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보려고 했던 책 중에 ‘유럽과 역사가 없는사람들 (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2010)’이라는 오리엔탈리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저작이 있습니다. 아마존의 책소개에 따르면 책의 기본 개념과 용어 자체가 다분히 서구 중심적(Eurocentric)으로 유럽과 그 외의 지역을 ‘양분’하고 있습니다.
비서구를 ‘몰역사적(ahistorical)’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정적으로 존재하는 변화없는 보여지는 존재가 바로 서구가 비서구를 바라보는 시각(perspective)입니다. 나름 진보적이라는 뉴욕시립대 (CUNY) 교수의 저작 제목이 이럴정도라면 다른 보수적 교수들의 저작은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위에 소개한 책은 기회가 되면 다시 리뷰를 본격적으로 할 생각입니다.

반면 오늘 소개할 강인욱 교수의 책은 위의 책과 정반대를 지향합니다.

역사는 승자가 집필한 기록으로 이해되고 ‘주류(mainstream)’들의 생각과 기록만이 남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당시의 사회상을 제대로 재구성하기가어려운 현실 속에 소위 역사학의 인접학문인 고고학과 인류학 등이 이 기록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과거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은 단순한 문서기록뿐만 아니라 지나간 삶의 생활흔적을 보고 당시의 생활을 재구성(r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점에서 수사와 비슷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소위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것도 19세기 제국주의가 극에 달했을 당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서구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자랑하는 박물관은 사실 이들이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것들입니다.

고고학자인 저자의 고백처럼 고고학은 제국주의를 위해 철저히 봉사한 일종의 관학(官學)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국주의(imperialism)의 내러티브는 언제나 근대화된 ‘문명국’이 ‘미개한’ 식민지에 ‘문명’을 가져다 준다는 주장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오키나와와 에조치(蝦夷地, 현재 홋가이도 ), 대만과 만주를 침략할때 앵무새처럼 같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참고로 일본은 본인들의 기원이 유럽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주장했다고 저자는 전합니다.
탈아입구에 목마른 건 알겠는데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똑같은 주장을 지구 반대편의 스페인이 마야제국을 파괴하고 마야인이 미개인이며 이교도라고 학살하면서 했던 주장입니다.

하지만 정작 파리의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에서 직접 이들이 약탈해온 유물과 본국의 유물을 비교해서 보면 유물이나 미술에 문외한인 저의 눈에도 서구유럽의 ‘선진적 문화’가 과연 있기는 한건지 의심이 든 경험이 있습니다. 서양공예의 조잡한 형태를 보면서 이들이 왜 중국도자기에 열광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

제 개인적으로 1990년대 말 대영박물관에서 캄보디아의 이름모를 고대왕국의 섬세하고 복잡한 도자기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후진국이라고 배웠고 동남아시아나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했던 20대 후반의 사회초년생이 몰락한 제국의 수도에서 그 진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학술적인 성격이 전혀 없지 않으면서도 대중서의 성격을 가진 이 책은 저자가 한겨레에 연재한 글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저자후기에 썼습니다. 저도 이 책의 글중 몇편은 안터넷으로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300쪽이 조금 넘는 작은 책이지만 각 글에서 인용한 필수 참고문헌을 충실히 실어 다른 한국의 논픽션류와 다른 차별성을 보입니다.

저는 소설이나 문학작품이 아닌 모든 논픽션, 사회과학, 자연과학서 그리고 역사서들은 반드시 참고문헌과 각주와 찿아보기가 뒤에 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누구든 이를 제공하지 않는 책을 믿지 않습니다. 책을 머리말부터 후기까지 모두 읽는 저는 한국의 저자들이 대체로 자신의 저작에 기여한 이들을 드러내는데 안색하고 이런 좋지 않은 관습이 책 내용을 심각하게 저하시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책 내용으로 잠시 돌아가서 이 책이 ‘미지의 땅’에 사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삼다보니 동아시아에서 ‘화이사상(華夷思想)’의 지배 속에 오랑캐로 치부되었던 돌궐, 말갈, 흉노, 소그드인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고 지금도 여전히 베일에 싸인 극동 시베리아의 동쪽 끝 오오츠크해와 배링해의 애스키모 민족들, 일본 본토에서 살다 홋가이도까지 쫓겨 올라간 아이누인들과 막부시대 청과 일본에 복속했던 류큐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베링해협을 통해 북아메리카에 건너갔을 가능성도 이야기 되고 있고 마야문명과 중국문명과의 관련성도 이야기됩니다.

글을 읽다보면 아메리카 대륙이 15세기에 ‘발견’되었다는 건 서구 유럽에서 그들의 시각애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문명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유럽문명울 신대륙에 ‘이식’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영문도 모른체 서구인들에 의해 ‘아메리카 인디언 ‘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영화에서 백인들에게 못된짓을 하는 야만인으로 묘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영상 속 ‘이미지’일 뿐 그 실체가 아니고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는 것이 우리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끝으로 저는 강인욱 교수 책을 처음 읽어 보았는데, 이야기 자체가 설득력도 있고 쉽게 쓰여 좋았고 보기 드문 시베리아 고고학을 전공한 저자의 책이어서 이 지역에 관심이 있다면 개론서로 읽어도 좋을 듯 합니다.

이 책에서 신라를 다루면서 언급한 흉노족에 대한 국내 저자의 책은 현재 없습니다. 다만 10여년 전 나온 ‘흉노제국이야기(아이필드,2010)’이 거의 유일합니다. 중국학자가 쓴 책을 번역한 책입니다.
흉노가 현재 터키를 이룬 튀르크족의 조상이라고 하고 서양 고대 시대를 끝낸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The Huns)라고 믿어지는데도 국내 저자가 쓴 책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학계가 한반도 북쪽인 평안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에 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이전에 말한 적 있는데,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으면 바로 마주치는 ‘오랑캐’들이 바로 흉노와 여진, 돌궐 등 유목민족이었을텐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비난은 하면서도 이들 유목민족과 이 초원지역에 대해 거의 손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혹시 학계가 아직도 ‘소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서구중심주의니 해서 비판을 했지만 서구의 보수적 학자들이 연구하는 걸 보면 무섭습니다.

서술경향을 떠나 한 전문연구자가 특정주제에 대해 1000쪽 저작을 내는 경우는 흔하고 역사학자나 정치학자가 단독 저서로 약 2000쪽에 달하는 책을 저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 저자의 같은 사례를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미권 학자들은 그렇게 하더군요.

책의 두께가 필요충분조건은 안되더라도 필요조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컨텐츠란 쌓여야 축적되는 법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