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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본 역사 - 개방, 경합, 공생 - 동아시아 700년의 문명 교류사
하네다 마사시 지음, 조영헌 옮김, 고지마 쓰요시 감수 / 민음사 / 2018년 12월
평점 :
약 3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학자들이 3년간 공동연구 공동집필 후 나온 동아시아 해역사를 조망한 연구서입니다. 내용의 밀도와 깊이가 상당한 이 책은 13-14세기 몽골의 세계지배가 이루어진 시기, 16세기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접근하고 명을 중심으로 조공체계가 자리잡히고 ‘대왜구’가 출몰하던 16세기, 그리고 강력한 동아시아 정치세력들이 해상무역을 통제하던 18세기를 다룹니다.
모두 근대이전, 그러니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포함) 전통시대의 해역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합니다.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식인 육지의 통치세력 관점의 정치사 또는 왕조사 위주의 서술이 가지는 시각에서 벗어나 동일한 사실(史實)에 대한 다른 관점(perspective)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근세사는 고려 조선과는 전혀 다른 봉건적 막번체제(幕藩體制)인데다가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각 다이묘의 세습가문 등으로 이해하기가 무척어려운 분야이기도 합니다.
일본학자들의 저술이니만큼 이 책의 주된 촛점은 동아시아의 해역교류가 일본전통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사회경제사적 측면에서 고찰합니다. 따라서 몽골의 패권시대인 13세기에 동아시아와 인도양이 더 자유로운 교류가 가능했던 이유라든지, 일본에서 몽골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시 몽골의 속국이던 고려를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가 설명됩니다.
포르투갈의 등장과 일본산 은 그리고 멕시코에서 필리핀으로 들어온 신대륙 은의 중국 유입과 더불어 명나라 가정제 (嘉靖帝) 때 일어난 ‘가정왜구(嘉靖倭寇)’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과 물품이 교역되고 혼종이 된 시기로 16세기를 특징짓습니다.
18세기는 일본의 경우 도쿠가와 막부의 이른바 ‘쇄국정책’과 청의 강력한 해상통제 정책 그리고 조선의 해상통제 정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청은 조선은 육로를 통해서만, 일본은 직접 통상하지 않은 체 류큐를 통해 교역했고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류큐는 현재 가고시마의 사스마 번주와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청과도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막부정권과 직접 통교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모든 외교 및 통상절차를 진행했고 부산항을 통해서만 일본과 교류했습니다.
조선의 북쪽 교역자는 평안도 의주와 함경도 회령 경흥이외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도 부산포함 총 4곳의 교역지에서만 국경이 열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는 정권권력이 해상을 통항 인적교류와 통상을 강력하게 통제했지만 물품과 지식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로 18세기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일어난 육지를 통한 사행이나 일본으로의 통신사 교류, 중국의 동남해안에서 이루어진 유럽세력과 중국의 교류, 나가사키를 통한 중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류, 류큐와 일본 그리고 류큐와 청의 교류, 쓰시마를 통한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이시대 해양교류의 다양성을 반증합니다.
외부세력에 대해 특히나 폐쇄적이었던 조선은 18세기의 폐쇄성을 19세기에 가서도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동진과 유럽세력 특히 영국이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아시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오는 상황을 간과해 버린 것이 20세기 들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심지어 명이 멸망하고 청에게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항복을 하였는데도 그 이후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사대부들과 그 후대 양반들이 18세기를 지나 19세기 들어서까지 만주족인 청이 중원의 지배자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명에대한 의리만 생각하는 명분론을 주장하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현실인식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 중 ‘송자’라고 칭송받는 송시열에게 조선 멸망의 책임을 지우는 건 따라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소중화를 자처하는 문명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군사와 경제를 일으키지 않고 말그대로 쇄국책을 쓰다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던 나라가 조선이 아니었나요?
역사를 보면 동아시아에서 18세기 이래 조선처럼 강고하게 외국과의 교류에 철저하게 무감한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15세기부터 유럽세력이 동아시아에 나타났는데 조선은 오로지 명나라만 바라다 본 셈이지요.
이런 무감한 처사가 결국 19세기 말 청나라가 조선을 실제로 속국화하려는 빌미를 주게 됩니다. 조선이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이라며 표명해온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뒤이은 19세기 외척 세력들이 조선왕조 멸망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들이 청나라 사행이후 간접적으로 들어온 서양의 학문에 대해 배척하고 이를 탄압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