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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 식민지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탈향, 망향, 귀향의 서사
차은정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6년 6월
평점 :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간한 책으로 ‘한국 출신’일본인들의 ‘일본이주 ‘와 패전이후 이들이 기억하던 ‘식민지 조선’이 1965년 한일정상화 이후의 한국을 통해 어떻게 인식되어지는지 인터뷰와 동창회지, 한국 출신 일본인들의 회고록, 이들과 동창 관계에 있던 소수의 조선인 동창과의 교류를 살펴 봅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살 때 인식하지 못했던 ‘식민자 ‘로서의 자각을 일본의 패망이후 일본으로 다시 이주한후 일본에서 살아온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또 다른 존재로 바라 보았을 때 비로소 느꼈다고 고백한 점입니다.
흔히 일제 강점기를 볼 때 억압받는 조선인들의 입장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인데 비해 당시 일본 본토( 내지, 內地라고 불리던)에서 조선으로 ‘이주’해온 재조 일본인에 주목한 점은 그래서 참신합니다.
인터뷰를 한 한국 출신 일본인들 중 이미 고령으로 고인이 된 분이 많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1920-1940년대 이들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과 경험담, 그리고 당시 조선인들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지(ethnography)적’ 기록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1930년대 말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에 이들이 경험했던 학교 생활과 조선인들과의 생활경험은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략침략과 그들의 군사물자 동원 , 식량 증산계획 등을 숫자가 아닌 일차적 경험으로 알려주는 것이기에 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케이스 스터디에 해당하는 경성사범학교 출신들의 경험담과 경성중학교 출신의 경험담은 시대의 차이를 두며 약간 다른 양상을 띄지만 이미 일제는 1930년대부터 사범학교 출신 국민학교 교원들을 조선 각지의 농촌에 발령내고 이들을 통해 식량 중산을 꾀했고 이들을 통해 지역을 조선총독부 정책 실행의 최전선에 앞세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 경희궁 자리에 있었던 경성중학교는 설립 당시 이미. 조선총독부 자녀들만을 위한 일본인 학교였으며 아주 소수의’양반가 ‘ 조선인이나 사업가 자제들만이 이 학교에 입학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산 그룹을 세운 박승직 상점가 장남 박두병이나 한은 초대총재 구용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 등이 경성중학교 출신인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국가정책에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했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계층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고, 일제가 아무리 조선을 일본화하려 해도 조선의 촌부들이 일본어를 잘 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농촌에 발령받은 경성사범 출신 일본인들은 학교에서 배운 조선어로 의사소통 할 수 밖에 없다고 회고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당시 졸속으로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의 막후 접촉을 위해 일본의 자민당 간사장 출신 정치인이 청와대를 방문하고 비밀협상을 한일 양측 모두 ‘일본어’로 진행했다는 후일담이 나왔을 때 매우 놀랐고 경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는 일제시대를 산 인물들이라 일본과 관계가 긴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 딸까지 일본에게 어쩔줄 몰라하다니. 부녀가 일본에게 한국을 얕잡아볼 기회를 제대로 주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때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식민지 시대에 교육받은 소위 한국사회의 ‘원로’라는 집단을 통해 한국에 분명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1960년대는 한국 전쟁이 끝난지 10여년 해방이 된지 2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때로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엘리트들이 넘쳐나던 시대였습니다.
위의 경성중학교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한국 출신 일본인들이 자신의 동기 동창들이 한국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고 젊었을 때 하던 것처럼 ‘요정’에서 술을 마시고 즐기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알던 산업화 세대가 은퇴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1960-70년대 처럼 일본이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는 하기 어려울 것으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지난 40여년간 일본에서 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면 몹시 불편한 기분입니다.
또 한가지 이들의 인터뷰에서 불편했던 점은 한국 출신 일본인들이 1930-40년대 당시 조선인들과 ‘잘 지냈다’는 이유로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에 명시적으로 드러났던 차별을 은폐하려 했던 경향이나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이 본격화되었는데도 본인들의 경험으로 자신들이 농촌 부락의 생산성 증대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무마하고 자신들이 총독부 정책을 충실히 집행한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회피하는 듯 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반성이나 청산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온 한국이나 일본모두 그래서 애매하게 상황을 마무리짓고 어물쩡 넘어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륙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태평양 해양 세력으로 떠오른 미국이 러시어와 중국의 힘을 압박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 모두 일제 강점기 상황을 그대로 놔둔 체 ‘현상유지 (status quo)’를 채택해 온 것이 해방이후 70여년이 넘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현재의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경성중학교 자리는 일제가 한일병합이후 경복궁 에 조선총독부를 1925년 완공해 입주한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관료들을 위해 관사를 만들고 또 이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만든 것이 시작입니다. 사유지를 피하기 위해 경희궁이라는 조선의 궁궐 자리에 학교를 지은 것도 사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19세기 말 경성에 진출한 당시에 모여살던 현재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서 점차 양반들이 모여살던 북촌으로 거주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경성중학교 자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립된 것입니다. 종로와 북촌일대에서 많이 모여살던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인들이 침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성에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따로 모여 살았는지 같이 섞여 살았는지는 연구서들마다 약간씩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섞여 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부는 대체로 일본인들이 독점해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빈부격차는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