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의 도시 모습은 식민지 시기 도시의 경관이 직접적으로 이어내려온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도시계획과 그 개발양상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인천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에서 기획한 이 논문집은 크게 두부분으로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과 조선에서 어떻게 도시가 계획되고 개발되었는지를 고찰한 전반부와 천황제 국가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고 식민지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국가신사를 지은 이유를 추적한 후반부로 나뉘어집니다. 물론 후반부에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어떻게 일제가 기념공간을 조성했는지도 추적합니다.

하지만 주목하는 부분은 4개의 논문입니다.

1. 1920년대 경성의 도시계획과 도시계획운동

2. 식민지 도시 인천의 도시계획과 도시공간의 확장

3. 조선신궁과 식민지 동화주의의 공간정치

4. 인천대신궁의 공간변용과 재인천 일본인


모두 일본보다는 식민지 조선의 공간변화에 관한 글로 특히 첫번째와 세번째 논문은 1910년 한일병합이후 서울의 공간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해방이전 서울의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줍니다.

한일병합이후 일제는 시구개정사업울 추진하는데 특히 경성의 경우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조선의 정치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한성부의 공간을 식민권력애 맞게 재조정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문명적 공간을 만들어 경성이 가진 정통성과 저항성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정권의 전시적 목적 이외에 한강의 수해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용산 일대의 치수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식민당국은 급격한 도시화로 경성에 조선인 빈민뮨제가 삼삭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경성을 식민지 수도로서 개조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식민관료들은 도시빈민문제를 도시의’미관’문제로만 바라보고 ‘복지’의 문제는 간과해 왔습니다. 이 불합리한 전통은 21세기 서울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20세기 초 일제 식민관료들이 빈민들을 도시외곽으로 집단이주시켰듯이 현재 한국의 관료들도 빈민들을 끊임없이 도시 외곽으로 몰아냅니다. 오랜 전통입니다.

이런 연유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전통적 거주지인 북촌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관사를 짓는 방식으로 이 곳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항하여 건설업자 정세권이 북촌에 소형개량한옥을 대량으로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정세권의 개량한옥건설사업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201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궁궐등 공유지에 관사를 짓고 총독부와 같은 공공건축물울 지으며 북촌을 침탈해 온 일제를 당시 건축업자인 정세권 선생이 어떻게 이들의 공간침탈을 막았는지 보여줍니다. 익선동과 북촌의 개량한옥촌의 숨은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식민관료들은 1920년대 내내 ‘대경성’이라는 허황된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탁상공론으로 일관했으며, 도시계획운동에 따라 도시계획의 법제화의 계기는 마련했으나 실제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고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해 식민지 동화정책을 본격화할 뿐 조선의 도시빈민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1920년대 실현되지 못했던 경성도시계획은 1934년 <경성시가지계획령>과 1936년 <대경성계획>으로 그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일제가 경성도시계획을 세우면서 도입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부의 ‘강남개발사업’에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한국이 일제의 영향을 해방이후에도 받았었다는 실례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일제 만주군 출신 전직 대통령은 본인이 일제 강점기 얻은 지식을 해방후 그대로 적용한 겁니다.

일제는 경성의 남산 아래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었던 충무로와 명동 그리고 남산에 그들만의 공간을 조성합니다.
개항이후 최초의 일본영사관도, 그리고 조선통감부도 남산아래 있었고 일본인들이 건립한 최초의 신사인 경성신사 ( 또는 남산대신궁)도 조선 거류 일본인들이 남산에 지었습니다.

이후 1930년대부터 본격화되는 식민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신사를 남산에 건립하기 시작해 1925년 조선신궁을 완공합니다.

이미 을사늑약이후 최초의 현충원이던 장충단을 파괴하고 신사를 건립한 일본인들은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해 일본색을 강하게 남산에 이식합니다.

일제는 1930년대들어 적극적 황민화정책을 시행해 강제적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창씨개명 등을 단행합니다.

조선신궁이 초기 단순한 통합의 장소로서 기능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해서 집단의례를 통한 대중동원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됩니다.

조선신궁은 1940년대 일제 말기 일상생활에 엄숙주의와 금욕주의를 강요하면서 식민지 전체를 집단적 규율화로 몰아가는 전시체제의 공간적 거점이었습니다.

따라서 해방이후 이 공간들이 그동안 억압받아온 조선인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파괴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국가신사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경성 공간통치, 특히 대표적 관가인 광화문 일대의 공간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한 책이 이순우 작가의’광화문 육조앞길(2012)’입니다. 조선 말기 이후 한양의 육조앞길이 어떻게 일제의 경성부 ‘광화문통’이 되어가는지 특히 북촌지역의 변화를 위주로 상세히 추적한 책입니다.

일제 패망이후 조선을 ‘점령 (occupied)’한 미군정당국은 광화문통의 조선총독부 중앙관가를 사실상 그대로 유지한 체 미국대사관을 이 자리에 건립합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은 일본 땅이었고, 일본이 점령된 상황에선 한국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팩트는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앞으로도 구한말이후 시작된 서울의 공간변화가 현재에 미친 영향을 지속적으로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현재 상황을 알려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도 과거를 추적하기 위한 최근 특히 해방 이후의 자료는 찿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요즘 1980년대 말 1990년대에 발행된 책을 찿아보려 하지만 겨우 30여년 밖에 안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록에 대해 사람들이 무심하다는데 매우 놀랐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겠지만 아무튼 충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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