 조망한 연구서입니다. 내용의 밀도와 깊이가 상당한 이 책은 13-14세기 몽골의 세계지배가 이루어진 시기, 16세기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접근하고 명을 중심으로 조공체계가 자리잡히고 ‘대왜구’가 출몰하던 16세기, 그리고 강력한 동아시아 정치세력들이 해상무역을 통제하던 18세기를 다룹니다.

모두 근대이전, 그러니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포함) 전통시대의 해역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합니다.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식인 육지의 통치세력 관점의 정치사 또는 왕조사 위주의 서술이 가지는 시각에서 벗어나 동일한 사실(史實)에 대한 다른 관점(perspective)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근세사는 고려 조선과는 전혀 다른 봉건적 막번체제(幕藩體制)인데다가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각 다이묘의 세습가문 등으로 이해하기가 무척어려운 분야이기도 합니다.

일본학자들의 저술이니만큼 이 책의 주된 촛점은 동아시아의 해역교류가 일본전통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사회경제사적 측면에서 고찰합니다. 따라서 몽골의 패권시대인 13세기에 동아시아와 인도양이 더 자유로운 교류가 가능했던 이유라든지, 일본에서 몽골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시 몽골의 속국이던 고려를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가 설명됩니다.

포르투갈의 등장과 일본산 은 그리고 멕시코에서 필리핀으로 들어온 신대륙 은의 중국 유입과 더불어 명나라 가정제 (嘉靖帝) 때 일어난 ‘가정왜구(嘉靖倭寇)’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과 물품이 교역되고 혼종이 된 시기로 16세기를 특징짓습니다.

18세기는 일본의 경우 도쿠가와 막부의 이른바 ‘쇄국정책’과 청의 강력한 해상통제 정책 그리고 조선의 해상통제 정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청은 조선은 육로를 통해서만, 일본은 직접 통상하지 않은 체 류큐를 통해 교역했고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류큐는 현재 가고시마의 사스마 번주와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청과도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막부정권과 직접 통교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모든 외교 및 통상절차를 진행했고 부산항을 통해서만 일본과 교류했습니다.
조선의 북쪽 교역자는 평안도 의주와 함경도 회령 경흥이외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도 부산포함 총 4곳의 교역지에서만 국경이 열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는 정권권력이 해상을 통항 인적교류와 통상을 강력하게 통제했지만 물품과 지식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로 18세기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일어난 육지를 통한 사행이나 일본으로의 통신사 교류, 중국의 동남해안에서 이루어진 유럽세력과 중국의 교류, 나가사키를 통한 중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류, 류큐와 일본 그리고 류큐와 청의 교류, 쓰시마를 통한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이시대 해양교류의 다양성을 반증합니다.

외부세력에 대해 특히나 폐쇄적이었던 조선은 18세기의 폐쇄성을 19세기에 가서도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동진과 유럽세력 특히 영국이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아시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오는 상황을 간과해 버린 것이 20세기 들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심지어 명이 멸망하고 청에게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항복을 하였는데도 그 이후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사대부들과 그 후대 양반들이 18세기를 지나 19세기 들어서까지 만주족인 청이 중원의 지배자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명에대한 의리만 생각하는 명분론을 주장하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현실인식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 중 ‘송자’라고 칭송받는 송시열에게 조선 멸망의 책임을 지우는 건 따라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소중화를 자처하는 문명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군사와 경제를 일으키지 않고 말그대로 쇄국책을 쓰다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던 나라가 조선이 아니었나요?
역사를 보면 동아시아에서 18세기 이래 조선처럼 강고하게 외국과의 교류에 철저하게 무감한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15세기부터 유럽세력이 동아시아에 나타났는데 조선은 오로지 명나라만 바라다 본 셈이지요.

이런 무감한 처사가 결국 19세기 말 청나라가 조선을 실제로 속국화하려는 빌미를 주게 됩니다. 조선이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이라며 표명해온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뒤이은 19세기 외척 세력들이 조선왕조 멸망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들이 청나라 사행이후 간접적으로 들어온 서양의 학문에 대해 배척하고 이를 탄압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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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 이화학술원 지성사총서 2
신용하 지음 / 지식산업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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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명예교수이신 신용하 선생의 한국개화사상사에 관한 저서입니다.

일본의 메이지(明治)시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구한말 한국 개화사상의 태동부터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기의 항일의병전쟁 발발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개화사상 교과서로 생각하면 적합한 책으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급진. 온건개화파 모두 이 책에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명성황후의 인척들을 비롯한 민씨척족과 친러 정치세력을 기본적으로 퇴행적이고 수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깔고 있습니다.

구한말 개화사상을 바라보는 주류학계의 입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갑신정변 세력들이 정변 실패 후 모두 일본으로 망명했었고 김옥균과 같은 주도적 인물들이 조선 후기의 척족이자 노론계통인 안동김씨 출신인 점을 들어 갑신정변 당시 이미 일본의 정한론 지지 세력이 조선에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합니다.

이 책은 또한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조선말 유학자이자 실학자인 박규수 (朴珪壽)를 그 비조로 꼽고 있습니다.
18세기 대표적 북학파인 연암 박지원 (燕巖 朴趾源)의 친손자로써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1866년 평양의 대동강에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구한말은 청나라가 속국이라고 오랫동안 자처하던 소중화국가인 조선을 ‘실질적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초기의 개화세력과 대립하면서 위협을 가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청일전쟁이후 청은 더이상 조선에 대한 속방화 (屬邦化) 전략을 추진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일본은 이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프랑스 영국 러시아 3국의 외교간섭으로 다시 청에 되돌려주는 굴욕을 당합니다.

러일 전쟁 이전 일본은 유럽의 제국 중 하나인 러시아의 동진과 연해주 점령 그리고 사할린과 쿠릴열도 등 북태평양 진출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감히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고종과 왕비 민씨는 이러한 정세를 틈타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와졌고, 이런 행동으로 일본은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사실상 망명정부를 꾸리게 되는 아관파천( 俄館播遷)을 하기에 이릅니다.

정한론을 주장하며 조선의 침략을 준비하던 메이지 일본은 러시아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런 상황은 결국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서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시는 것처럼, 청일전쟁 이후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이상 주장하지 못했고,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서구 열강들로부터 제국주의의 한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조선에 대해 사실상의 국권침탈을 시작하게 됩니다.

미국은 일본과 비밀협약을 맺어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하는 것을 서로 인정합니다(가쓰라 태프트 밀약).

미국으로서는 한때 알래스카까지 영역을 확장하던 대륙세력 러시아를 일본이 막아주어 내심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미 스페인이 400여년 전 점령했었던 요충지 필리핀에 교두보를 확보해 태평양에서 이익을 수호할 수 있어 이 가쓰라 태프트 밀약은 상당히 괜찮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또한 러일전쟁의 종전 협상을 주선해 포츠머츠 협정을 이끌어낸 중재자의 위치에 있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 소개된 고종황제의 ‘광무개혁 (1899-1904)’는 그 내용으로 보건데 ‘개혁’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교과서에 가르치는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전제왕권정치에서 입헌군주제로 이행하려는 독립협회 새화세력의 정치 운동은 독립협회의 탄압, 그리고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황제 고종의 전제왕권 강화로 이어지고, 조선 말과 개항기를 통해 조금씩 발전하던 상공업 회사들과 인삼거래에 대한 이권이 모두 황실관청인 궁내부 ‘내장원’으로 이관되어 황제는 부유하고 정부는 재정고갈에 허덕이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집권 수구세력들은 경제운용의 무능해 관련 사업의 돈을 까먹고 있다가 열강들의 압력에 굴복해 이권을 넘기는 일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양성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외세에만 의탁하는 황제도 한심하고 무능한 수구척신 세력들이 알리 없는 상공업 회사들의 이권을 민간에 불하해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권을 열강에게 팔아넘기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씨암탉을 잡아먹는 것처럼 황당한 일을 이 중요한 시기에 벌인 것입니다.

이 문제의 광무개혁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다른 연구를 통해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 교과서 체제의 책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단독저서로는 책 분량이 상당합니다. 본문만 총 563쪽이고 참고도서만 총 12쪽에 달합니다. 너무 많은 내용을 간략하게 담고 있어 각각의 독립주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서를 봐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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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가 쓴 책을 번역한 책입니다.

철저히 일본 쇼와시대 (昭和時代,1926-1989)을 살아낸 작가의 관점에서 메이지의 수도, 도쿄의 생활풍속과 경관변화, 근대적 교통수단의 발달을 고증을 통해 재구성한 책입니다.

도쿄는 결혼 전 제가 가장 많은 가보았던 도시이기도 하고, 메이지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바로 그 일본이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메이지의 도쿄가 어떠했을지는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더구나 제 고향이자 현재 살고 있는 서울의 현재 모습은 과거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그 밑바닥에 깔고 서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시행되었던 경성의 ‘시구개정계획’은 도쿄를 포함한 당시 일본제국의 도시계획 중 일부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경성이 일제의 수도 도쿄의 영향을 받았고, 도쿄의 경관이 이들이 당시 본받으려 했던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전진성,2015).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유럽의 후발주자였던 프로이센은 이상적인 건축양식을 ‘ 그리스 고전주의’적 건축양식으로 보고 중부 유럽의 변방이던 베를린에 이를 이식했다는 점입니다.


메이지 초기,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위시한 일본의 견미사절단이 유럽과 북미를 돌아보고 일본을 서구와 동등한 ‘문명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서양을 따라하기 시작합니다.

서구의 기술자를 초빙해 철도와 건축기술을 배우면서 도쿄 긴자에 최초의 서양식 거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도쿄대학과 각쿠슈인 등을 비롯한 서양식 근대 고등교육기관을 만들어 철저하게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 및 식민지 경영을 맡길 수 있는 엘리트들을 길러내기 시작합니다.

실제 이들 일본의 제국대학 출신 졸업생들은 한국의 고도성장기를 지나 2000년대까지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자와 동년배인 1930년대 생들은 지금까지도 ‘국가원로’ 그룹으로 또는 ‘헌정회’의 일원으로 아직도 한국의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책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조선주재 공사이던 전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를 열렬한 서구주의 추종자로 소개하는데, 그가 메이지 당시 유명한 연회장이자 사교장이던 로쿠메이칸 (鹿鳴館)의 건립을 주창해서 실제로 세워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도쿄의 도시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1923년 간토대지진(関東大震災)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당시 조선에서 살 수가 없어 일본에 건너간 재일 조선인에 대한 언급이나 이 지진으로 학살당했던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이책에 일절 없습니다. 아마도 메이지 시대만 다루다 보니 쇼와시대의 대사건인 이 지진을 언급만 한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가볍게 읽으려고 집어든 책이지만 의외로 일본인들의 세시풍속과 관련된 설명이 상당하고 메이지 시대의 도쿄의 경관변천을 삽화로 보여주는 건 ‘도시공간’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꽤 유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번도 혁명이 없었던 나라 일본의 수도 도쿄에 어째서 그렇게 많은 시니세 (老舗)가 번창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이해가 되었습니다. 조선에도 분점을 냈던 미스코시 (三越)백화점도 에도시대부터 유명한 3대 포목점 중 하나였다는 설명도 그렇고 긴자(銀座)의 유명한 제과점으로 단팥빵을 처음 만든 기무라야 (木村屋)에 대한 설명이 긴자의 시작인 ‘긴자벽돌거리’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10여년 전 긴자에 갔을 당시 늘 이 빵집에서 단팥빵을 사먹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의 구한말과 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한국이 다시는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심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시대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아픈 역사로 인해 더욱 그렇습니다.

가깝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나라가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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