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Dennis Kim > 카톨릭 수녀출신 종교학자의 일신교(一神敎, monotheism)입문서

전광훈이라는 희대의 정치목사가 기독교 신앙 자체를 능멸하는 지경에 있는 한국 기독교를 보면서 기독교에서의 신 (God)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하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헌법에 명시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란 원래부터 약자에 대한 ‘사랑’이 그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있지만 한국의 대형 기독교 교회들의 독단과 오만과 탐욕을 보면서 종교인으로 본인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이 무엇을 모르는 지를 모른다’라는 말은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2년전 서평을 썼던 ‘신의 역사’라는 책은 서양의 일신교 (monotheism)의 역사입니다. 서양에서 바라본 신의 의미에 대한 역사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구약 (Old Testament)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유대교와 같은 뿌리를 가진다는 것도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편협한 근본주의적 기독교인 ( Fundamental Christian)이 거의 적대시 하다시피하는 이슬람(Islam)도 역시 기독교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호전적 이미지는 지극히 서구중심적 시각(Eurocentric Perspective)을 통해 나타나는 것일 뿐이지만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 ( 전광훈 목사도 포함될듯 합니다)은 이런 정보를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악의적으로 부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혼돈이 생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지 생각합니다.

저는 세속에서 똥물을 묻히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지만 모름지기 성직자나 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앞에서 소위 훈계라는 걸 하려면 최소 ‘염치’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화나 종교 뉴스에서 거론되어야 할 목사의 이름이 정치/사회 뉴스에 떡하니 나온 걸 보면 너무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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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근래 읽었던 조선 역사에 관한 저서 중 첫 손 꼽히는 노작 (勞作)입니다.

인용 문헌의 방대함에 한번 놀라고, 저자가 한국인이 아니라 영국에서 은퇴한 스위스인 노교수라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랍니다.

독자로서 전통 한국사회와 유교의례에 대한 내용을 외국 한국학자의 저서를 통해 읽는 경험은 당혹감과 자괴감 그리고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한국인으로서 우리문화의 고갱이가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도 읽을 것 같지 않는 이런 저작을 출판한 하버드대 출판부도 그렇고 이 연구를 지원한 런던대학도 그렇고 새삼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책에 대해 잠시 소개하면 1995년 미국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의 한글판 입니다.

동아대학교 이훈상 교수가 10여년에 걸쳐 모든 각주와 문헌을 검토하시고 번역을 하셨다고 합니다. 역자 후기에 지난한 번역과정이 잘 나와 있습니다.

저자인 도이힐러 교수는 저자 후기에서 이책의 집필과정을 간략히 소개하였는데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고 조선의 전통사회를 연구하기로 한 것이 60년대 말이었다고 합니다. 옥스퍼드 사회인류학 연구소에서 인류학 방법론을 배운 직후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15세기가 조선 사회 변동기임을 감지하고 고려말에서부터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전기까지의 조선 사회의 변동을 유교화 (The Confucian Transformation)의 관점에서 연구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조선 건국의 이념이자 사회개혁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 (신유학) 경전을 연구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됩니다.

저자의 연구기간도 196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긴 기간이 걸렸고 이책의 초판본 번역이 10년 걸려 2003년 출판됩니다. 개정 번역판임 본서는 또 10년이 지나 2013년 나오게 됩니다.


이 책이 집필되던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의 지식사회는 거대 담론에 매몰되어 있었고 역사학계는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이 책의 주요 테마인 종족(宗族)에 대한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벽안의 여성교수가 각종 한문 고문헌과 족보 등 한국의 종족집단의 사료를 찿아 현장을 돌아다니다니.... 믿을 수 없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이죠.

이미 많은 분들이 이책의 평을 남겨 저는 간단히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려 합니다.

1. 고려말 원에서 들어온 신유학(성리학)을 배워온 고려의 엘리트들은 고려 사회가 희망이 없다고 보고 조선의 개국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지배적인 이념으로 신유학을 선택하고 사회제도를 이에 맞게 변혁시킵니다.

2.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과 친족에 대한 입법을 시도하여 사회를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게 변화시킵니다.

3. 고려말 일반적이던 신랑의 처가살이와 아들 딸 구별없는 군등분할 상속은 조선 개국이후 약 250여년간의 입법 과정을 거쳐 신부의 시집살이로 상징되는 신부의 부계종족집단 귀속과 함께 아들 중 적처 (嫡妻)의 장자 (長子)만이 조상에 의례를 올릴 수 있게하는 장자상속으로 바뀌게 됩니다.

4. 이러한 입법과정을 통해 조선은 양계, 즉 부계와 모계 혈연 집단이 동등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회에서 강력한 부계중심 사회로 변하였으며 고려말까지 사회에 발언권을 가질 수 있고 재산상속도 가능했던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켜 재산상속과 발언권을 약화시켜 여성의 활동반경을 집안으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5. 이렇게 남성중심의 부계 사회로 변모한 조선에서 상속이 가능한지 여부는 어머니의 출계집단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적처는 자신과 같은 사대부 집안에서 받아들였으니 첩 (妾)은 양반가문이 아닌 평민 혹은 천민계급에서 취하여 첩의 소생인 서얼들의 경우 가문의 대를 잊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의 골치아픈 사회문제가 됩니다.

6. 이렇게 사대부 가문의 대를 이를 수 있는 것은 적처의 소생 중 장자만 가능하였고 딸들이랑 차남 첩의 자식들은 친족집단에서 주변부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7. 이런 사회변동은 대략 17세기까지 완료되었고 결국 사대부의 대를 이를 수 있는가 없는지는 자식들의 어머니의 계급이 어떤가에 달린 것으로 엄격한 처첩 (妻妾)의 구분은 중국과 다른 조선만의 특징이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국의 남아선호사상과 남성우월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고려 말 조선초의 신진 신유학자들의 유교적 사회 개혁에 따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길어봐야 500년 된 것으로 한반도의 한국인들이 처음부터 부계 중심 사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책에 언급된 고려시대의 단면은 오히려 지금의 한국과 더 닮았습니다.

결혼을 하면 기본적으로 남성이 여성의 친정에 들어가 살았고 후손들은 성별에 관련없이 부모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런 사회 분위기는 고려가 몽골, 즉 원나라라는 거대 제국에 사실상 통합된 형태로 100여년 이상 지내온 영향이 클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 왕비들은 몽골 출신이 많았고 고려의 왕들은 원의 수도 북경에 오랫동안 살기도 했으니 북방 기마민족인 몽골의 영향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이 명에 대해 제후국으로서 소심하게 처분을 기다리고 중국 고대 사회를 조선에 세우려는 목적으로 사회를 개혁하려고 할만큼 모든 사회제도가 엘리트이자 특권층인 양반들 위주의 사회였다면 고려는 최초 문인들의 정권이 무신들에 의해 뒤집어지고 몽골이라는거대 제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면서 외부세계에 대한 거부감도 덜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더구나 고려 당시에는 출계집단에 대한 족보와 같은 기록도 많지 않아 지배층이 평민등 하위 계층에 대한 ‘구별짓기’를 하기 어려웠던 것도 한 이유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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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전에 서평을 올렸던 ‘인정사정, 조선군대생홯사’의 후속편입니다.

여러명의 저자가 학제적으로 연구한 연구 결과물로서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훈련도감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을 아우릅니다.

이 책은 제목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조건의 호환 (虎患)과 훈련도감의 역할에 대한 내용 (5장 호랑이 잡는 훈련도감)과 화폐를 주조했던 훈련도감 ( 6장 훈련도감 군인들의 동전 만들기) 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내용이 ‘조선 최정예 군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제목과의 관련성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위의 두 글에 앞서 훈련도감이 임진왜란이후 왜 세워졌는지, 어떤 병서의 이론적 기반을 두고 세워졌는지는 ‘ 1 장 훈련도감을 만든 두권의 책’에 개략적으로 나와있습니다.

1장의 내용은 ‘인정사정, 조선군대생활사’에도 마오는 내용이 일부 있습니다만 간략히 다시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훈련도감은 1592-1598년의 임진왜란을 경험한 후 일본이 사용했던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해 조총을 사용할 수 있는 군인을 양성하고자 합니다.

이에 선조는 당시 잘알려진 명나라 무장 척계광(戚繼光)이 중국 남부 해안에서 왜구의 침략에 대응한 전투를 경험한 후 이들을 공략할 수 있는보병 운용에 대한 책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저술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책을 구하도록 명합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훈련도감을 만듭니다. 훈련도감을 만든 또하나의 병서는 역시 척계광이 지은 것으로’연병실기 (練兵實紀)’로 주로 기마전술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이는 명나라가 북방의 여진족 등 기마민족들과의 전투경험에 따른 병법을 정리한 것으로 보병 위주의 훈련도감 편제에 전차를 더 추가해 전투력 증대에 기여하기 위함이었습나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의 호환에 대해 잠깐 소개합니다.

조선에 호랑이가 한양과 궁궐 주변에 출몰했다는 기록이 훈국등록 및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한반도가 큰 산들이 많아 야생동물이 많이 살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조선 왕조 전반에 걸쳐 호환이 국가재난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습니다.

궁궐과 가까운 북악산은 물론 궁궐 안에까지 호랑이가 나타났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렇게 호랑이의 출몰이 계속되자 임진왜란 이전 조선에서는 호랑이를 잡는 전담 군영이 설치되었습니다.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이름의 군사들로 오로지 활과 창을 이용해 호랑이만 전담으로 잡는 조직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가 개편된 이후 착호갑사의 임무가 훈련도감으로 넘어옵니다. 일단 훈련도감이 살상력이 뛰어난 조총을 운용하는 부대였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을 것이고 호랑이가 궁궐 및 한양에 출몰하는 까닭에 이를 호위하고 방어하는 임무를 지닌 훈련도감으로서 호랑이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훈련도감의 화폐주조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조선은 현재 한국처럼 화폐의 발행의 권리가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 왕조국가로 발행권한은 왕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가지고 조폐공사를 통해 독점적으로 화폐발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왕이 명령을 내려 화폐발행을 지시하면 화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주조화폐만 유통되는 경제 아니었습니다. 즉 화폐만으로 물품의교환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각종 면포 및 특산품 쌀 등이 화폐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독점적으로 일정 규격의 화폐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훈련도감을 비롯해 어영청, 금위영 같은 군영이나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관아에서도 필요에 따라 화폐를 주조하게 됩니다.

한양에서 화폐를 주조해 다시 해당 지방까지 가져가는 비용이 크고 번거롭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방에서 화폐를 주조하도록 한것입니다. 특히 군영은 필요한 군사비를 왕명에 따라 직접 주조해 조달하는 독특한 체계를 갖춘것으로 보입니다.

군영에서 화폐를 만든 것도 유사한 이유가 있겠지만 조선 후기 훈련도감이 직접 장인들을 고용해 필요한 무기를 만들던 곳이라 화폐의 주조가 용이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상 제가 관심을 가졌던 글 몇가지 소개를 마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조선의 천문과 관련된 ‘7장 천문과 우주를 품은 군기’ 와 ‘9 장 조선 거동 음악의 미학’ 두개의 글입니다.

천문이라는 생경한 분야에 동양적 천문사상이 들어가니 읽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악학궤범’등을 비롯한 조선의 음악서적을 인용한 조선의 거동음악도 이해 안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두 글은 용어와 배경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들어가야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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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 고전탐독 1
원창애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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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대표적 궁궐 경비 조직이자 최고의 군영인 훈련도감에 대한 입문서입니다.

그동안 역사책에서 들어본 이름인 ‘훈련도감’이 어떻게 설립되어 운영되어 왔는지 소속 군인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일본의 신무기 조총을 경험한 조선은 그 위력을 실감하고 조총을 사용할 수 있는 부대의 양성에 나섭니다. 중국의 남부 해안에서 일본의 왜구를 물리쳤던 명나라 의 무장 척계광( 戚繼光)의 ‘기효신서 ( 紀效新書)‘를 기반으로 한 군부대 양성에 나선 것입니다. 전쟁으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훈련도감은 하층민과 천민도 모두 군인으로 받아들입니다. 조선 전기의 의무병제는 임진왜란 이후 사실상 모병제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명의 저자가 정치, 경제, 건축, 복식, 법률 등 분야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부쳐 가볍게 읽기에 좋습니다.

경제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훈련도감의 직업 군인들이 나라에서 받은 급료로 생활을 할 수 없어 서울의 장터에 나와 장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관심이 갔습니다.

문인의 나라 조선에서 하급 무관일 뿐인 훈련도감 병졸들의 생계를 모두 책임지지 못했고 이는 당국의 묵인하에 이들의 상행위를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는 서울의 상권을 가지고 있던 상인들과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일으켰고 상대가 무관인지라 상인들 역시 조정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조선의 무인계층에 대한 책을 보기 어려운 실정에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훈련도감의 입문서가 발간된 것은 반갑다고 생각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수장된 국내 유일본인 군영등록인 ‘훈국등록 ( 訓局謄錄)’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 작은 책자를 발간했다고 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내용을 좀 더 전문적으로 보완해서 좀더 내실있는 책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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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관심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홍승현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입니다.

진(秦)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이후 중국의 황제는 천하를 지배하는 전제군주로서 한족이외의 이적(夷狄)을 직접 지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중국의 통일이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한족과 한족이외의 오랑캐들은 분리의 대상이고 다른 세계일 뿐 지배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제국으로 최초의 모습을 드러내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長城)을 쌓기 시작했고 중국의 영역이 오랑캐의 영역으로 확장되며 이적지배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 이론을 정립하게 됩니다.

최초의 통일 제국 진(秦)나라의 경우 황제인 천자(天子)가 지배하는 천하(天下)는 온 세상이며 경계가 없으며 종족이 한족이든 오랑캐이든 모두 황제의 백성으로 ‘직접지배(直接支配)’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한(漢)나라로 넘어오며 이상적인 이적의 직접지배는 불가능하게 되고 이적의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속국(屬國)을 통한 지배를 하게 됩니다.

황제(皇帝)가 천하를 다스린다는 전제하에 속국의 제후 (諸侯)를 왕으로 책봉 (冊封)하고 조공(朝貢)관계를 맺는 것이죠. 속국의 제후는 자신의 영역을 직접 지배하지만 이론상 온 세상을 지배하는 천자인 황제는 속국을 그저 간접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과 오랑캐의 관계는 결국 황제의 정치적 군사적 힘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중국의 영역이 이적의 땅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거치며 직접적인 영향력을 얼마나 미치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중국이 진. 한 시대를 거쳐 위, 촉, 오 (魏, 觸, 吳)의 삼국시대에 이르면 중국의 한족이 이적의 땅에서 나라를 세우면서 과거 중국이 아닌 지역이 점차 중국화 되어갑니다.

이적과 한족은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게되는 경우가 생기면서 중국이 어디인가에 대한 고민도 같이 하게됩니다.

특히 오나라의 경우 중국의 삼국 중 하나이지만 제국 자체가 오랑캐의 땅에 세워졌기 때문에 황제의 정치력은 오나라 전체에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지역 맹주들이 황제권에 도전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즉 표면적으로는 책봉과 조공관계에 있었지만 변방지역을 ‘지배’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남북조시대로 넘어오며 이적에 대한 중국의 통치방법은 또 달라집니다.

남조의 경우 사실상 지방 제후들에게 자치권과 군사권을 준 간접지배의 통치방식을 취했습니다. 황제의 정치력이 토착세력과 이적의 힘을 억제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간접적인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반면 북위의 경우 직접통치를 위해 오랑캐인 토착민 부락을 해체하고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강제적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반중국역사’라는 책에서 몽골 오이라트 지역 출신 저자는 중국의 한족들은 타민족과 구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영역에 이민족의 침범을 용납할 수가 없어 만리장성을 쌓고 장성안의 지역을 중국으로 장성 밖의 지역을 이적의 땅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중국이 중심이고 따라서 야만적인 이적들을 중국이 직접지배해야 한다는 것이 최초의 생각이고 이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춘추전국시대에서부터 남북조 시대까지의 실제 직접 지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론과는 달리 오랑캐 수장의 통치력과 군사력이 압도적이어서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사실상 지도 상 중국의 통치영역이었다해도 황제의 직접통치는 쉽지 않았고 오히려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며 공생을 도모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보여집니다.


여태까지 배운 중국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오랑캐의 입장보다 대체로 역사를 기록한 한족의 입장을 반영해 역사서술 이면에 있는 실제적 이야기를 접하지 못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살아온 것이 아난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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