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과 변용 -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박태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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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박태균 교수가 쓴 한국경제개발계획의 기원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기 이전 박교수가 한국전쟁에 대해 쓴 ‘한국전쟁(2005)‘를 먼저 읽었습니다만, 리뷰는 이책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이책은 박태균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한 책으로 저자가 Harvard Yenching에 연구원으로 가서 집필한 것으로 미국 현지에서 1950-60년대 대한 정책을 담당하던 인사들의 인터뷰를 수록하기도 한 책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당시라고 기억하는데, 당시는 1980년대 초이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나 ‘새마을 운동‘에 대한 영향이 남아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국정이었던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에 대해 상당한 부분 설명을 해놓았고, 사회 선생님이 중요성을 강조하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배웠던 내용이 한국이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어떻게 이루어냈다에 대한 결과에 대한 것이 전부였고, 이 경제개발계획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박태균 교수의 이 책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경제개발 계획의 시작, 그리고 경제기획원을 비롯한 한국의 경제엘리트들이 어떻게 육성되었는지를 미국의 대한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먼저 이책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한국경제가 미국의 원조물자에 어떻게 의존해왔는지 보여주고, 한국의 미국의존을 어떻게 타파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당시 엘리트들의 담론을 제시합니다.
민간기업이 자본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입장과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두 입장으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초기 한국의 경제엘리트들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에 미국으로의 출장과 유학, 연수를 통해 미국의 경제전문가들과 접촉하고 배우면서 향후 한국의 경제계획을 입안해 실행하는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1950년대까지 ‘현상유지정책‘을 기본적인 대한정책으로 채택했던 미국은 1960년대 들어 한국을 ‘근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합니다.

1950년대까지 지속된 미국의 현상유지정책로 인해 한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영향력과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했고, 이들은 이후 친미 수구 반공세력으로 한국의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미국은 1945년 한국의 해방과 일본의 패전이후부터 줄곧 대륙세력(중국 및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을 봉쇄하는 정책 (봉쇄정책, containment)을 유지해 왔고, 이 봉쇄정책을 유지하면서 달라진 한국의 경제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현상유지에서 ‘근대화‘로 정책을 바꿉니다.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알리기 위해 ‘경제적 우월함‘을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한국에 대한 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 관료들이 이 계획을 집행할 실무진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1960년대 미국의 영향력있는 안보전략가이자 당시 MIT교수였던 로스토우(Rostow, W. W.)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보다 더 강력한 경제원조를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경제원조의 일원으로 미국은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며, 특히 그는 저개발국의 군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1960-70년대 박정희라는 군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경제개발을 추진한 데에는 이와 같은 미국의 정책변화라는 외부적 환경이 한몫을 하게 됩니다.

1960년대 초 한국이 한국전쟁의 피해복구가 어느정도 끝났다고 생각한 미국은 대한원조를 줄이고 한국의 성장우선정책을 지원합니다.

경제개발계획 초기 경제관료들과 엘리트들은 균형성장을 기조로 경제계획을 수립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불균형 성장을 기조로 채택할 것인지 논쟁을 벌입니다.

또한 이책은 한국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이 사실 군사정부의 작품이 아니라 미국의 대한정책의 일환이었음을 밝힙니다.

산업발전의 공을 박정희 대통령의 공으로 돌리는 일반의 인식과는 다르게 역사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한 분석에서는 이 모든 것이 미국의 영향과 일정부분 관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물론 미국의 지원과 그들의 조언이 모두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 그들의 영향력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에 일정부분 작용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경제정책이 어떻게 입안되고 실행되었는가를 따져본 책이기는 하지만 결국 이들이 왜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당시 관여한 인물들의 생각을 따라간 책이며, 경제정책이 단순히 국내정치적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 책입니다.

논문을 보완한 책이라 내용이 결코 쉽지 않고 또한 어느정도 경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쉽게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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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지음 / 창비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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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수구 반공주의 주류 세력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고, 또 믿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 한국을 우방으로 ‘특별하게 ‘ 생각해서 ‘순수하게‘도와주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왔다는 점입니다.

애석하게도 이들의 이런 맹신(盲信)에 가까운 믿음은 사실이 아닙니다.

미국은 한반도의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당시 적국이었던 북한과 휴전 협정을 맺은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소위 ‘보수‘정치 세력들,특히 요새 몽리의 끝을 보여주는 자유한국당이나 조선일보 같은 매체들이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역사적 사실 중의 하나가 한국이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은 북한과 미국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전쟁의 직접당사자가 북한과 한국임에도 미국이 북한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는 말은 이 전쟁이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이 미국의 전략에 종속적으로 끌려갔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60년도 전의 일이라고 무시하기엔 이 국제 조약이 한국의 외교 대북문제를 다루는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당장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추진하려하고 또 선호합니다.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닌 한국은 북한과의 별도의 대화채널을 구축하지 않는 한 미국과 북한의 직접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미국이 이렇게 북한과 직접대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을 통해 북한에 접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구나 한반도가 분단 상태에 있는 동안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대륙세력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할 수있는 봉쇄정책(containment)를 유지할 수 있고 이것이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국을 중간 완충지대로 중국과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을 피할 수 있고, 한국이 미국의 군사무기까지 대량구매하니 미국 군수업계에게 한국은 그야말로 ‘봉‘인 것이죠.  

육사(陸士)로 대표되는 한국의 군사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이 두려워 국민을 상대로 공포 마케팅을 펼치면서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군사력 증강만을 도모합니다. 이를 위해 아무런 대책없이 북한을 자극하는 강경 대결적 발언을 내놓기 일수입니다.
이들은 별다른 설명없이, ‘너희들이 전쟁을 겪어봤어?‘라는 60년 묵은 레퍼토리를 가감없이 앵무새처럼 내뱉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사들인 무기체계를 들여오면서 군수업체의 리베이트를 받아 챙기는 군납비리를 저질러 왔습니다.  무기 체계 도입과 관련해 숫한 장성들이 뇌물죄로 처벌을 받았죠.


이제까지 한국 국방부의 군납 비리 역사를 볼 때 미국에게 한국은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우방국가‘ 였습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사드 배치 문제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국의 수구 반공주의 정권인 박근혜 정부는 미국의 속을 먼저 긁어줍니다. 미국이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 조심스러워 하던 한반도 사드 배치를 더 빨리 앞당기자고 먼저 제안합니다. 제안 당시 임기가 1년여 정도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그냥 밀어 부칩니다. 그로 인해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압박을 받습니다. 중국의 롯데마트가 임시 휴업을 하게되고 중국의 여행사들은 한국으로 여행객을 보내지 않았으며 중국 고위층들도 이번 문대통령의 특사 방문 시 사드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압박했습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도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합니다. 거기가 이 문제를 푸는데 중국은 미국과 직접 접촉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한국이 낙동강 오리알처럼 우스운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당 정우택 대표는 마치 사드배치에 반대하면 국가안보를 무시하는 사람인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언론은 그의 말을 충실히 받아 적습니다.

사드배치가 곧 한국의 안보가 아닐터인데, 언제부터 이런 논리의 비약이 횡횡했는지 알수 없습니다.  

중국과 미국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실리는 도외시 한 체 사드 배치를 지렛대로 맹목적인 친미만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미국이 한국을 얼마나‘다루기 쉬운 나라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맹목적 친미만 존재하죠. 종교처럼 말입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면 미국이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는지 객관적으로 깊이 탐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맹목적 친미는 답이 아닙니다. 바보처럼 미국이 사달라는 무기 다 사주고 미군 부대 부지 제공하면서 한국이 비용 다 대주면 한국이 더 우스운 나라가 될 것임을 분명합니다.

미국에 대해 좀 더 냉정한 입장을 가지고 우리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미국과 다른입장을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너무 색안경을 끼고 불온하게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미간의 동맹관계만큼 미국에 한국이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절차적 정당성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꼼수로 일관된 사드배치에 대한 언론보도를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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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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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정희는 한국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인입니다.
한국전쟁이후 전쟁의 잿더미에서 산업화를 진행시켜 한국인들을' 먹고 살수 있게 해주었다'라는 인식이 특히 현재 60-80대 노년 세대에게는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국을 산업화하기 위해 택했던 '압축성장 전략'이라든지, '(농업을 포기하고 공업에 집중하는) 불균형 개발 전략', 그리고 압축성장을 위해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했었던 사실에 대해서는 성찰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죠.

더구나 박정희식 근대화, 선진화의 폐해는 그의 딸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어서 추진한 여러 정책에서 시대와의 불화를 보이고, 결국은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맞게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아버지 나라답게 만들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은 우파 예술가들의 실력은 생각안하고, 정부가 지나치게 좌파 예술가들만을 지원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보기에 이해할 수없는 '좌파'예술가들의 지원을 봉쇄하기 위해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비선인 최순실을 통해 국민들이 자신에게 위임한 권력을 나누었으며, 삼성의 경영승계를 위해 국민의 퇴직금인 국민연금을 통해 삼성의 승계작업을 도왔습니다.

대한민국이 국민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만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없는 통치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 모든 사항들이 사실로서 확정되지 않았고, 현재 형사재판이 진행중입니다만, 언론을 통해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이 이정도입니다.
이런 박근혜 대통령의 무소불위의 박정희식 통치방법에 대해 보수적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을 '탄핵'하는 역사적 결정을 하기에 이릅니다.

17년 전에 발표된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에 대한 책이 2017년 현재 다시 울림을 주는 이유는 2016년 10월부터 이루어진 한국의 정치격변의 이면을 이 책이 잘 성명해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책의 제목인 반동적 근대주의라는 말은 reactional modernism이라는 영어의 번역입니다. 즉 서구의 근대화에 반응하는 근대화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서구식 근대화의 모델만을 가져와 기술적 근대화 , 양적 근대화에 치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한국의 경제정책은 언제나 '경제성장율'이라는 경제지표를 우선시 하고 국민 총생산(GNP)이라는 수치를 내세우며 이를 얼마나 '양적'으로 달성하였는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경제관료들의 정책 브리핑이나 경제뉴스에 단골로 나오는 모습입니다. 달라진 것은 국민총생산에서 국내총생산(GDP)로 지표가 바뀐 것 뿐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런 통계수치에의 집착은 그 통계가 얼마나 정확한 것이냐는 별개로 치더라도, 경제생활의 질적인 면, 그리고 그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일반 국민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정작 경제발전의 이익을 국민전체가 고루 나누어 가지게 해야 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목표이어야 함에도, 통계와 양적성장에만 집착해온 경제성장정책은 소수 기업들에게만 그 이익을 돌려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경제의 주체는 가계,기업, 정부임에도 한국경제는 기형적으로 기업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경영자들의 이익집단인 경총은 언제나 기업하기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영화 '베테랑(2015)'에서 나왔듯이 재벌기업가들은 지난 60년동안 언제나 어렵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심지어 삼저호황을 누렸던 1980년대 말이나 IMF직격탄을 맞았던 1990년대 말이나 언제나 똑같이 말이지요.

1970년대이후 재벌들이 한국의 압축적 경제성장을 위한 견인차를 했다면 이제는 별다른 혁신없이 서민들의 몫마저 빼앗고 있습니다.

대기업 마트는 골목상권을 휩쓸어 동네 수퍼를 초토화 시켰고, 대기업 식품기업들은 심지어 서민들의 먹거리인 순대, 떡볶이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한 재벌 3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해외 브랜드 도입이지요. 엄청난 로열티를 외국기업에 지불하면서 해외 유명브랜드를 들여오기만 합니다. 브랜드 개발은 물론 하지 않고요.

국민들이 이번에 민주당 문재인 대통령을 뽑아준 이유는 재벌체제로 대표되는 박정희식 산업체계를 손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때부터 수구 반공주의자들은 '낙수효과이론(trickle down effect)'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 이야기합니다만, 이미 경제적으로 별 의미없는 이론이라는데 경제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이들이 이 말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이론이 그들의 대기업 지원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죠.

문대통령이 경총을 향해 '한국사회의 양극화에 책임이 있는 분들'이라는 쓴소리를 한 것은 따라서 반성없는 경제계를 향한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잘해서 기업을 꾸려온 줄 알지만, 이들은 태생부터 국가의 지원을 받은 집단이었습니다. 지금의 현대와 삼성그룹은 박정희정권의 지원 없이는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들이 기업경영의 자유를 주장하며 국가의 견제를 달가와하지 않지만, 초기 이들은 국가의 자본의 지원으로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가지만 더 말하고 이글을 줄이려 합니다.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본 박정희의 양적 근대화는 이제 그 시효를 다했습니다.
재벌의 역할도 이제 그 의미를 잃었습니다. 재벌은 여전히 한국경제의 강자입니다만, 그들의 역할 재조정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제는 양적인 성장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질적 성장에 몰두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도 이익을 돌려받지 못한다면 누가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제는 예전처럼 소수의 엘리트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회가 아닙니다. 이들은 여전히 선도의식을 가지고 오만하게 굴겠지만 결국 집단지성의 논리에 일정부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아직도 제대로된 의미의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몰상식'과 '비상식'이 이를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과연 어떻게 경제정책을 펼칠치 지켜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들이 제대로된 '질적' 경제발전을 이루고 그 공과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돌려줄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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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누들로드 - 국수따라 방방곡곡
김미영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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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요리를 엄청 좋아하는 제가 쉬어가듯 읽었던 책입니다. 특히 냉면을 좋아하는데 을지면옥 냉면을 제일 좋아합니다.

원래 이 작은 책자를 산 이유도 사실 이 책에서 소개한 국숫집을 방문해 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 안동여행 갔을 때 건진국수집에 전화한 적이 있었지만 너무 멀어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냉면을 좋아하는 저는 이책에서 소개한 냉면집을 다 방문해 보았습니다.

을밀대는 제가 살던 동네여서 자주 갔었고 충무로의 필동면옥도 친척집이 근처에 있어서 자주 갔었습니다. 가족들과 여름이 되면 우래옥과 을지면옥애서 냉면을 많이 먹었죠.

봉피양 냉면이 사실 제 입맛에는 제일 안맞더군요.

그외 추천하고 싶은 냉면집은 평래옥입니다. 명동에 갈 때 자주 가는데 어르신들과 주변 직장인들로 점심에 가면 늘 기다려야 합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오장동 흥남집도 제가 아주 좋아하는 함흥냉면집입니다. 이곳에서 함흥냉면을 먹은 이후 다른 곳의 함흥냉면은 잘 안먹습니다. 세월의 내공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더군요.

태평로 삼성빌딩 근처에 위치한 진주회관은 사회생활을 하던 초창기 자주 갔던 곳입니다. 콩국수로 아주 유명한 곳이죠. 여름이면 주변 직장인들로 북새통입니다. 이 집은 여의도애서도 콩국수와 비빔국수를 파는데 두 집의 맛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근래에는 여의도의 진주회관에 자주 갔었네요. 

개인적으로 맛보고 싶은 국수는 부산밀면과 제주도 고기국수입니다. 제주도는 아직 못가봤고 부산은 몇번 가 보았지만 밀면을 먹을 기회가 없었네요.

오늘은 이 책에서 소개한 국숫집 중 제가 직접 가본 곳을 위주로 말씀 드렸습니다. 가이드 성격의 책이니만큼 이 책이 얼마나 유용한 지는 결국 소개한 곳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정확하냐‘ 에 달린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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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론이 파헤친 한국의 지식인 집단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왜 시장, 자본 그리고 서구편향적 일 수 밖에 없는지, 특히 서구 중에서도 왜 유독 더 친미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경향신문의 기자들과 외부 필자들이 같이 집필했습니다.

외부집필자들 중에는 이번에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된 김상조 교수님도 있습니다.

지식인들이 왜 지식인들이 재벌 앞에서 ‘자기 검열 ‘을 하게되는지에 대한 글을 쓰셨더군요. 지식인들이 논문을 출판하면서 기업들이 스폰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기업의 이익에 반하게 되는 결론을 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풍토는 공공의 자산이어야 할 지식이 스폰서인 기업의 이익만을 대변하면서 공공성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얼마전 인터넷 매체에서 읽은 단국대 서민 교수의 인터뷰에서의 그의 발언 내용이 생각나네요.

기자가 마지막으로 한 지식인에 대한 견해에 대해 그는 ‘지식인은 다른 이들이 No라고 말해도 혼자 꿋꿋이 Yes라고 말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자식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앞서 나가는 선구자로서 ‘등불‘의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책이 출간된 시기는 2008년으로 이명박 정부 초기입니다. 한국사회의 본격적인 퇴행이 시작되었던 시기로 사회 전반에서 새로 들어선 보수정권의 이해 못할 4대강 사업수행과 ‘싸다‘는 이유만으로 품질과 위생상태를 알 수없는, 심지어 사람이 먹어도 괜찮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개방 합니다.

권력자의 불통과 오만 그리고 일방통행이 지속되는데도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권력의 입맛에 맞는 이론을 제공했습니다.

지금도 지탄받고 있는 많은 토목학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지지했습니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궤변으로 덮어버리고 말았죠.
결과는 강물 생태계의 변화와 ‘녹조라테‘로 대변되는 강물의 부영양화입니다.

이런상황을 지켜보게 되니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더군요.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이 책이 한국에서는 희귀하기까지 한 ‘‘지식 사회학‘ 책이라는 점입니다.
더구나 한국의 지식인을 탐구한 책은 극히 접하기 어렵습니다. 이 역시도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식인과 관련해 근래 읽고 싶은 책이 한권 출간되었습니다.
지식인과 미국과의 관계를 조명한 책입니다.

서점에서 보았지만 기회가 되면 한번 읽고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한국은 이상할 정도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친미‘적인 성향이 있고 자신의 사회에 맞는 독자이론을 발전시키기보다 끊임없이 서구 특히 미국의 이론을 수입해왔습이다.

따라서 미국과 지식인의 관계가 과연 어떤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자기성찰로서 의미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려고 합니다. 지식이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설명하거나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도 단순히 지식의 흡수에민 그친다면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우리가 사는 현재와 연결해봐야 하고 그 책애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를 고려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간‘을 읽는다는 의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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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6-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들이 한국땅에서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토론과 논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어떤 분야든 토론과 논쟁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오히려 토론·논쟁을 금기시하죠. 한국인들은 논쟁꾼들을 백안시합니다. 미운털, 눈엣가시, 말썽꾼, 피곤한 불편러, 민폐꾼, 잘난척쟁이, 화기애애한 친목 모임의 안녕을 해치는 듣보잡스런 놈 따위 등등으로 낙인을 찍죠. 그러니 무슨 토론이 있고 무슨 논쟁이 있겠나요. 발전의 전제 조건이 토론과 논쟁인데요. 한국 지식계는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습니다. 게으르기는 또 왜 그렇게 게으릅니까. 알라딘 새로나온책 코너를 검색해보면 일본인+중국인 책이 한국인 책보다 더 많이 번역·출간되고 있을 정도입니다(약간 과장이지만). 지식인들이 연구 안 하고 책 안 쓰고 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문학 위기라고 호들갑 떤 것은 걍 밥그릇 타령한 것이지요. 자기들이 논문 안 쓰고 책 안 쓰고 토론·논쟁 외면해서 위기가 온 것이지 누구 탓인가요. 입으로만 위기위기 떠벌리기만 했지 한 게 뭐 있나요? 여하튼 토론·논쟁 활성화하면 지식인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인문학 위기니 뭐니 하는 것도 사라지리라 봅니다. 쌈박질(토론·논쟁)처럼 재미난 게 없다고 봅니다. 대중들, 독자들의 관심도 끌고, 덩달아 관련 책들도 불티날 것이고, 출판계도 경기 살고, 이렇게 맞물리고 선순환돼서 전반적인 발전을 가져오리라 봅니다. 근데 논쟁거리가 뭐가 있을까요? 요즘 인공지능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데, 예컨대 강인공지능 실현 가능론자들과 볼가능론자들, 이렇게 편을 갈라 논쟁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울나라 학자들은 뭔 놈의 사업에 골몰하는지 조용합니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세상 눈치 안 보고 깊디 깊은 연구실에서 아주 심층적인 탐구에 매진하고 있을 몇몇 학자 또한 있겠습니다만...

[처음 댓글 올린 시각 : 2017-06-09 15:12]

Dennis Kim 2017-06-0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리 깊은 순혈주의와 군대의 서열문화가 지식사회 전반에 만연해 자신과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주지 못해서 논쟁과 토론이 활성화되지 않은 것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님에도 유독 그런 것들을 못참는 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qualia 2017-06-09 19:48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순혈주의와 서열문화는 토론과 논쟁을 활성화함으로써 깨뜨려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토론과 논쟁 때 자기 오류가 드러나고 허점·약점이 까밝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어차피 누구나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고 허점과 약점, 심지어 지독한 모순으로 뭉쳐진 존재라고 봅니다. 이런 사실은 자각한다면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에 남으로부터 비판받거나 문제점을 지적당할 때 감정적 흥분을 조절할 수 있지요.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건 은연중 자신이 완벽하다고 잘못 믿는 빗나간 자존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서 토론과 논쟁을 하자면 쌍방간에 약간의 감정적 부딪힘(부딪침)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습니다. 해서 이런 소소한 감정적 충돌은 우리가 넉넉하게 받아넘길 줄 아는 여유로움과 포용성 또한 지닐 필요가 있다고 봐요. 이런 좌충우돌의 과정을 거쳐야만 발전한다고 봅니다. 지식인이라고 해서 항상 고고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위치에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모든 점에서 부족한 자신을 자각하고 지적 연습과 성찰로 그 부족함을 조금씩 극복해나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지식인의 존재론적 지위이고 운명이라고 할 수 있죠. 해서 지식인은 끝없이 자신과의, 남과의, 외부 세계와의 토론과 논쟁으로써만 자신의 형상을 다듬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토론과 논쟁 없는 지식인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