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 중 한분인 정세권은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 경성에서 활약하신 부동산 디벨로퍼( Real Estate Developer)입니다.

부동산 디벨로퍼란 말 그대로 토지를 싼값에 사들여 그 토지를 시장 활황시 그대로 매각하거나 그 토지에 건물을 지어 부사가치를 올린후 그 건물을 매매하거나 임대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자를 말하지요.

2017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경민 교수가 쓴 이 책은 200여 페이지 내외의 짧은 책이지만 흔히 ‘집장사’로 폄하되어온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의 일생을 당시 신문기사, 정세권의 아들, 딸, 외손녀 등 후손들을 인터뷰해 다시 재구성하고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재조명한 책입니다.

도시공간이나 도시의 역사,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 분야가 토지의 경제적 측면을 보는 부동산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한국에서 이런 부분에 촛점을 맞춘 경우는 이 책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읽었던 김시덕교수의 ‘갈등도시 ( 열린책들,2019)’에서 이 책을 처음 소개하셨고, 현재의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최근 일독을 한 것입니다.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된 이책의 1부와 2부는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과 1920-30년 당시 경성의 일본인 진출상황에 관련된 내용이고 3부는 정세권이 본업인 부동산 개발 이외 참여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후원 관련된 내용입니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숭리한 이후 사실상 서구의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지배를 공인받고 인천지역인 현재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에 진출하여 남산 아래 통감부를 세우고 최초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꾸고 조선신사를 세우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마련하여 사실상 남촌을 장악했습니다.

‘명동길거리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2019)’에서는 일본인의 남촌 정착과정과 명동에서 일본 백화점들이 진출해 일제시대 어떻게 이곳이 소비의 중심으로 떠올랐는지 그리고 당시 명동의 메이지좌 ( 현재 명동예술극장)가 북촌의 조선인과 남촌의 일본인을 관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처음에 명확하던 남촌의 일본인 관객과 북촌의 조선인 관객의 경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분명해지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조선과 일본의 관객들이 남촌과 북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불분명해지는 것은 이 당시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과 무관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에 완공된 것을 기회로 일제는 여기서 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관사를 짓는 수법으로 지금의 북촌과 서촌일대 그리고 서소문 경희궁을 비롯한 관화문 주위의 ‘북촌지역 ‘에 그들의 거주지를 확대해 갑니다.

광화문 일대 관청가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이순우 작가의 ‘광화문 육조앞길 (하늘재,2012)’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소위 서양식 ‘문화주택’의 개발에만 집중하고 조선인 중하층 인구에 대해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아 토막민(土幕民)으로 불리는 영세민들이 열악한 토굴과 같은 오두막에 사는 등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사회갈등의 요인이었는데도 일제는 그냥 무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세권은 1920년대 북촌에 ‘개량한옥’을 개발해서 중하층 조선인들에게 싼값으로 공급했습니다. 일본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였던 조선인들이 고급주택을 살수는 없어 기존의 한옥을 규모가 작고 생활이 편리하도록 개량해서 공급한 것입니다.

그는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성북동, 혜화동, 창신동,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을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전통한옥마을로 알고 있는 북촌한옥마을이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익선동의 풍경은 모두 정세권이라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린시절 보았던 개량한옥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이 생각납니다. 혜화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저는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명륜동의 한옥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삼선교로 가는 길목에도 한옥들이 가득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근래 익선동이 힙한 카페들로 다시 뜨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무조건 새것보다 세월의 때가 묻은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살기 불편한 집이라고 다 밀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은 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닙니다.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 나라라고 명시되어 있고, 서울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호불호와 관련없이 일제강점기 때 이루어진 그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더구나 일반 시민들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일제시대 가옥과 공간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일제 유산 청산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밀어버리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처사인 것 같습니다.

일부라도 보존해 일제가 한국에 어떤일을 벌였는지 증거로서 남겨두어야 하고 그래야 잊혀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자비한 철거는 과거의 위정자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이들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3부에서 정세권이 안재홍과 벌인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이극로와 함께 동참한 조선어학회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소위 먹물이라는 지식인들이 노선투쟁이나 하고 뜬구름잡는 이론을 잡지에 내면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말아먹다가 정세권의 합류로 이 운동이 되살아나는 모습은 보기 상당히 안쓰럽습니다. 물산장려화관을 지어서 후원금으로 충당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정세권 사비로 건축비를 츙당했다는 에피소드는 지식인들의 ‘허위’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도 정세권을 ‘집장사’라고 폄하했다니 황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 의식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단순히 당시 신문기사 등 일차사료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정세권의 딸 아들 등 후손들과 직접 인터뷰해 당시 상황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현재 서울의 공간이 일률적으로 모두 아파트라는 공동주거형태로 재편되고 있는데, 과거 1970년대 이전,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인 일제강점기 서울의 주거형태가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과 그 이후 한국을 통치한 이들이 수도 서울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집장사라고 폄하되었던 정세권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것도 그래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1926년 완공되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에 의해 1990년대 초에 철거된 것 만큼 서울에 존재하던 수많은 개량한옥들이 1920-30년대 건축왕 정세권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한옥들이 필요에 위해 헐려나갔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정말 필요한 것이 맞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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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전 서울의 도심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광복이전까지 경성에 자리잡았던 일제 강점기 당시 어떤 건물들이 어떤 지역에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개화기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말 대한제국기까지 유지되었던 관청가인 경복궁 앞 육조(六曹)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이들의 통치기구 설치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일차사료인 당시의 신문과 관보, 실록 등과 같은 기록자료를 통해 그 변천사를 추적합니다.

2012년 출판된 책으로 약 39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근대건축물, 특히 근대이후 중앙 관청의 공간변천사를 기록한 책은 이 책을 제외하고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조선 말 왕조의 수도 한양이 어떻게 일제의 식민지 도시 경성으로 바뀌어 갔는지, 일제 식민 당국은 어떤 필요에 위해 어떤 장소에서 그들의 행정부서를 세웠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간의 ‘정치사’이자 ‘ 행정조직 변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칭하는 이유는 인용문헌의 출처가 대부분 <조선총독부 관보> 또는 <통감부 관보>그리고 <고종실록 >,<승정원 일기>등 통치기관의 공식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몇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첫째, 갑오경장이후 을사늑약 전까지 기존의 육조 자리에 자리를 잡았던 대한제국기 관청들은 나라의 힘이 열강에 달리고, 정세가 불안정 한 탓에 수많은 자리바꿈이 일어나게 됩니다.

둘째, 1910년 을사늑약이후 일본은 통치권 강화를 위해 본격적으로 육조거리에 그들의 관청을 세우기 시작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며 육조거리의 틀을 변화시킵니다. 대한제국기 일본인 거리였던 남산의 충무로 근방에 있던 통감부는 후일 총독부로 확대되어 약 10여년의 공사 끝에 경복궁 내의 신청사로 1926년 옮겨오며 육조거리 변화의 정점을 찍습니다.

일제는 1910-1920년대를 통해 서양식 관청 청사를 속속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건립합니다. 일제 특유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투영된 거리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일제강점기 때 구획이 나뉘어졌던 광화문 앞 육조거리는 해방이후 미군정 시기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이 도심의 구조가 무너진 결정적 계기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후 약 10여년간 복구를 하지 못하던 이 거리는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대대적 도로확장과 함께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 갑니다. 이후 2009년 경 광화문 광장 공사로 이일대의 공간구조는 완전히 변모했고 일제시기까지 유지되던 ‘육조거리’의 모습은 현재 찿을 길이 없습니다.

넷째, 이 책은 서울의 특정한 공간 즉 광화문 서쪽의 세종로 77번지,78번지, 79번지, 80번지, 81번지 그리고 광화문 동쪽의 76번지,82번지, 84번지, 149번지의 공간이 1880년대부터 1945년까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고찰합니다. 이렇게 특정 장소에 대한 변천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적한 문헌은 처음이고 다소 딱딱한 감도 있지만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이 책에서 보았던 공간 변천의 특징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변화보다 해방이후 거리의 변화가 더 컸다는 점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 같습니다.

도시개발관련 제가 당국에 느끼는 점은 이들이 개발을 너무 물질적인 잣대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볼 수 있는 브랜드를 입점시킨 고급 쇼핑몰이나 화려한 건물들로만 가득찬 도심공간개발만이 도심개발은 아닐텐데, 현재까지 서울의 도심개발은 모두 ‘돈’만을 위해 진행되어 과거의 역사와 흔적을 등한시해 온 것입니다.

서울대 김시덕 교수께서 ‘서울선언(열린책들,2018)’에서 언급하셨던 ‘일제시대의 근대건축물’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현재 광화문 세종로에서 전혀 수용되지 않은 것은 좀 유감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일제시대 고등교육을 받았던 대한민국 정부 초기 인사들( 상당한 수가 친일경력이 있습니다)이 해방 후에도 일본어로 일본의 전범 후예들과 협상을 하고, 정보를 통제한체 국민들에게’경제성장’만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의 친일적 흔적을 지우듯이 일제가 이 땅에 세워놓았던 수많은 근대건축물을 ‘철거’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19세기부터 서양열강이 차지했던 중구 정동을 제외하고 세종로와 명동 등에 있었던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축물은 그 흔적을 찿을 수 없습니다.

결코 일제 강점기 당시의 건축물들이 전부 보전가치가 있다는 점은 아니지만 정치 중심가인 세종로에 표지석만이 아닌 관공서 건물 몇채는 넘겨두어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인데 과연 전문 학자가 아닌 다음에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100여년도 더 된 옛 문헌과 사진을 보면서 흔적을 찿을지 의문입니다.

역사는 기억에 관한 학문이고 따라서 일제 강점기는 ‘지워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가’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비판적 수용이 ‘추종’이 아니라는 것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역사에 아픈 기억이지만 분명 현재까지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대이고 그 흔적이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직접적으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 그들이 남긴 유산이외 스스로 어떤 물질적 정신적 발전을 이루었는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과연 맹목적 조선추종이나 맹목적 일본/미국 추종이외 다른 정신적 발전이 있었는지 말이죠.

한국의 경제가 아직도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인용된 수많은 문헌들과 지도와 사진자료 출처가 오직 각주로만 표기되어 아쉬웠습니다. 책 말미에 참고문헌목록이 붙어야 제대로 완성된 책으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논픽션이나 역사서 같은 책들의 필수항목(requirement )인데도 누락된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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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출간된 책이니 이미 10년이나 지난 책입니다.
오래전부터 읽으려 했던 책이었는데, 오늘 완독했습니다. 한꺼번에 여러책을 동시에 읽는 독서 습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본문 총 334쪽으로 대중적인 논픽션에 적당한 분량의 책입니다.

디자인적 시각이 반영되어 시각문화에 대한 논의가 큰 줄기를 이룹니다. 특히 인테리어와 사물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어진 이 책은 전반부는 ‘픽션 ‘이라는 제목으로, 후반부는 ‘팩트’라는 형식을 취합니다.

하지만 두 부분은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픽션이 팩트로 보완된 듯한 구성입니다.

이 책이 커버하는 기간은 주로 1962년경부터 시작해서 2000년대 초까지의 기간입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시작해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 그리고 분당과 용인 신도시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이 책이 ‘강남’관련 연구나 ‘아파트’관련 연구에 인용이 많이 되는 책이기는 하나 이 책은 ‘강남’에 대한 책은 아니고 오히려 ‘주거의 현대화’ 담론에서 ‘ 아파트 ‘를 비롯한 ‘현대적 주거양식’이 1960년대 이후 한국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나를 ‘디자인’ 관점에서 고찰한 책입니다.

다른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인테리어 ‘애 관한 정보가 풍부한 것도 그래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1960-1990년대 한국의 중산층 또는 중상층 주부들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공동주거형태인 아파트에서 자신들만의 개성을 살리기 위한 인테리어를 추구했는지 수많은 여성지와 신문기사들을 인용하며 보여줍니다.

표준적 설계로 획일화될 수 밖에 없는 아파트 공간에 각 가정의 개성을 불어넣기 위해 인테리어는 큰 관심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아파트가 도입되기 전인 1960년대만 해도 1930년대 지어졌던 개량한옥에서 주로 살았던 1930년대생 혹은 1940년대 생 주부들은 ‘근대화’로 새로운 생활공간이 된 서양식 단독 주택 그리고 이후에 도입된 아파트에 살면서 난생 처음 입식 생활양식에 적응하며 ‘블록 키친’과 ‘시스템 키친’으로 진화하는 주거양식에 적응하며 새로운 주거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했습니다.

이 책이 비교적 잘 읽혔던 이유는 저 자신이 위에 언급된 1940년대생 주부의 자녀로 자랐기 때문이고 이 책에서 언급하는 집안 사물의 변화를 실제 보고 겪으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부분은 1960년대 후반까지 한국 중상류충 상당히 많은 외제 가전을 비롯한 ‘미제’상품을 소비했었다는 점이고, 1960년대 후반까지도 한국의 경제가 사실상 미국에 예속되어 주한미군 ‘피엑스’가 각종 생활용품과 가전기기의 공급처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해방이후에도 1970년대 초까지도 생산기술이나 디자인 관련 지식이 전혀 없어 일본으로 부터 부품을 조달받아 단순 조립을 하거나 생산이 필요한 금형마저도 수입할 수 밖에 없었던 심각한 기술종속 상태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의 최초 입안이 학병 세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주당 장면 정권에서 입안 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이 계획을 사실상 그대로 가져다가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했기, 이 과정에서도 미국의 대외전략의 큰 틀안에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 현재까지 이루어진 여러 연구를 성과입니다.

한국의 아파트 공급은 위에서 언급한 경제개발계획을 배경으로 그 맥락속에서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군인 출신 위정자는 속도전식으로 주거개선을 이루기 위해 공동주택인 아파트를 도입하고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해 부동산 소득을 인정해 주는 방식으로 아파트 당첨자들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런 정책의 틀은 주공이 주도하던 공공주도 방식에서 민관합동 또는 민간주도 방식으로 주체의 변화만 있을 뿐 현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방식입니다.

초기 아파트 입주자들이 ‘겉치레’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지금 생각하면 읏픕니다. 전통적인 습속에서 벗어나 좀더 모던한 생활을 하고 싶었던 1960-70년대의 주부들은 획일적으로 설계된 공동주거공간인 아파트에 자신들만의 개성을 보이기 위해 인테리어에 공을 들였고, 경제적으로 먹넉했던 중상류충은 이를 위해 비싼 외제 가구를 구입하고 외제가전제품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주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다양한 형태의 주택이 지어졌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 획일적 공간의 생산으로 고민하게 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책의 제목도 이 책의 주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의미는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유토피아’ 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아파트에 ‘모던함 ‘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외제 가구와 가전으로 둘러싸인 ‘연출된’ 유토피아 말이죠.

과연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모던함을 추구하기 위해 그 전까지 살아왔던 습속을 버리는 것이 과연 맞는 선택일지 말이죠.

이미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20여년 이상을 살아온 저로서는 이미 제 의사와 상관없이 이 삶이 저의 삶이지만 부모세대가 과연 급하게 모든 생활방식을 ‘모던’하게 바꾸는 길만이 최선이었는지는 곱씹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의미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1960년대가 후대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는 가장 가깝게 현재의 우리를 만든 모든 기반이 이루어진 시기로 단순히 인프라와 생활 환경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시작된 시기로 생각됩니다.

이전에 소개해 드린 ‘대한민국의 설계자들(2017)’ 과 ‘ 1960년을 묻다 (2012)’가 이 시기를 일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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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019년 나온 논문집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 거류의 중심지이자 당시 경성의 경제 정치 중심지였던 명동일대에 대한 학제적 연구서입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 정도의 글모음이고, 한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공부한 외국인 저자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논문들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솔직히 큰 의미를 찿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미주와 참고문헌이 잘 정리되어 도움이 됩니다.

한국의 논픽션 출판의 가장 큰 단점이 주석과 참고문헌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는 관행이 있는 것이고, 독자들은 저자들의 집필의도와 진정성에 오해를 살 여지가 있습니다.

흔히 대중적 저서라는 미명하에 각주와 참고문헌을 생략하는데 이는 독자를 무시하는 무례한 처사입니다.

아직도 독자가 계몽의 대상이고 저자는 지식인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울 뿐입니다.

각설하고, 8명위 저자가 총 7편의 각기 다른 글을 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글은 ‘명동의 역사성’을 다룬 첫 세편의 글입니다.

그 제목을 일별하면,

1. 명동, 신문화 수용과 발신의 장소

2. 복합영화상영관 메이지좌의 사회사

3. 걸 (Girl) 들의 시대

입니다.

첫번째 논문은 명동에 대한 전반적 개요에 해당하는 글로서명동이 일제 강점기 이후 새로운 소비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미스코시, 미나카이, 히라타 백화점 등 일본계 백화점이 들어서 경성에 첨단 소비문화를 이끌어 오게 된 당시의 상황에 대한 부분과 일제강점기 이후 1960년대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던 명동의 다방과 카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은 세번째 논문의 ‘모던 걸’에 관한 글과 서로 연결됩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젊은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백화점 여점원’에 관한 글로 , ‘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이상 ‘의 학력을 요구하던 백화점 여점원이 아무나 될 수 없었던 세태를 고찰합니다. 글애 나온 당시 통계에는 ‘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이상 ‘되는 여성이 1930년 당시 4천 5백여명에 불과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던 걸’이 되는 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두번째 논문은 현재도 명동에서 극장으로 기능하는 ‘명동예술극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한국 전쟁직후 이 극장이 ‘국립극장 ‘으로 사용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극장이 일제 강점기 당시 ‘메이지좌 (明治座 )’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이 글에서 처음 안 사실입니다.

종로의 단성사 등 조선인 전용 극장에서는 외화와 조선영화를 주로 틀었고, 남촌( 충무로와 명동 일대)의 일본인 거주지이서는 주로 일본영화를 틀다가 메이지좌가 설립된 이후 이 뚜렷한 영화상영 기준이 혼재되어가는 상황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매이지좌는 일본인 소유의 극장임에도 관객의 상당수가 조선인이었고, 따라서 외화와 조선영화 일본어판이 상영되곤 했다고 합니다.

명동에 대한 단행본은 이외로 찿기 어렵습니다.
명동의 소비문화에 대해 김미선 연구자의 ‘명동아가씨(2012)’가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일독할 예정입니다.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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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콘래드 전문가 ( Conrad Scholar) 인 존 스태프( John Stape)가 2007년 출판한 우크라이나 출신 폴란드계 영국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에 대한 평전입니다.

한국에는 단편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로 알려진 소설가입니다.

그의 문학활동과 삶에 대해 조망한 평전으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에 속합니다.

이글을 쓰기 위해 국내 문학사이트를 찿아 보았는데, 콘래드를 소개하는 부분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일단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꽤 알려진 문학전문 사이트 세계문학 저자 소개인데도 잘못 소개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사를 잠시만 살펴봐도 알 수 있은 역사적 사실을 잘못 소개해 안타깝습니다.


우선 그의 출신을 ‘폴란드 ‘라고 단정하는 건 사실 왜곡의 우려가 있습니다. 콘래드 출생 당시 폴란드라는 독립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중반 동유럽은 러시아 제국( Russian Empire)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 Austria-Habsburg Empire)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지역은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출생지는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프 (Berdychiv,Ukraine)라고 브리태니커 온라인 판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의 백성 (subject)로서 단지 폴란드 민족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그가 폴란드 출신 문학가라고 소개하는 건 명백히 한국 학계가 나이브 (naive)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콘래드는 영국에서 선원생홯을 하고 선원 자격을 모두 영국에서 취득한 해양전문가이자 영국인임에도 그의 출신지 때문에 생전에도 폴란드계 유대인 ( Polish Jew) 또는 러시아계 유대인 ( Russian Jew)로 오해를 받았습니다만 그가 유대인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국은 서유럽의 신교국가로 성공회가 16세기 헨리 8세이후 로만 카톨릭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런 영국에서 러시아 제국 출신이자 로만 카톨릭의 세례를 받은 콘래드는 종교적으로도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1924년 그의 장례식은 아이러하게도 영국 성공회 주교좌 성당이 있는 캔터베리 지역에서 카톨릭 장례미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콘래드의 영국출신 부인과 유족들이 카톨릭 전례에 따라 미사를 행한 것입니다.

평전에서 그의 출신 배경을 두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슬라브 적 특성과 그의 특이한 영어발음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등 영어권에서 흔히 나타나는 동유럽과 러시아를 후진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평생을 영국을 조국으로 살았고 영어로 문학작품을 집필한 작가임에도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산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프에서 1857년 태어난 조지프 콘래드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랍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유아기때부터 배운 프랑스어를 평생 잊지 않고 영국에 정착하기 전까지 프랑스 마르세이유(Marseille)로 보내져 프랑스 상선을 타고 선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는 그가 평생 동경하던 대상으로 그의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은 그가 선원생활을 할 때나 이후 전업작가로 생활할 때 프랑스 문인들과의 교류는 물론 영국 상류사회와의 교류에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에게 모국어인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고 그가 평생 사용한 언어는 프랑스어와 영어였습니다.

콘래드는 프랑스 작가 중 앙드레 지드와 특별한 관계를 가졌고, 지드는 콘래드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네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콘래드의 생활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출판 에이전트와 늘 써야할 작품의 마감으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마감을 거의 지킨 적이 없을만큼 집필이 더딘 인물이었습니다. 이건 그와 아내의 지병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통풍 (gout)과 기관지염( bronchitis) 등이 재발하면 병원이나 휴양지에서 요양울 해야했고, 치료비와 요양비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집필도 재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런던으로 나와 고급호텔에 투숙하며 아내나 자신의 병을 치료하거나 프랑스나 스위스의 온천휴양지에 가서 요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출판 에이전트로부터 돈을 빌려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더해 그는 그 주위에 모이는 유럽과 미국의 문학가, 극작가, 저널리스트들과 끊임없이 만찬을 즐겼습니다.

이 평전에서 그의 이런 생활방식을 ‘’사치스럽다(extravagant)’로 표현 했습니다. 이름이 난 작가이고 상당한 수입이 있었지만 언제나 빚에 허덕이고, 돈을 위해 글을 쓰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두번째,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와 영국상선을 탔던 그의 이력은 19세기 후반 항공이 도입되기 전까지 세계화의 첨단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혼 전에 이미 남미는 물론 호주와 뉴질랜드, 타이티, 싱가폴, 말레이지아, 버마 그리고 아프리카 콩고 등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의 이런 이력으로 그의 소설 전반은 영미 문학의 큰 줄기인 해양모험 장르 ( Sea Adventure)에 속하고, 영미권에서 다른 문화권을 ‘이국적(exotic)’으로 바라보는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구체화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 비평가 애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도 그의 ‘문화와 제국주의( Culture and Imperialism)’ 에서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이 책을 통해서 보게된 영미 문학계의 작동방식입니다. 콘래드는 첫소설을 영국 Unwin을 통해 출판했고 1890년대 이후에는 Heinemann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미국에서 그의 책은 Doubleday 를 통해 주로 출판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콘래드는 자신의 출판 에이전트와 출판과 관련된 모든 비즈니스 계약을 관리하며 출판 에이전트와 업무적으로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가며 심지어 빚을 내기도 하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책에 따르면 콘래드가 활동하던 당시가 출판 에이전트가 활성화된 초창기이고 그는 이 새로운 제도를 적극 활용해서 전업작가로 자신의 소설의 판로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이전트를 통해 콘래드는 자신의 소설을 시리즈화 ( serialization) 을 통해 영국과 미국의 문학잡지에 실었는데, 이를 위해 기존의 소설 원고를 개작해 분량을 늘리거나 줄이는 식으로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기존에 출판된 소설이나 단편소설집을 개작하며 새로 서문을 써서 원고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100여년 전 영미권에서 이루어지던 출판 산업과 출판 에이전트의 여러 상황을 엿보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고, 현재도 그들의 비즈니스가 본질적으로 변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콘래드 생애 후반기와 관련된 것으로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The First World War) 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 ( Russian Revolution)의 영향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로 현대 영문학의 초창기 작가에 해당되는 콘래드는 다른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보냈는데 그의 큰 아들 보리스 콘래드 ( Borys Conrad)는 프랑스의 서부전선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보리스는 전장에서 받은 포탄충격(shellshock)로 평생 정신적 충격상태로 살아갑니다. 콘래드의 사치스러운 생활방식은 보리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빚더미에 올랐고 부인과 이혼하는 등 평탄치 못한 삶을 보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가 러시아 제국 출신임에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10대에 우크라이나를 떠난 그는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정착해 사는 동안 단 두번 고향을 방문했을 뿐이고, 두번째는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으로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리던 때 독일 땅에 있던 그와 가족은 이태리를 통해 급히 영국으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평생 고독하게 혼자 일생을 개척해야 했던 그는 평생을 이방인으로 고독과 함께 살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그의 경험이 그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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