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 중 한분인 정세권은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 경성에서 활약하신 부동산 디벨로퍼( Real Estate Developer)입니다.
부동산 디벨로퍼란 말 그대로 토지를 싼값에 사들여 그 토지를 시장 활황시 그대로 매각하거나 그 토지에 건물을 지어 부사가치를 올린후 그 건물을 매매하거나 임대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자를 말하지요.
2017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경민 교수가 쓴 이 책은 200여 페이지 내외의 짧은 책이지만 흔히 ‘집장사’로 폄하되어온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의 일생을 당시 신문기사, 정세권의 아들, 딸, 외손녀 등 후손들을 인터뷰해 다시 재구성하고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재조명한 책입니다.
도시공간이나 도시의 역사,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 분야가 토지의 경제적 측면을 보는 부동산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한국에서 이런 부분에 촛점을 맞춘 경우는 이 책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읽었던 김시덕교수의 ‘갈등도시 ( 열린책들,2019)’에서 이 책을 처음 소개하셨고, 현재의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최근 일독을 한 것입니다.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된 이책의 1부와 2부는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과 1920-30년 당시 경성의 일본인 진출상황에 관련된 내용이고 3부는 정세권이 본업인 부동산 개발 이외 참여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후원 관련된 내용입니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숭리한 이후 사실상 서구의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지배를 공인받고 인천지역인 현재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에 진출하여 남산 아래 통감부를 세우고 최초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꾸고 조선신사를 세우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마련하여 사실상 남촌을 장악했습니다.
‘명동길거리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2019)’에서는 일본인의 남촌 정착과정과 명동에서 일본 백화점들이 진출해 일제시대 어떻게 이곳이 소비의 중심으로 떠올랐는지 그리고 당시 명동의 메이지좌 ( 현재 명동예술극장)가 북촌의 조선인과 남촌의 일본인을 관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처음에 명확하던 남촌의 일본인 관객과 북촌의 조선인 관객의 경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분명해지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조선과 일본의 관객들이 남촌과 북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불분명해지는 것은 이 당시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과 무관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에 완공된 것을 기회로 일제는 여기서 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관사를 짓는 수법으로 지금의 북촌과 서촌일대 그리고 서소문 경희궁을 비롯한 관화문 주위의 ‘북촌지역 ‘에 그들의 거주지를 확대해 갑니다.
광화문 일대 관청가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이순우 작가의 ‘광화문 육조앞길 (하늘재,2012)’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소위 서양식 ‘문화주택’의 개발에만 집중하고 조선인 중하층 인구에 대해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아 토막민(土幕民)으로 불리는 영세민들이 열악한 토굴과 같은 오두막에 사는 등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사회갈등의 요인이었는데도 일제는 그냥 무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세권은 1920년대 북촌에 ‘개량한옥’을 개발해서 중하층 조선인들에게 싼값으로 공급했습니다. 일본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였던 조선인들이 고급주택을 살수는 없어 기존의 한옥을 규모가 작고 생활이 편리하도록 개량해서 공급한 것입니다.
그는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성북동, 혜화동, 창신동,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을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전통한옥마을로 알고 있는 북촌한옥마을이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익선동의 풍경은 모두 정세권이라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린시절 보았던 개량한옥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이 생각납니다. 혜화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저는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명륜동의 한옥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삼선교로 가는 길목에도 한옥들이 가득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근래 익선동이 힙한 카페들로 다시 뜨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무조건 새것보다 세월의 때가 묻은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살기 불편한 집이라고 다 밀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은 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닙니다.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 나라라고 명시되어 있고, 서울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호불호와 관련없이 일제강점기 때 이루어진 그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더구나 일반 시민들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일제시대 가옥과 공간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일제 유산 청산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밀어버리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처사인 것 같습니다.
일부라도 보존해 일제가 한국에 어떤일을 벌였는지 증거로서 남겨두어야 하고 그래야 잊혀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자비한 철거는 과거의 위정자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이들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3부에서 정세권이 안재홍과 벌인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이극로와 함께 동참한 조선어학회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소위 먹물이라는 지식인들이 노선투쟁이나 하고 뜬구름잡는 이론을 잡지에 내면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말아먹다가 정세권의 합류로 이 운동이 되살아나는 모습은 보기 상당히 안쓰럽습니다. 물산장려화관을 지어서 후원금으로 충당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정세권 사비로 건축비를 츙당했다는 에피소드는 지식인들의 ‘허위’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도 정세권을 ‘집장사’라고 폄하했다니 황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 의식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단순히 당시 신문기사 등 일차사료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정세권의 딸 아들 등 후손들과 직접 인터뷰해 당시 상황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현재 서울의 공간이 일률적으로 모두 아파트라는 공동주거형태로 재편되고 있는데, 과거 1970년대 이전,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인 일제강점기 서울의 주거형태가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과 그 이후 한국을 통치한 이들이 수도 서울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집장사라고 폄하되었던 정세권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것도 그래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1926년 완공되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에 의해 1990년대 초에 철거된 것 만큼 서울에 존재하던 수많은 개량한옥들이 1920-30년대 건축왕 정세권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한옥들이 필요에 위해 헐려나갔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정말 필요한 것이 맞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