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쩰’이라는 생소한 러시아말의 의미는 281쪽 에필로그에서 언급됩니다.
282쪽에 달하는 연구서에서 저자는 1890년대 말 일어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기의 조선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만큼’ 심한 ‘눈보라’의 시기로 표현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전 1894년 갑오경장과 1882년 임오군란까지 있었으니 정말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격동기였습니다.
그래서 ‘미쩰’의 시기라는 표현은 문학적이지만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9년전인 2012년 출판된 이 책은 메이지 일본의 명성황후의 암살과 그로인해 발생한 고종의 러시아대사관 파천(播遷), 즉 임금이 피난하는 일이 발생한 격변기를 다룹니다.
기본적으로 고종시대의 정치사이자 외교사를 다룬 책으로 이전까지 한국학계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러시아의 사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해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했다는 점이 이 연구의 의의라고 생각합니다.
을미사변이 친러파로 알려진 명성황후 민씨를 매이지 일본이 제거한 사건이고 당시 상황을 조선에 주재했던 일본 뿐만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이 주시하고 있었던 정변(政變)이라는 점에서 일본, 한국의 사료뿐만 아니라 각국의 사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데 을미사변을 너무 일본측 자료에 의지해 설명해 온 것이 기존 연구의 한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아관파천은 명성황후가 암살당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정변입니다.
일본정계와 외교가에 충격을 준 이 사건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감소하였습니다. 고종은 유럽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외교 및 군사관계 문서를 보는 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주로 인용된 사료들을 주로 일본 측 사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1990년대 러시아와 수교를 하고 러시아 문서의 접근이 가능한데도 한국에서 러시아 문서 관련 연구가 그리 많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추정합니다:
첫째, 근대사 연구자들이 일본의 영향력을 기본으로 생각해 최우선으로 일본자료를 우선 고려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직접적 영향을 받았으니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선학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둘째, 비록 한러수교를 하고 러시아 문서에 접근이 가능해도 실제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연구자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한국풍토에서 러시아 자료 접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이미 개항기 이래 조선에 러시아어 통역관이 존재했었지만 일제 해방 후 상당 기간 남한에서 러시아 관련 발언 자체가 금기시되어 상당 부분 러시아 관련 연구도 영미권 연구의 번역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와 직접 연관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 대한 연구도 러시아 사료의 직접 이용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합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고종은 전근대적 왕권주의자로서 전통적인 ‘절대왕권’을 추구한 군주로서 비록 조선에 서양의 문물을 도입하고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지만,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구미열강과 러시아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던 인물이지만 절대 근대적 인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관파천이후 왕권강화를 위해 보수적인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의 김병시를 기용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집니다. 당시 친러파로 을미사변 관련자를 체포하며 영향력을 확대해오던 법부대신 이범선은 이후 주미공사로 임명되며 조선정계에서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고종은 이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활동이 자신의 왕권강화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이들을 탄압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이런 행동들은 왕권강화로 정국이 안정될 것으로 믿었지만 결국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어떤 논의도 하지 못한체 정치변화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결과를 맞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성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고종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상반되는 건 그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을 유지하려 애썼는데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절대왕권만을 추구해 상황과 인식이 맞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관파천에 대한 본격적 연구서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청계,2017)’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갑오경장을 ‘갑오왜란’으로 아관파천을 ‘아관망명’으로 재해석한 책입니다.
친일개혁세력들이 일본의 힘을 빌어 근대화를 이루려 한 것으로 알려진 ‘갑오경장’을 16세기 임진왜란에 이은 제2의 임란으로 인식했고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파천을 사실상의 ‘국내망명’으로 인식한 책으로 역사를 보는데 해석과 시각의 중요성을 일깨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연구자 김영수씨는 아관파천관련 저서를 한권 더 출간했는데 본서와 비교해서 어떤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시간이 되면 읽어볼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