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3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근대시기를 다룬 역사서입니다.

대중독자를 대상으로 했지만 한국 일본 중국의 사료를 직접 인용한 서술이 돋보입니다.

전체 책의 구성으로 보아 ‘약간 깊이가 있는 동아시아 역사 개설서’ 정도로 보는 것으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의 구성에 대해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책은 총 27장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내용을 포괄하는 책인데도 목차는 물론 원저자 내지 편자들의 서론도 빠져 있습니다. 상당한 내용의 역사서인데도 이런 황당한 역서의 구성체제가 책의 가치를 반감시켰다고 생각합니다 ( 이 의견은 제가 본 책에 한정된 것으로 제가 본 책이 파본이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출판 당시부터인지 아니면 소장 도서관에서 파본이 된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역자후기를 포함하면 400페이지 가량의 책인데 목차와 서문추가가 책의 분량에 부담이 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근세의 동아시아시대, 즉 16-17세기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말 청일전쟁이후의 시기를 다루며, 포괄하는 국가는 조선, 청, 일본을 포함해 러시아, 미국, 류큐, 타이완, 홋가이도까지 포함합니다.


전통적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국중심의 화이론 (華夷論)적 세계관이 대외관계로 나타난 책봉 (冊封)과 조공 ( 朝貢)시스템이 서구세력의 등장으로 서양식 조약관계에 따른 국제관계가 정립되어 가는 이행기를 19세기에 맞이하게 됩니다.

중국은 조선, 일본과는 책봉과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열강들과는 서양식 조약관계를 맺으며 국제법적 환경에 발을 들여놓지만 이원적 국제관계는 상당기간 지속됩니다.

중국의 이런 이원적 국제관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한 이후 완전히 청산되어 이후 중국의 국제관계는 조약 중심으로 바뀝니다.

한국은 전통적인 중국으로의 사대주의가 근대시기 조선의 발목을 잡은 중요 원인이 됩니다.

조선의 사대부와 개항기 지식인들은 조선이 중국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믿었고 이런 전통적 관계이외에 새로 생겨나는 국제법적 조약관계를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주장하며 조선의 ‘자주 독립’을 주장했는데 그 의도는 공식적인 청의 속국 조선에서 청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암묵적으로 알려져왔던 청과 조선의 종속관계는 19세기 말 일본의 대륙진출 야심이 구체화되면서 청이 명시적으로 종속관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에 주재했던 청의 고위관리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결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이전 당시 독립왕국이자 중일 양국에 속해 있던 류큐(琉球)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고 아이누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온 에조치(蝦夷地)를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홋가이도와 쿠릴열도를 일본영토로 사할린을 러시아 영토로 확정시킵니다.

거기에 청일전쟁을 통해 타이완을 할양받아 역시 식민지를 만듭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이전에 이미 류큐, 에조치, 타이완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청과 일본은 19세기 이후 러시아의 동진과 영국의 동아시아 세력 확장 그리고 미국의 북태평양 진출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연해주 지역을 비롯한 극동 지역에 진출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고 만주지역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해서 중국 북부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태평양 연안과 남극 등지에 이미 1840년대에 탐험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1820년대 당시 태평양에서 고래잡이 원양어업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1850년대 미국의 페리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청하는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또 다른 열강인 영국은 이미 식민화된 인도 대륙을 발판 삼아 동북아시아의 거점 지역인 말라카 반도에 진출해 교역로를 장악하고 중국과 아편 무역을 해 큰 이득을 챙겼습니다.

이미 동남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싱가포르 등 거점을 확보한 영국은 청과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섬에 거점을 만들고 중국 동남해안의 상하이, 광저우 등 항구에 조계를 설치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챙깁니다.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근대화와 공업화를 시작한 청나라와 메이지 일본에게 영국과 러시아는 경계해야 할 서구열강이었고 특히 메이지 일본은 청이 아편전쟁에서 지고 체제가 와해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이 두 유럽 제국의 향방에 촉각을 기울입니다.

특히 일본은 러시아를 조선과의 관계에서 특히 경계한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에조치(蝦夷地)에 속하던 사할린 땅을 러시아에게 방기(放棄)한 점이라든지, 조선의 명성황후가 친러정책을 펴서 일본의 영향력을 없애려 할 때 그녀를 살해한 점이라든지, 고종이 을미사변(乙未事變)이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을 하자 일본 조야가 충격에 빠지는 등 러시아를 극도로 경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청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제거하고 이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제거하면서 최종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합니다).

조선이 20세기 초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원인은 결국 사상적인 측면에서 조선의 ‘소중화(小中華)’사상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서인세력은 조선 중기에도 맹목적 대명 사대주의 (大明 事大主義)를 고수하고 당시 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이후 19세기 내내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안동김씨, 풍양조씨 가문으로 대표되는 왕의 외척 세력들은 조선후기 서인의 일파인 노론(老論) 벽파(僻派)를 대표하던 세력으로서 이들은 조선후기 국가 통치 시스템을 붕괴시켰습니다. 그리고 세계정세에 몹시 둔감했습니다.

정조 당시 이미 천주교 포교가 시작되었고 연행사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조선은 청과의 책봉관계에 얽매어 국제정세를 배우는데 소홀히 하고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청이 19세기 말에 조선이 청의’조공국’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은 이미 조선후기부터 조선이 청을 대해왔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격동기에 조선이 국제관계를 대처하는데 결정적 약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구나 청이 서양 제국의 이권침탈과 개방 압력으로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서양과 국제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황제권이 약화되고 지방 번벌세력들이 할거하면서 전통적 통치 체제가 무너져가는 동시에 ‘변법자강 (變法自彊)’ 운동과 같은 근대화 개혁이 시작되고 있을 때 조선은 매우 ‘피동적(被動的)’으로 근대화 개혁에 임하지 않았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도정치와 관련해서 ‘정조사후 63년 (창비,2011)’을 읽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세도정치의 시작부터 종말까 특히 조선후기 ‘성학론’과 ‘성왕론’을 둘러싼 왕과 사대부간 권력투쟁과 보수적 학자군주 정조 사후 그의 개인적 자질에 의해 유지되던 조선의 유교정치가 어떻게 외척에 의해 휘둘리게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구한말 고종시대 명성황후때까지 니어졌던 외척세력들의 정치 장악은 조선후기 마지막 100년과 그 이후 근대시기까지 그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책봉과 조공관계는 중국이 주변국을 고대로부터 어떻게 인식했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딱딱하기는 해도 ‘중국과 주변 (혜안,2009)’이라는 저작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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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2-26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소유하고 있는데, 제 책에는 미타니 히로시 나미키 요리히사 쓰키아시 다쓰히코가 쓴 머리말과 목차가 다 포함되어 있는데, 이상하군요

Dennis Kim 2021-02-26 15:45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빌려 책을 보았는데 서문 부분이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Redman 2021-02-26 16:28   좋아요 0 | URL
아이고 ㅠㅠ 누군가가 책을 훼손했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