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소개드린 ‘무지개떡 건축 ‘의 이론서인 ‘무지개떡 건축 (2015)’의 탐방 보고서격인 책입니다.

주로 서울의 도심과 외곽지역에 있는 무지개떡 건축물을 답사한 것으로 답사 장소는 종로, 충정로, 홍제동, 용산 지역입니다.

무지개떡 건축이 실용적 의미에서 ‘상가 아파트’라면 서울시내에 남아 있는 상가 아파트들이 위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답사는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최초의 상가아파트를 찿아가다보니 이런 답사 경로가 짜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상가아파트 건설이 잠시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가 1960년대 후반에서 1971년 정도 되는 짧은 기간동안이었습니다. 하지만 1974년경부터 본격화되는 ‘영동개발’이후 아파트는 모두 근린주구 이론에 따른 단지형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건물의 밀도와 복합도가 낮아졌습니다. 이후 상가아파트라는 건축유형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가 최근의 주상복합아파트의 열기로 관심이 다시 올라가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책은 2017년 출간되어 현재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읽을 때 주의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대도시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수직으로 건물을 짓고 복합도를 높이는 것이 경제적으로 필요하다해도 복합건축의 핵심인 ‘밀집도(density)’ 자체가 전염병 발발의 영향으로 도전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밀집도를 완화하게 되면 무지개떡 건축의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사회역학적 이슈가 경제적 효율성을 우선시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효율성을 우선으로 하는 복합건축에 대한 재고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복합화가 불가피하다면 어떻게 거리두기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공간배치가 이루어질 지가 관건이 될 것 같습니다.

반면 재택근무(work from home)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단지형 아파트 일변도인 거주공간의 개념도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홍익대 유현준 교수는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일반화되면 더 넓은 주거공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견해를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주장하시고 계십니다.

건축가인 작가께서 개별 건축물 자체에 촛점을 맞춰 건축비평을 하신다면, 이전에 소개해 드린 김시덕 작가님의 ‘서울선언(2017)’, ‘갈등도시 (2019)’는 개별 건축물보다 삶의 공간으로서의 도시, 그리고 현대의 ‘대서울’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식민지 시대의 도시계획의 흔적을 찿아본다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좋든 싫든 식민지 시대가 현재의 서울과 수도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서두에서 선행연구로 초기 아파트를 연구한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2009)’를 언급하셨는데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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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작가의 ‘대서울 답사기’ 두번째 편입니다.

작가님의 포인트는 명확합니다: 사대문 안의 남성 지배층 즉 왕족과 양반들의 유물과 유적만 역사기록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근세와 근대 시기를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인 평민, 노비들의 유물 유적도 삶의 기록으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학계와 의사결정 계층에서 아직도 ‘조선시대 양반 중심적 사고’를 가진 분들이 지난 100여년간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너무나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식민지 시대의 주택들, 일식 가옥이나 개량한옥들이 단지 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식민지 잔재라는 이유로 파괴되는 것은 지난 100여년간 대서울 지역에서 살아온 평범한 이들의 삶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답사도 사대문 안보다 사대문 밖의 대서울 경계지역과 수도권의 경기도 도시들을 포함합니다. 현재도 대부분 서울과 연관되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사대문 밖에 살고 있고 100여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편인 ‘ 서울선언(2018)’에서 1936년 출판된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을 소개하고 영등포와 명동, 용산과 노량진, 흑석동 등 식민지 시대에 일제가 만든 신도시를 소개했는데, 이 지역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1970년대 ‘영동개발’하기 이전 현대 서울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책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식민지 시대의 신도시 답사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제가 관심이 가는 지역은 길음동에서 창동까지 이어지는 서울 동북부 지역입니다.

특히 1970년대부터 서울 도심의 철거민들이 동소문 밖으로 이주시켜 만들어진 지역인 미아동, 삼양동 등 삼각산 아래 동네는 제가 유년시절을 보낸 지역이기도 해서 더 관심이 갔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상계동 중계동 지역은 제가 중학생이던 1980년대 중반만 해도 확연한 농촌지역으로 끝없이 펼쳐졌던 논밭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시절 1988년 올림픽 이전까지 재개발되어 현재의 아파트단지가 되었습니다. 대학시절까지 창동역 인근의 아파트단지애서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 도심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지역이고 특별한 산업기능이 없어 현재는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이들이 사는 주거지역이라는 점이 이 지역의 특징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삼양동과 장위동 지역은 제가 어렸을 때 본 바로는 엄청나게 큰 달동네 지역이었습니다. 장위동 지역은 산동네 전체가 재개발되었습니다.

영등포는 일제 시대부터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지대였으나 공장들이 구로 부평 등 서울 외곽지역으로 이전되고 공장부지들이 모두 고층 아파트단지로 재개발되었습니다.

노량진과 흑석동도 아직 식민지 시대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른 길과 구획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 아직도 현대의 서울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현대 서울의 공간은 사실상 조선의 영향보다 식민지 시대의 도시계획에 더 큰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현재 서민들의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을 밀어버리고 순전히 경제적인 판단으로 일률적인 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아파트만 짓는다면 한국인들은 그냥 역사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식민지 시대와 광복 이후 지어진 옛 건물들을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전에 문제가 있거나 주거 또는 상업적 용도로 쓰기가 곤란할 경우가 아니라면 시간의 흔적이 있는 건물들을 잘 관리해서 쓰면 되는데 국민 모두가 토건 산업의 논리에 휘둘릴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울의 역사가’이천여년’이나 되었다고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에서 ‘서울2천년사’라고 관찬 역사서까지 펴내고 있지만 서울에서 1500여년 전인 한성백제의 유적지는 거의 찿아볼 수 없습니다.

삼성동 토성은 1970년대 ‘영동개발’로 흔적만 남기고 파괴되었고, 풍납토성도 일부 유실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전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식민지 시대부터 서민들이 살던 일식 가옥과 개량한옥들이 무수하게 없어졌습니다.

편협한 조선시대 중심 사고 방식에 갖혀 스스로 현대에 살아온 역사의 흔적을 파괴해 왔다는 점에서 이 나라의 위정자들과 의사결정권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에 책임을 저야하고 앞으로 이런 무자비한 일들은 줄어들어야 합니다.

유럽의 나라에 다녀와서 그 나라 사람들이 옛 건물을 고쳐살고 있는 걸 보고왔다면 한국에서 그런 방식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텐데, 편리한 새 아파트가 좋다고 그 이전 세대들이 살던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재개발을 하면서 ‘서울에 유적이 없’느니 하는 주장을 하는 건 ‘분열적’ 사고방식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작가님께서 책에서 언급하신대로 서울은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예전 서울 거리에 사진을 찍으러 나가면 늘 가던 공간의 풍경이 너무 자주 바뀌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놓지 않으면 그 풍경은 영영 볼 수 없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서울은 전례가 없이 빨리 도시화가 되고 도시지역이 팽창된 지역이고 지가 급등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속도를 기록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거주지를 투자와 교환가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거주지의 원래 목적인 이용가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년전 어렸을 때 살았던 단독 주택을 찿아가 본적이 있는데 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이 재개발로 헐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만 머물러 살 수는 없지만 고향집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상실감이 컸습니다.

‘발전’과 ‘선진화’의 목적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유명한 곳을 찿아가는 답사가 아니고 지난 100여년간 대서울에서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흔적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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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Moneyball)에 이어 연이어 읽게 된 마이클 루이스의 스포츠 논픽션입니다.

전작에 비해 ‘경제적 분석’이나 프로스포츠 구단 운영에 대한 이야기가 적은 순수하게 한 미식축구 선수의 삶에 촛점을 둔 책입니다.

글의 대략적인 이야기는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뛰어난 운동능력을 가진 흑인 소년이 백인 가족의 도움을 받아 성장해 프로 미식축구선수가 된 이야기입니다.

미국적이지만 충분히 이목을 끌 수 있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책에서 묘사하는 주인공 마이클 오어 (Michael Oher)는 6.6피트(약 2m)의 키에 350파운드(약 160kg)의 덩치를 가졌으면서도 스프린터의 빠른 다리를 가진 타고난 운동선수였지만 양육 능력이 없는 미혼모인 엄마를 둔 탓에 수없이 학교를 옮기고 학업을 할 상황도 아니었고 먹을 것이 없어 노숙생활을 하기도 했던 소년이었습니다.

흑백이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살아가는 보수적인 테네시에서 주인공은 부유한 백인 가정에 사실상 입양이 되어 살게 되고 보수적이고 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입양가정의 부모들과 학교의 선생들과 축구 코치들의 도움으로 미식축구를 하면서 대학 진학의 길을 모색합니다.

미국의 대학운동선수협회 (NCAA)는 각 대학에 적을 둔 미식축구선수들이 경기에서 뛰려면 고등학교 성적이 최소 2.86을 유지해야 선발이 될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 책을 통해 안 사실은 미국도 운동에 뜻을 둔 이들이 공부에 담을 쌓은 경우가 많아 주인공처럼 미식축구를 해서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경우에도 진학이 불발되는 경우가 흔하고 미식축구 같은 격렬한 운동을 하던 덩치들 중 고등학교 중퇴 뒤 갱이 되거나 마약거래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합니다.

아무튼 대학 운동선수들이 자격 유지를 위해 일정 학점 이상 유지하는 규정을 둔 점은 한국의 스포츠계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식축구의 게임의 법칙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전작인 ‘머니볼’이 프로야구 이야기라서 이해하기가 수월했다면 이 책에 나온 미식축구는 이해가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포지션은 공격시 공을 패스하는 쿼터백 (Quarterback)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마이클 오너는 포지션이 레프트태클(Left Tackle)로 쉽게 말해서 가장 중요한 쿼터백을 방어하는 포지션입니다.

특히 쿼터백을 공격하는 공격수들은 쿼터백이 못보는 지역으로 기습공격(blind side)하기 때문에 이를 막는 레프트태클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미식축구 선수 중 레프트태클을 맡을 수 있는 선수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2m정도 되는 키에 160kg 정도되는 몸무게를 가지면서 빠른 발을 가진 선수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점차 몸값이 올라가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미국 프로야구의 경우 대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프로행이 가능하지만 특이하게 미식축구의 경우는 프로로 가기 위해 반드시 대학팀에서 선수생활을 해야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읽기 불편한 부분은 마이클 오어의 친모에 대한 부분으로, 맴피스 서쪽에 몰려 있는 흑인 거주지역에 대한 묘사와 그의 가족사입니다.

미혼모인 주인공의 친모는 부양능력이 없는데도 다른 남자들과 약 13명의 자녀를 출산했고, 알콜중독과 마약복용으로 재활센터를 드나들었고 자녀들을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 자녀들의 삶을 바라보는 건 정말 불편합니다. 미국이 과연 선진국이 맞는지 회의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코로나 발발과 함께 ‘흑인들의 삶이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캠페인이 왜 유럽과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지 그 이면을 들여다 본 느낌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미국이야기이고 좋게 보면 역경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좀 부정적으로 보면 주인공의 남다른 능력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루었다는 뻔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책보다 영화를 보시는 것이 더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배우 산드라 블록이 엄마로 나온 영화이고 미국 남부의 상황을 영화가 훨씬 더 잘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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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와 사회갈등의 역사 도시사 연구 총서 2
김태승 외 지음 / 심산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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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집 중 한국 도시의 도시 발전에 관한 세 편의 논문에 대해 간략히 정리를 해 보려 합니다.
총 8편의 논문이 수록된 논문집이지만 한국관련 논문 3편만 살펴봅니다.

개항당시와 일제시기는 현재 서울의 모습을 만들었던 기반이 된 시기입니다.

조선시대 한양이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 현재의 서울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 실마리를 이 시기에 찿을 수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이루어진 ‘강남개발’이전의 전사를 알려면 이 시대를 살피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첫 두 논문은 개항기 서울의 확장에 관련된 것과 일제시대 경성의 빈민들었던 토막민에 관련된 것이고 마지막 논문은 일제의 여수 신시가지 개발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첫번째 논문은 개항기 서울의 도시개발에 대한 논문입니다. 개항이후 서울은 청계천 남쪽의 남촌 지역이 일본과 청나라를 중심으로 명동, 진고개를 중심으로 개발이 일어나고, 서양 세력들은 중구 정동을 기반으로 종교 시설과 학교 병원 등을 건설합니다.

당시 서울의 도시화는 근대화와 외세침탈이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이전 서양에서 일어났던 산업화와 인수 집중이 같이 일어나는 전형적 도시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외국 세역 주도로 근대적 건물과 병원 학교가 만들어지고 자본재적 상품이 유입되는 등 주로 ‘ 건조환경 중심’의 도시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개항기 당시 서울의 가장 유력한 상권 세력은 청국으로 근대이전부터 청과 조선은 조공관계로 맺어져 있었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청나라 상인들로 서울 시민들에게 경제적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조선시대 이래 양반들의 공간이었던 북촌과 외세들이 자리를 잡은 남촌( 청계천 너머 명동과 진고개와 청나라 상인들이 장악한 명동)과의 분리가 나타났습니다.

1897년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한 이후 서구 세력들이 자리를 잡은 남촌 지역인 정동의 위상이 커졌고 이후 서울의 중심은 북촌에서 남촌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상이 조선시대 수도였던 한양이 북촌 중심의 사대문 안 지역에서 외세에 의해 개방된 이후 서울이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첫번째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동과 진고개 ( 현재 충무로)와 정동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두번째 논문은 일제시대 경성의 도시화와 빈민주거 문제에 관한 논문으로 ‘경성부의 토막민 ( 土幕民)에 관련된 것입니다.

토막민들은 주거형태에 따른 명칭으로 국유지나 사유지에 집을 짓고 사는 ‘ 토지의 불법 점유자’라고 인식되었는데, 일제하 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토막민’들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막민들은 1930년대 초까지 사실상 식민당국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사실상 무관심 또는 무통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4년 도시계획법인 조선시가지계획령( 朝鮮市街地計劃令)이 제정되면서 토막민의 주거박탈 문제가 시작되었다.

경성의 행정구역 확장이 구체화된 1935년부터 지주들은 그동안 등한시 했던 지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불법적으로’ 사유지를 점유한 토막민들의 토막을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부터 식민당국은 본격적으로 경성의 시가지게획을 실행하면서 ‘구획정리사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1938년부터 본격적으로 토막의 철거와 구축이 이루어졌습니다.

경성부는 본격적으로 토막을 철거하고 나섰습니다.
경성부는 토막민들의 주거를 위해 세민지구를 설정하고자 했지만 중앙 식민 당국( 즉 조선총독부)의 비협조로 좌절되고 토막민들은 끝내 주거를 박탈하고 생활의 안정성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경성시가지계획(1937-1945)을 실행하기 위해 경성부는 1936년부터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을 실시했고 1937년 이후 본격적으로 구획정리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경성부는 빈민주거대책에 대해 재정을 투입하지 이노았고, 토지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감보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 성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중일 전쟁 발발로 모든 정책의 초점이 전쟁 수행에 있어 경성의 토막민 거주 대책은 순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도시개발을 하면서 공공성을 무시하고 빈민구제대책을 소홀히 한 것은 이 사례를 보면 그 역사적 뿌리가 깊습니다. 도시계획 자체를 공공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최초 근대적 도시계획인 경성시가지계획 (京城市街地計劃,1937-1945)에서 구획정리사업을 시작한 것인데 이 신도시 개발사업 방식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시절‘영동개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구획정리 사업으로 영동을 개발하라는 명령은 박정희 대통령 본인이 직접 지시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라남도 항구 도시인 여수의 도시개발에 대한 논문입니다.

주요 관심사가 서울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여수 도시개발은 식민당국이 소도시를 개발할 때 어떤 입장을 가지고 접근했는지 들어야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일제는 여수항을 목포와 부산 두 대항마를 잇는 남해 해상의 요충지로 인식하고 개발을 결정합니다. 논문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를 고찰하는데, 이 기간동안 일제는 여수항을 매립 준설하여 새로운 신시가지를 조성하고 광주와 여수를 잇는 철도선을 건설하고 여수와 시모노세키 간 정기항로 개설합니다.

여수에는 당시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이주해 정착해 있었고 이들은 여수의 수산물 유통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더해 일본 식민당국은 거시적 식민지 경영 상황에 맞춰 일방적이고 대규모로 여수의 신시가지를 개발하고 철도를 건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수시민들의 이익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신도시 개발과 철도 정거장 건설로 기존의 농지를 잃어 생계가 막연해진 영세민들과 싼값으로 토지를 수용당해 재산권을 박탈당한 영세지주들의 불만이 속출했습니다.

당시 여수신시가지 건설은 남조선철도주식회사( 남철)과 여주읍이 같이 진행하였는데, 주민들이 도시개발을 진행하면서 계속 손해를 봐 진정을 진행하고 항의를 하였음에도 일부 관공리와 지역 유력자들은 남철과 식민 당국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당시 철도용지매수를 위해 활동했던 ‘철도용지매수위원회’는 농토를 잃어 소작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여수지역 농민들과 극단적으로 대치했습니다.
이 모든 저항에 대해 식민당국은 그냥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여수의 경우 도시의 발달 상황이 아직도 일제시대 시행되었던 도시개발의 영향권 안에 있어 일제에 의한 도시개발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힌국에서 도시개발이 전혀 공공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역사적 요인을 일차적으로 일제시대 도시계획을 성격에서 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식민당국은 효율성과 근대화의 이슈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면서 도시에 실제 살고 있는 주민들은 단지 ‘정책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의 경성시가지계획에서도, 여수의 신시가지 개발계획에도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여기서 ‘ 누구를 위한 도시개발인가?’를 진정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겉보기에 그렇듯하게 보이려고 서민들의 삶의 터전을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파괴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시민들은 고위 관료의 ‘정책대상’일 뿐 주체적 의사결정 주체가 될 수 없는가?

중요한 건 개개인 각자가 고위 관료들의 정책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일방적 정책 추진에 대해 필요하면 제동을 걸고 정책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상관없는 듯 보이는 100여년전 경성의 도시계획사가 그리고 여수의 신도시개발사가 일방적 도시개발과 그영향을 기록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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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자이신 김시덕 작가의 글을 좋아합니다. 임진왜란을 ‘근세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본 그의 글은 신선했고 그래서 그의 다른 저서도 더 읽고 싶었습니다.
김 작가가 쓴 ‘그들이 본 임진왜란 (학고재,2012)’의 일독을 권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조선 중기에 발생한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사보다는 서울의 현대도시개발사를 더 주력으로 읽고 있는데 ‘서울선언 ( 열린책들, 2018)’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서울 답사기’입니다. 현대 서울이 답사할 곳이 어디있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있겠지만, 그건 이 분들이 자신들이 매일 보는 풍경에 무관심해서 하는 질문일 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기본적으로 저자와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저자가 4장에서 언급한 대로 저 역시 ‘ 백년 전 망한 조선왕조의 유적을 복원하자고 근현대 서울의 유산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반대합니다.

10여년 전 부터 사진 찍으러 서울 시내를 다니면서 ‘서울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고 느꼈고, 왜 모든 건물들과 경관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것’에 집착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유가 우스운 것이 일상의 경험이 묻어있는 소소한 공간이나 사람들이 살아왔던 골목길의 살림집은 ‘보전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왕조 시대 양반들의 흔적은 가치가 있고 서울에 사는 보통 사람의 인생의 흔적은 부정하는 것으로 보여 황당했습니다.

오세훈 시장 시절 사진 찍으러 다니며 보았던 청진동 골목길과 피맛골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황당하고 허망했습니다.

재개발의 민낯을 처음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이제 일제시대 이후로 내려오던 청진동의 분위기는 다 사라져 버리고 어디에나 있는 고층 빌딩으로 구역 자체가 변했습니다.

따라서 현재 일반 서울시민들이 살아온 건물들과 구역들이 돈을 쫓아 무지막지하게 재개발 되는 것도, 일제시대와 해방구 현대 한국의 모습을 증언하는 옛 콘크리트 건물들이 ‘조선시대 유적’을 복원한다는 명분아래 파괴되는 것도 반대합니다.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책의 3장 ‘1925년 을축년 대홍수의 문화사’와 4장 ‘최초의 강남을 걷다: 영등포에서 흑석동까지’ 두 글입니다.

우선 ‘을축년 대홍수’에 대해 여러 책에서 언급되는 경우를 봤지만 별도의 장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한 글은 이 글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글은 이 대홍수가 영등포의 공단지역과 잠실섬 주변과 현재 강남의 한강변 그리고 현재 이촌동 지역에 얼마나 피해를 입혔는지 당시의 기록과 피해상황을 담은 지도를 가지고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저는 단행본 한권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을축년 대홍수’에 대한 저서가 없다는 점은 정말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4장의 ‘최초의 강남 ‘에 대한 글로 식민지 시대 현재의 영등포 공단지역과 노량진, 흑석동 일대를 일제가 최초의 ‘강남’으로 건설한 내력이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노량진과 흑석동 일대는 일제에 의해 개발된 유원지였고 당시 조성된 전원도시와 베드타운이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아는 현대의 강남이 왜 개발 초기 ‘영동’즉 영등포의 동쪽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연원을 알 수 있습니다.

을축년 대홍수로 수 많은 이재민들이 생기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마포 일대에 일제는 신시가지를 조성했고, 용산지역도 일제가 조성한 신시가지 였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용산에 미군이 들어오기 전 일본군이 주둔했었고 일제는 청계천의 남쪽인 명동에서부터 남산 주변의 용산과 이촌동 주변을 개발했고 경인 지역과 연계해서 영등포 지역을 공단지역으로 조성했습니다.

이 책이 답사기이지만 특히 강남 개발 이전 서울의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고 설명해 준다는 점이 강점인 것 같습니다.

건축적입자이나 도시계획을 입장이 아닌 근현대 역사가의 입장 또는 문헌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설명 내용 역시 신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서울 사대문 밖’에서 살아온 서울시민들을 대변해서 하신 주장을 소개하려 합니다.

저 역시 여지껏 사대문 안에서 살아온 경험이 없어 저자의 입장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서울시민 대다수는 조선시대 한양인 <사대문 안> 보다 사대문 밖에서 살고 있고 따라서 현재 <대서울> 즉 서울의 생활권인 서울 외곽지역과 경기도 일부 지역에 대한 삶과 그 흔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현실은 이 지역에 무관심하고 오로지 사대문 안의 흔적과 유적만 보전하는 실정이며 <사대문 밖>의 유물과 유적에 대해 보존과 기록보다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편의적으로 기억을 없애거나 조작해 역사왜곡에 이르는 위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찌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도 있는 그대로 보전하고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있었던 사실을 일단 그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빙이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소위 엘리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의적 판단으로 기록 자체를 삭제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것이라는 점를 지적하고 싶네요.

이책의 후속편 ‘갈등 도시(열린책들,2019)’도 조만간 읽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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