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부님은 사진가
장긍선 옮김 / 눈빛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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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사두었던 사진집 한권을 보았습니다.

한국천주교 평양교구에서 2017년 펴낸 기록사진집으로 1920-1940년대 평안도와 함경도의 풍경과 사람들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천주교 및 기독교 전래의 역사는 조선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만큼 꽤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학자로 알려진 조선후기 남인의 천재 중 한사람인 정약용도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천주교에 접했고, 그의 가족 중 순교한 이들도 여럿 있습니다.

평안도 지역은 지리적 위치로 볼때 조선의 사신이 청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고, 다른 지역과 달리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지역입니다.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자산가들이 많았던 이 지역은 천주교/기독교 등 외래종교를 받아들이는데도 열심이었고, 교육열도 높았습니다.

이런 탓에 조선의 기득권 층인 기호지방의 서인 노론층과 불화가 잦던 곳입니다. 기호지방 양반들은 같은 양반인데도 평안도 출신을 홀대했고, 평안도 출신은 문과입직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완고하기 그지없는 조선성리학과 이를 신주단지 모시듯한 기호지방 노론의 편협함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남다른 배경을 가진 평안도에 미국의 천주교(카톨릭) 선교회인 메리놀회가 일제초기부터 평안도 여러 대도시, 이를테면 평양이나 진남포, 위주 그리고 신의주 등에 천주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시작합니다.

이글은 1940년대 한국을 철수하기 전까지 평안도를 중심으로 선교를 했고, 이 책의 사진들은 그 당시의 기록입니다.

공산주의가 없던 시절의 평안도를 보여주고 있고, 거의 저의 조부모님 대에 해당되는 분들의 기록입니다.

지금은 이해자체가 되지 않지만 실제 1920-40년대에 평양에 천주교회가 있어 미사를 드리고 첫영성체를 받고 소풍을 가고, 농사를 짓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거의 모두 흰색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과 앳된 소녀들이 너무나 당연한 듯 동생으로 보이는 아기를 들쳐 업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금단의 강처럼 느껴지는 압록강으로 수녀님들이 나룻배를 타고 오는 모습이라든지, 평양에 미국 선교회가 세운 신학교가 있다든지 하는 모습은 지금 사진으로 보기전에는 믿기지가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온 의주 풍경은 저에게 매우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이 의주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진 중 일부는 아버지께서 한국전쟁 이전 북한에 사실 때 찍힌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그렇습니다.

저도 오래 묵혀두었다 이 사진집을 보았는데 이 사진집을 서점에서 과연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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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 쇠락하는 산업도시와 한국 경제에 켜진 경고등
양승훈 지음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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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 사회학과 양승훈 교수의 신간입니다.

전통적이지만 마치 플랫폼과 디지털경제에 밀려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잘못 알려진 제조업 (製造業,manufacturing)과 그 제조업의 역사가 거의 100여년이 된 산업도시 울산(蔚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한 연구서입니다.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제조업 강국으롯 GDP에서 한국과 비슷하게 제조업 비중을 보이는 나라는 독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심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어서인지, 금융이나 IT기업들만큼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가 지나친 경제의 금융화(Financialization)에 따른 결과이고 코로나 19이후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을 재편하며 해외에 있는 공장들을 특히 전략적인 반도체 공장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reshoring)을 시작한 것만 봐도 경제의 근간이 제조업인건 분명합니다.

책이 나온 때가 2024년 3월이니 출간된지 2달밖에 안된 책으로 본문만 411쪽입니다.

저자가 분석한 울산의 현재의 문제점은 10장에 잘 정리되어 있고 다음과 같습니다.

1. 적대적 노사관계
2.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원청 정규직 -하청 비정규직)
3. 산업가부장제 (남성만 생산직에 고용하는 관행- 남성 가장이 가정을 부양하는 경제체제)

위의 사항과 함께 울산을 대표하는 3대 산업(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에 속한 대기업 생산직 위주로 체제가 공고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울산에 일제때 개발되다 해방과 함께 멈춰진 정유공장을 완성해서 시작된 산업도시 울산은 이후 현대의 대대적인 투자로 조선소와 자동차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의 원형을 갖추었습니다.

조선소와 자동차공장에는 초기에 돈을 벌기 위해 울산으로 올라온 젊은이들이 짧은 기술훈련을 마치고 정규직 생산직으로 고용되었고, 공대를 나온 엔지니어들도 생산기술과 공정기술 적용을 위해 현장의 생산직 기술자들과 협업을 이루어 나름의 생산관리 노하우와 기술숙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대략 1970-1990년대까지 입니다. 해외 경쟁사의 완제품을 분해해 원리를 파악해 기술을 익히는 reverse engineering 을 통해 기술을 익혔는데 이 당시만 해도 한국은 후발개도국으로 선진국을 추격(follower)하는 실정이었습니다.

하지만 1998년 IMF국제금융위기 이후 현대자동차의 경우 처음 해고를 경험하면서 사측을 불신하기 시작하여 그 이후로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은 이후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것이 노조활동의 중심이 됩니다.

1987년 이전 배운것 없고 가진 것 없던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인격적 모독을 당하고 부당한 처우를 받다 이후 1987년 6월 대항쟁이후 임금이 급격히 오르고 처우가 개선되기 시작합니다.

해고가 트라우마로 남은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은 이후 사측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 전과 같이 회사와 협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노력울 하지 않게되고 기술 숙련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기술자가 생산현장에서 경험으로 축적하는 노하우인 숙련도에 무관심하게 되면 노동자 본인에게도 좋지 않지만 갑작스런 해고의 트라우마가 더 컸던 겁니다.

이렇게 적대적 노사관계는 1998년 대대적인 해고를 통해 형성되고 회사는 이후 더이상 정규직 생산직을 신규로 뽑지 않고 부족한 인력은 사내하청 비정규직과 모듈화를 통한 생산공정을 통해 원가를 하청기업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이렇게 노동시장이 원청 정규직과 하청 비정규직으로 나뉘면서 회사는 더이상 전투적인 생산직 노조와 갈등하지 않게되고 생산직 노조는 비정규직들이 자신들 대신 해고되는 상황을 용인하게 되면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고착됩니다.

이전에 경험이 풍부한 생산직 노동자의 숙련도에 기대어 향상된 공정기술과 품질은 이후 자동화공정으로 대체되게 됩니다. 서로 상생을 논의하기보다 경영진은 사실상 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들어주면서 공장을 자동화해 노동자를 장기적으로 배제하기로 한 것입니다.

적대적 노사관계는 사실 울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특히 보수층의 문제입니다. 특히 보수정치인들 중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대화상대로 상대하지 않는 ‘오만’을 보여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잘난 자신은 후한 대접을 받아야 하고 못배운 노동자들은 자신보다 대접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애서 허우적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산업가부장제는 울산에서 발견되는 고용관행으로 지난 50여년 동안 울산의 대공장 생산직은 남성이고 정규직으로 고용되어와서 사실상 여성들에게는 고용 자체가 봉쇄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처음 울산에 들어온 청년들이 못배운 체 공장에 들어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남성 가당 혼자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체제였다면 그 자녀들은 성별과 관련없이 모두 대학에 진학했고 울산은 한 때 대학진학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문제는 이 자녀들이 울산에 정착하려 할 때 마땅한 직업을 찿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기술연구소가 수도권으로 이동해서 기술연구와 생산이 이미 분리된 상태로 공대를 나온 엔지니어들이 울산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거기에 고소득 직종이 대부분 정규직 생산직이라 문과전공이나 여성 대학졸업생은 아예 진입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문과출신이 울산에 남으려면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거나 여성의 경우는 비서직 같은 사무보조직이나 어린이집 교사 같은 직종으로 가거나 아니면 전문직인 의사, 변호사가 되는 경우 뿐입니다.

기회가 없다고 판단되면 울산을 떠납니다.

즉 현재 울산의 노동시장구조는 1987년 이후 생긴 남성 정규직 생산직 위주로 견고히 구축되어 있고 회사에서 더이상 정규 생산직을 채용하지 않기 때문에 현 시스템의 수혜자들이 모두 은퇴하고 나면 무너지게 되어있는 체제입니다. 아버지가 보던 해택을 그 자녀들은 전혀 볼 수가 없고 따라서 울산을 떠날 요인이 될 뿐입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실을 오직 한세대만 누리고 그 이후 세대가 전혀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울산을 디스토피아로 보는 이유이고, 이 사실을 대한민국 전체로 확대해도 마찬가지입니다.

MZ세대가 연애도 결혼도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고 개인주의적인 건 울산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 그리고 서울과 수도권에 거의 모든 자원이 집중된 현실에다 대학졸업생들이 원하는 직업도 회사도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대기업 이외의 대부분 중소기업들이 영세하고 수익이 좋지 않은 구조적 요인으로 처우가 대기업같지 않으니 말이죠.

따라서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주거비와 생활비가 높은 현상황을 그대로 둔채,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돈을 버는 젊은이들에게 결혼하면 출산을 지원한다는 캠페인하는데 돈을 쓰는 건 정부가 무책임하게 세금을 낭비하는 겁니다.

더구나 결혼과 출산를 아예 하지 않는데 다자녀부터만 혜택을 주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언급을 소개할까 합니다.

저자는 제조업 생산직이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편안히 산 사람들이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산업이 제조업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적당히 사는 보통사람들이 잘 사는 나라가 선진국이지 공부 많이 하거나 돈이 많은 사람만 잘사는 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조업이 산업의 근간이라는 건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고 화려해보이는 금융이나 플랫폼도 공장과 물류센터 그리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지루해 보이는 제조업이 지난 50년동안 운영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운영되는 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공장노동자들을 배제한채 생산성을 논의하거나 보수층에서 노동자들을 적대시하는 건 미래를 위해 부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적당히 일해 중산층이 되는 구조를 만들지 않고 방치한체 자동화 로봇으로만 이루어진 공장시스템을 이야기하면서 인구감소를 걱정하는 건 무논리이자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새 AI와 자동화가 워낙 핫하니 마치 모든 것들이 사람없이 될 것처럼 과장되어 포장되어 있는데 일부 무인화가 이루어지더라도 전면적 무인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과문하지만 AI란 것이 결국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기계를 학습시키는 건데 컴퓨터과학자들이 알고리즘 논리는 잘알아도 산업이나 생산관리 그외 여러 고려사항을 모두 안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에 정보를 넣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모두 결과와 그에 기반한 장밋빛 미래만 이야기합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한국에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매우 드물다고 보기 때문에 AI의 영향을 과장하는데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자동차 혼자 움직이는 자율주행 자동차(Autonomous Vehicle)가 초기 호들갑과 달리 비즈니스모델로서 사실상 실패된 체로 구현이 연기된 상황을 보면 무인공장 역시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공장노동자를 배제한 이런 논의는 이들 노동자들이 공장의 소비자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소비자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를 배제하는 이런 논의는 기본적으로 넌센스라고 봅니다. 번지르르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모르겠습니다.

효율적으로 제품을 만들어 창고에 쌓아놓는 것이 목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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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출간된 국제정치 연구서로 성균관대 차태서 교수께서 쓰신 글입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책은 1930년대 출간되었던 영국의 역사학자 E.H Carr의 고전, ‘The Twenty Year’s Crisis,1919-1949 (1939)’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처리미숙으로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을 초래한 혼란기였던 전간기와 탈냉전 이후 신자유주의가 시효를 다하고 미국의 일극중심 세계체제가 붕괴된 이후인 2020년대가 20세기 전간기와 얼마나 유사한지 비교하는 겁니다. 이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20세기의 전간기(interregnum)로 불리우는 1919-1939년의 세계정세와 탈냉전 시기의 1989-2023년에 이르는 30여년에 이르는 기간의 세계정세를 비교해 보려는 의도라고 봅니다.

위에서 언급한 탈냉전 시기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한 ‘역사의 종언’ 선언이후 사실상 미국중심의 일극체제였으며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였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앵글로 색슨 제국들은 민주주의의 적인 공산주의가 사라지고 자유방임에 가까운 규제완화를 통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전지구적으로 ‘세계화’를 통해 이루었고, 러시아와 함께 중국을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편입시켰습니다.

1990년대 미국중심의 자본주의체제의 호황과 함께 워싱턴은 자신들의 민주주의 체제를 중동의 ‘후진국가’에 이식하려고 했습니다. 계기는 2001년의 9.11 테러였고,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에 ‘민주국가(nation building)’를 세우기 위해 20년을 전쟁을 벌였지만 실패했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 신자유주의 시기는 비정상적으로 금리가 낮았던 시기였으며 여러 경제주체 중 기업의 힘이 무소불위로 커지던 시기였습니다. 기업의 로비에 따라 각종 규제가 완화되었고, 특히 이시기 미국에서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영업을 규제하던 법안이 폐기되었습니다.

이 비정상적인 저금리 시기는 미국에서 기업의 팽창과 중산층의 몰락 그리고 양극화가 심화되는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이 미국중심의 일극체제는 2008년 금융위기로 전환점을 맞았고,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거의 무제한적으로 영적완화를 실시하고 세금을 투입해 금융위기를 촉발한 거대은행들을 살렸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시효가 다했다는 사실이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서 일어난 이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세계화의 여파로 계속 수세에 몰리고 있던 미국 러스트벨트의 백인노동자계층은 이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돌아갈 이익이 타국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이후 이들은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을 당선시키면서 미국의 정치지형을 완전히 변화시켜버립니다.

이민자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을 ‘백인 기독교국가’로 한정하고 미국내 유색인종과 타국에 대해 다분히 인종적인 색깔을 드러냅니다.

멕시코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경찰들은 유색인종 특히 흑인에 대해 인종적인 테러를 가하는 파문을 일으키게 됩니다.

인종주의적 극우정치를 추구하며 유색인종과 좌파들이 미국의 주류인 백인들의 국가인 미국을 타락시키고 분열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세계평화의 담지자로서 자유주의적 개입자로서의 전통적인 미국의 역할은 무시되고 각종 국제기구에서 탈퇴가 잇따릅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동맹국에 주둔하면서도, 미군주둔에 대한 비용을 동맹에게 강요하면서 미군철수를 위협합니다.

부동산 사업가출신으로 외교도 거래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요.

최근에는 미국은 한국과 같은 부자나라의 방위에 미군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다소 과격한 주장들이 어느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르던 미국의 다른 전통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미국사에서 흔히 ‘예정된 운명(manifested destiny)’라고 알려진 서부개척시대 정신에 대한 것입니다.

최초 13개 영국식민지에서 독립하여 ’합중국‘을 이룬후 스페인과 전쟁을 하면서 인디언들이 살던 서부를 합병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정치인인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의 이름을 딴 잭슨주의가 그것입니다.
이 흐름은 미국을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의 배타적 공동체로 상상해 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인디언, 멕시코인, 아시아인, 흑인, 성적 소수자, 비개신교 이민자들을 ’외부자‘로 규정하고 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국가를 자처하지만 엄연히 침략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노예제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다른 면이 트럼프 집권시기 미국정치의 중심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 바이든 정부는 이런 트럼프정부의 백인중심의 인종주의적인 고립정책( 자유주의적 개입자로서의
미국 역할포기)를 일시적인 후퇴로 보고 다시 미국의
역할을 복원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미국이 이미 국제정치에서 유일한 강대국이 아닌 상황에서 새로운 질서를 찿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시기를 통해 국제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의 중국에 대한 의존을 확인한 특히 미국은 중국과의 디커플링(decoupling)을 시도하며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반도체 칩의 미국생산을 서두르는 상황입니다. 기존에 대만과 한국에서 반도체의 거의 과반이상이 생산되는 현실을 두고 볼수는 없었던 것이죠.

미국의 의도에 따라 세계의 공장으로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되었던 중국은 이제 미국의 패권(Hegemony)에 도전하는 라이벌국가로서 자리매겨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 30여년동안 중국이 미국의 원천기술을 아무런 댓가없이 무임승차해 이익을 누려왔고, 저작권을 침해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는 현실을 이제는 두고볼 수 없다고 생각한겁니다. 뒤쳐질 수 있다는 공포와 더불어 중국인을 얕잡아 보는 인종주의적 황화론(Yellow Peril)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는 미국의 안보우산인 NATO의 동진으로 러시아는 실존적 안보위협으로 느끼게 되고,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더이상의 동진은 안된다고 경고를 해왔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크라이나의 NATO가입 요청으로 한계를 느낀 러시아가 전격적으로 침공해 시작된 전쟁입니다.

러시아는 이미 30여년 전 독일 통일 당시부터 NATO의 동진을 우려하고 있었고,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NATO의 동진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국가들이던 동유럽의 폴란드, 헝가리 등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중립을 유지하던 노르웨이 스웨덴 등도 NATO에 가입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영미권 문명국 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문명국’으로서 영미권에 대항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현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가 다른 중견국가들과 다르게 실용적이기 보다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의 선봉에 서는 외교로서 , 미국중심의 단극 체제가 끝난 상황에서 외교의 유연성부족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결국 현재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상실 상황을 미국의 국내적 정치전통에 따라 발생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정치와 국제정치를 바꿔놓은 트럼프 정부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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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의 서사 - 독일 통일을 다시 본다
김영희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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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서 국제문제를 주로 다루어 오셨던 김영희 대기자께서 2016년 쓰신 책입니다.

총 9장으로 이루어진 본문과 부록으로 저자가 독일과 소련 정치인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영미권의 시각 (perspective)을 거치지 않고서 한국의 입장에서 독일과 소련의 지도자 의견을 물은 것이어서 꽤 의미있는 글이라고 봅니다.

한국의 언론인이 유럽정치 그중에서도 독일정치에 대해 집필한 건 매우 드믄 사례인 것 같습니다.

저자에 대해 알아보니 2020년 세상을 떠나시고 고인이 되셨습니다.

독일이 제2차세계대전 패전의 결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고 특히 수도 베를린은 동서로 나뉘어 서베를린은 공산주의 국가 동독에 섬처럼 떠 있는 자본주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동베를린을 탈출해 서독으로 망명하는 이야기는 냉전시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독일이 통일되었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서독 초대총리 콘래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West Policy)이 이후 빌리 브란트총리의 동방정책( East Policy)의 토대가 되고 이후 통일당시 헬무트 콜 총리의 통일정책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보수적 입장의 언론인이지만 객관적으로 독일의 정치사를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세계대전 4대 승전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어 있는 상태에서 동서독간의 교류가 지속되고 동독의 경우 동유럽 지역과 교류가 지속될 수 있었던 사실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남북관계는 동서독관계보다 더 적대적이고 독일과 소련처럼 어떤 특정강대국의 영향력으로 한국의 미래가 결정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한반도 주변 4강의 이해가 첨예하게 엮인데다 남북한간의 교류의 역사도 미미합니다.

이 책은 현재 윤석열정부에서 악화된 남북관계, 대중, 대 러시아관계를 포함하지 않고 있고, 미국의 대중적대정책에 대한 상황도 물론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독일 통일의 과정을 살펴보는게 한반도의ㅡ미래를 생각하는데 분명 좋은 선혜인 건 변함이 없습니다.

책에 잠깐 스치듯 언급이 되었지만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있었던 동유럽국가들이 미국주도로 성립한 NATO에 가입하고 통일독일이 NATO의 추요국이 되었던 점은 이미 통일 당시에도 러시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이 결국 NATO의 동진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에도 NATO가입을 희망했었고, 전쟁이 일어난 2022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시카고 대학의 머시마이어(John Mearsheimer)교수는 전쟁초기부터 서방의 잘못 , 즉 NATO의 지속적인 동진이 러시아의 실존적 위험을 느끼게 하고 그래서 전쟁이 촉발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보수적인 대학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가 전쟁을 러시아탓으로 돌리지 않고 서구와 미국의 탓으로 돌려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현실주의 정치학(Realpolitik)을 추구하는 분의 분석이라 저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분단에 대한 역사를 보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일본은 왜 분할점령되지 않았는가입니다.

독일이 먼저 분할점령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 분할점령은 논리적으로 정당한 결정일 수 있는데, 오히려 한반도가 분할되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패전 직후 한반도의 국제법적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서구와 열강이 한반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글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해방이후 현대사는 미국의 공산주의 봉쇄정책(containment)와 떼어넣고 생각하기 힘들고, 메이지 유신이후 일본은 항상 중국과 러시아를 경계해온 역사가 있습니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의 적군(red army)은 일본의 홋카이도 침공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사할린과 그 부속열도들만 침공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국내정치적 사건들과 미국/ 소련의 입장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 사건의 발생경위를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패전후 일본이 미국의 점령정책에 어떻게 대응해갔는지를 알아야 한국이 미일과 어떤방식으로 대응해야할지 보일겁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아무튼 의문이 계속 듭니다.

한국의 해방직후의 상황에 대해 한반도뿐만 아니라 주변열강들을 포함해 좀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연구서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분단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이해당사국들과 현안을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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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동물 - 동물은 왜 죽여도 되는 존재가 되었나
김도희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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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인권(人權, Human Right)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에서 동물의 권리 (Animal Right)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우선순위가 맞는지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책을 보게 된 사실을 고백하는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육식을 포기하는 비거니즘(Veganism)에 대해 말하지만 여기서는 논평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할 뿐입니다.

다만 육류생산이 공장식 축산에 따라 동물에게도 인간에게도 좋지못한 영향을 끼치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육식주의자들 누구도 항생제에 쩔은 고기를 먹고 싶지 않을 것이고 솔직히 대량으로 가공된 고기가 품질이 떨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튼 저 자신이 나름 합리적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동물의 권리는 너무나 낯선 주제입니다.

그리고 책에서 보여주는 동물권에 대한 논의는 현실적인 실행가능성보다는 이상적 추상적 이론적 논의에 그치는 경우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중도적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고 푸코의 생명정치를 일부 이해한다고 해도 솔직히 인간사회를 규율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의 주체 내지 행위자로 동물을 집어넣는 게 맞는지 회의적입니다.

인간의 논리가 인간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설령 동물들 나름대로의 의사소통체계와 인간과 다른 언어로 소통한다고 해도, 왜 인간의 규울체계인 법에 행위주체로 동물을 끌어들여야 하는지 회의적입니다. 억지로 끼워맞춘 인상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너무 사변적(思辨的)입니다.

책에 나온 동물권 관련한 소송에서 예외없이 판사들이 동물이 법률의 행위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결한 경우도 아마 위의 이런 논리때문일 겁니다.

인간이 생태계에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과 그들을 인간사회의 규율체계에 끌어들이는 건 전혀 별개의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생태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이면에서 동물이 착취되어 온 점, 그리고 소수자의 관점에서 여성과 아동 그리고 동물들이 자본주의 초기 수탈을 당했다는 관점은 수긍이 되는 지적입니다. 말하자면 실체가 있으나 ‘말하지 못하게 된 상태’로 잊혀진거죠.

자본축적의 역사는 대체로 남성위주로 기술된 것이 사실이고, 특히 자본주의 초기역사는 백인남성 위주로 기술되었다는데 이론을 제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여성들의 가사노동과 자본주의 초기의 아동노동은 어쩌면 초기 자본주의의 치부이기 때문에 논의자체를 꺼린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서술의 주류를 이루는 정치외교사나 전쟁사의 주인공은 남성 그중에서도 왕이나 황제 또는 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사에서 농업이나 초기 산업발달에 있어 말이나 소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수단으로서 논의된 적은 있어도 이들이 어떻게 어떤상황에서 살았는지는 알려진바 없습니다.

서양의 고대전쟁사나 중국고대의 전쟁사를 봐도 몇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있었는지 어떤 전투대형을 이루어 어떤 전술로 싸웠는지는 있으나 얼마나 많은 말들이 희생되고 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보여지지 않았던 소수자로서 여성과 함께 동물을 호명하는 건 그래서 수긍할만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동물권보다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으로 고된 삶을 보내는 현실에서 우선순위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생을 위해 동물권이 중요하다는데 동의하지만 인권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이 애완견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경우는 최소 없어야 동물권을 위한 논의의 장이 펼쳐질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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