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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와 사회갈등의 역사 ㅣ 도시사 연구 총서 2
김태승 외 지음 / 심산 / 2011년 12월
평점 :
이 논문집 중 한국 도시의 도시 발전에 관한 세 편의 논문에 대해 간략히 정리를 해 보려 합니다.
총 8편의 논문이 수록된 논문집이지만 한국관련 논문 3편만 살펴봅니다.
개항당시와 일제시기는 현재 서울의 모습을 만들었던 기반이 된 시기입니다.
조선시대 한양이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 현재의 서울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 실마리를 이 시기에 찿을 수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이루어진 ‘강남개발’이전의 전사를 알려면 이 시대를 살피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첫 두 논문은 개항기 서울의 확장에 관련된 것과 일제시대 경성의 빈민들었던 토막민에 관련된 것이고 마지막 논문은 일제의 여수 신시가지 개발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첫번째 논문은 개항기 서울의 도시개발에 대한 논문입니다. 개항이후 서울은 청계천 남쪽의 남촌 지역이 일본과 청나라를 중심으로 명동, 진고개를 중심으로 개발이 일어나고, 서양 세력들은 중구 정동을 기반으로 종교 시설과 학교 병원 등을 건설합니다.
당시 서울의 도시화는 근대화와 외세침탈이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이전 서양에서 일어났던 산업화와 인수 집중이 같이 일어나는 전형적 도시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외국 세역 주도로 근대적 건물과 병원 학교가 만들어지고 자본재적 상품이 유입되는 등 주로 ‘ 건조환경 중심’의 도시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개항기 당시 서울의 가장 유력한 상권 세력은 청국으로 근대이전부터 청과 조선은 조공관계로 맺어져 있었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청나라 상인들로 서울 시민들에게 경제적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조선시대 이래 양반들의 공간이었던 북촌과 외세들이 자리를 잡은 남촌( 청계천 너머 명동과 진고개와 청나라 상인들이 장악한 명동)과의 분리가 나타났습니다.
1897년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한 이후 서구 세력들이 자리를 잡은 남촌 지역인 정동의 위상이 커졌고 이후 서울의 중심은 북촌에서 남촌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상이 조선시대 수도였던 한양이 북촌 중심의 사대문 안 지역에서 외세에 의해 개방된 이후 서울이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첫번째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동과 진고개 ( 현재 충무로)와 정동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두번째 논문은 일제시대 경성의 도시화와 빈민주거 문제에 관한 논문으로 ‘경성부의 토막민 ( 土幕民)에 관련된 것입니다.
토막민들은 주거형태에 따른 명칭으로 국유지나 사유지에 집을 짓고 사는 ‘ 토지의 불법 점유자’라고 인식되었는데, 일제하 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토막민’들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막민들은 1930년대 초까지 사실상 식민당국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사실상 무관심 또는 무통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4년 도시계획법인 조선시가지계획령( 朝鮮市街地計劃令)이 제정되면서 토막민의 주거박탈 문제가 시작되었다.
경성의 행정구역 확장이 구체화된 1935년부터 지주들은 그동안 등한시 했던 지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불법적으로’ 사유지를 점유한 토막민들의 토막을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부터 식민당국은 본격적으로 경성의 시가지게획을 실행하면서 ‘구획정리사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1938년부터 본격적으로 토막의 철거와 구축이 이루어졌습니다.
경성부는 본격적으로 토막을 철거하고 나섰습니다.
경성부는 토막민들의 주거를 위해 세민지구를 설정하고자 했지만 중앙 식민 당국( 즉 조선총독부)의 비협조로 좌절되고 토막민들은 끝내 주거를 박탈하고 생활의 안정성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경성시가지계획(1937-1945)을 실행하기 위해 경성부는 1936년부터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을 실시했고 1937년 이후 본격적으로 구획정리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경성부는 빈민주거대책에 대해 재정을 투입하지 이노았고, 토지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감보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 성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중일 전쟁 발발로 모든 정책의 초점이 전쟁 수행에 있어 경성의 토막민 거주 대책은 순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도시개발을 하면서 공공성을 무시하고 빈민구제대책을 소홀히 한 것은 이 사례를 보면 그 역사적 뿌리가 깊습니다. 도시계획 자체를 공공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최초 근대적 도시계획인 경성시가지계획 (京城市街地計劃,1937-1945)에서 구획정리사업을 시작한 것인데 이 신도시 개발사업 방식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시절‘영동개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구획정리 사업으로 영동을 개발하라는 명령은 박정희 대통령 본인이 직접 지시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라남도 항구 도시인 여수의 도시개발에 대한 논문입니다.
주요 관심사가 서울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여수 도시개발은 식민당국이 소도시를 개발할 때 어떤 입장을 가지고 접근했는지 들어야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일제는 여수항을 목포와 부산 두 대항마를 잇는 남해 해상의 요충지로 인식하고 개발을 결정합니다. 논문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를 고찰하는데, 이 기간동안 일제는 여수항을 매립 준설하여 새로운 신시가지를 조성하고 광주와 여수를 잇는 철도선을 건설하고 여수와 시모노세키 간 정기항로 개설합니다.
여수에는 당시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이주해 정착해 있었고 이들은 여수의 수산물 유통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더해 일본 식민당국은 거시적 식민지 경영 상황에 맞춰 일방적이고 대규모로 여수의 신시가지를 개발하고 철도를 건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수시민들의 이익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신도시 개발과 철도 정거장 건설로 기존의 농지를 잃어 생계가 막연해진 영세민들과 싼값으로 토지를 수용당해 재산권을 박탈당한 영세지주들의 불만이 속출했습니다.
당시 여수신시가지 건설은 남조선철도주식회사( 남철)과 여주읍이 같이 진행하였는데, 주민들이 도시개발을 진행하면서 계속 손해를 봐 진정을 진행하고 항의를 하였음에도 일부 관공리와 지역 유력자들은 남철과 식민 당국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당시 철도용지매수를 위해 활동했던 ‘철도용지매수위원회’는 농토를 잃어 소작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여수지역 농민들과 극단적으로 대치했습니다.
이 모든 저항에 대해 식민당국은 그냥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여수의 경우 도시의 발달 상황이 아직도 일제시대 시행되었던 도시개발의 영향권 안에 있어 일제에 의한 도시개발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힌국에서 도시개발이 전혀 공공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역사적 요인을 일차적으로 일제시대 도시계획을 성격에서 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식민당국은 효율성과 근대화의 이슈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면서 도시에 실제 살고 있는 주민들은 단지 ‘정책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의 경성시가지계획에서도, 여수의 신시가지 개발계획에도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여기서 ‘ 누구를 위한 도시개발인가?’를 진정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겉보기에 그렇듯하게 보이려고 서민들의 삶의 터전을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파괴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시민들은 고위 관료의 ‘정책대상’일 뿐 주체적 의사결정 주체가 될 수 없는가?
중요한 건 개개인 각자가 고위 관료들의 정책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일방적 정책 추진에 대해 필요하면 제동을 걸고 정책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상관없는 듯 보이는 100여년전 경성의 도시계획사가 그리고 여수의 신도시개발사가 일방적 도시개발과 그영향을 기록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