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t: The Power of Passion and Perseverance (Paperback) - 『그릿 GRIT』원서
안젤라 덕워스 / Scribner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리학 책을 잘 읽지 않지만 상당히 화제가 됐던 책이라서 일독했습나다.

특히 이 책에서 자녀 훈육과 관련된 내용이 있어 특히 관심이 간 책입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심리학교수안 안젤라 덕워드의 첫 책이기도 합니다.

제목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책은 개인의 능력(Talent)보다 열정 (Passion)과 끈기(Perseverance)를 강조합니다.

열정과 끈기를 가진 사람은 자기가 하는 무엇이든 최소 1년이상 붙잡고 노력을 하는 사람으로 고난과 역경이 닥치고 실패를 하더라도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는 신중하고 의도적인 연습 (Deliberate Practice)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사람들이 전문가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시행착오와 시간이 필요하며 여기 잘 알려진 ‘10,000시간의 법칙’이 등장합니다. 구체적으로 초자에 경험이 없는 사람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최소 10년이상 10,000시간 이상 배우고 경험하고 실패를 경험하며 교정하면 그래도 어떤 특정 분야의 ‘전문가’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즉 타고난 재능으로 천재라고 불리는 경우가 실제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런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투지(Grit)을 키울수 있는데 스스로 배우며 깨닫는 내적인 방식과 좋은 멘토와 훌륭한 조직 그리고 투지를 가진 부모로 부터 훈련을 받는 외적인 방식이 존재합니다.

부모입장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으로 워킹맘으로 두딸을 키우는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이 부분에는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아이들을 ‘투지’있는 인간으로 양육하기 위해, 우선 무엇을 하든 일단 어려운 도전과제를 선택합니다. 즉 발레레슨을 받든 야구나 축구를 하든 실패를 해도 무조건 계약기간은 채워야 하며, 계약이 갱신될 때 아이들이 다른 선택을 하게 합니다. 적성을 찿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시도해보는 것이 필요하지만 실패하거나 못 따라간다고 중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적성에 맞는 분야를 시작하면 스스로 의도적인 훈련을 하면서 약점을 보완해가며 무조건 1년이상 지속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이 이 어려운 과제는 아이들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부모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부모는 아이들을 잘 보살피지만(supportive)한편으로 아이들에게 요구를 많이하는 (demanding) 부모로서 높은 수준의 능력에 대한 기대치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런 부모들이 여러 유명인들을 키워냈는데 저자는 여러 스포츠 스타들과 그 부모를 인터뷰해 주장의 신빙성을 올려줍니다.

열정을 가지고 끈질기게 목표를 나아가는 주제의 특성상 이 책에는 여러 스포츠팀과 선수들 관련 인터뷰가 나오고 여러 연구 내용이 광범위하게 제시됩니다.

첫 인상은 일단 굉장히 미국적이라는 점이고, 성공한 사람들의 심리적 요인과 그 달성에 필요한 요소를 후천적인 노력과 끈기로 규정하고 관련 심리학 연구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면서 타고난 ‘천재’ 또는 ‘지능’에 대한 ‘신화’를 깨는데 주력합니다.

따라서 최신 학계 동향을 담은 심리학 저서인데도 왠지 자기계발서의 냄새를 풍깁니다.

제 기준에는 그래서 실용서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려스러운 면은 노력과 끈기를 강조하면서 보이지 않게 ‘장시간 노동 ‘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고액연봉을 받는 스타 플레이어들이야 일반적인 직장인들과 입장이 다르지만 교훈적인 측면을 너무 강조하거나 ‘본보기’로 예를 들면 정당한 대가와 관련없는 무보수 야근을 강요하는데 이 논리를 끌어드릴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책머리부터 미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훈련방식과 문화에 대한 예가 나오고, 올림픽팀을 연구한 스포츠 심리학자들의 연구가 인용되는 등 여러 에피소드들이 ‘보수적인’시각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선택된 것으로 볼 여지도 충분합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심리학자의 주장이고 광범위한 서베이와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있다면 더 그렇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구성을 알려드리고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미국에서 2016년 출판된 책으로 본문만 277쪽에 달합니다.
총1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투지를 기르는 방법을 내적인 경우와 외적인 경우 두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에 소개된 ‘글쓰기’에 대한 시는 책의 주제와 관계없이 인용의 가치가 충분합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Te-Nehisi Coates의 글입니다 (pp276-277)

사진 참조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문 3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근대시기를 다룬 역사서입니다.

대중독자를 대상으로 했지만 한국 일본 중국의 사료를 직접 인용한 서술이 돋보입니다.

전체 책의 구성으로 보아 ‘약간 깊이가 있는 동아시아 역사 개설서’ 정도로 보는 것으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의 구성에 대해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책은 총 27장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내용을 포괄하는 책인데도 목차는 물론 원저자 내지 편자들의 서론도 빠져 있습니다. 상당한 내용의 역사서인데도 이런 황당한 역서의 구성체제가 책의 가치를 반감시켰다고 생각합니다 ( 이 의견은 제가 본 책에 한정된 것으로 제가 본 책이 파본이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출판 당시부터인지 아니면 소장 도서관에서 파본이 된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역자후기를 포함하면 400페이지 가량의 책인데 목차와 서문추가가 책의 분량에 부담이 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근세의 동아시아시대, 즉 16-17세기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말 청일전쟁이후의 시기를 다루며, 포괄하는 국가는 조선, 청, 일본을 포함해 러시아, 미국, 류큐, 타이완, 홋가이도까지 포함합니다.


전통적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국중심의 화이론 (華夷論)적 세계관이 대외관계로 나타난 책봉 (冊封)과 조공 ( 朝貢)시스템이 서구세력의 등장으로 서양식 조약관계에 따른 국제관계가 정립되어 가는 이행기를 19세기에 맞이하게 됩니다.

중국은 조선, 일본과는 책봉과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열강들과는 서양식 조약관계를 맺으며 국제법적 환경에 발을 들여놓지만 이원적 국제관계는 상당기간 지속됩니다.

중국의 이런 이원적 국제관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한 이후 완전히 청산되어 이후 중국의 국제관계는 조약 중심으로 바뀝니다.

한국은 전통적인 중국으로의 사대주의가 근대시기 조선의 발목을 잡은 중요 원인이 됩니다.

조선의 사대부와 개항기 지식인들은 조선이 중국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믿었고 이런 전통적 관계이외에 새로 생겨나는 국제법적 조약관계를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주장하며 조선의 ‘자주 독립’을 주장했는데 그 의도는 공식적인 청의 속국 조선에서 청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암묵적으로 알려져왔던 청과 조선의 종속관계는 19세기 말 일본의 대륙진출 야심이 구체화되면서 청이 명시적으로 종속관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에 주재했던 청의 고위관리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결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이전 당시 독립왕국이자 중일 양국에 속해 있던 류큐(琉球)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고 아이누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온 에조치(蝦夷地)를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홋가이도와 쿠릴열도를 일본영토로 사할린을 러시아 영토로 확정시킵니다.

거기에 청일전쟁을 통해 타이완을 할양받아 역시 식민지를 만듭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이전에 이미 류큐, 에조치, 타이완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청과 일본은 19세기 이후 러시아의 동진과 영국의 동아시아 세력 확장 그리고 미국의 북태평양 진출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연해주 지역을 비롯한 극동 지역에 진출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고 만주지역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해서 중국 북부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태평양 연안과 남극 등지에 이미 1840년대에 탐험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1820년대 당시 태평양에서 고래잡이 원양어업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1850년대 미국의 페리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청하는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또 다른 열강인 영국은 이미 식민화된 인도 대륙을 발판 삼아 동북아시아의 거점 지역인 말라카 반도에 진출해 교역로를 장악하고 중국과 아편 무역을 해 큰 이득을 챙겼습니다.

이미 동남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싱가포르 등 거점을 확보한 영국은 청과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섬에 거점을 만들고 중국 동남해안의 상하이, 광저우 등 항구에 조계를 설치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챙깁니다.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근대화와 공업화를 시작한 청나라와 메이지 일본에게 영국과 러시아는 경계해야 할 서구열강이었고 특히 메이지 일본은 청이 아편전쟁에서 지고 체제가 와해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이 두 유럽 제국의 향방에 촉각을 기울입니다.

특히 일본은 러시아를 조선과의 관계에서 특히 경계한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에조치(蝦夷地)에 속하던 사할린 땅을 러시아에게 방기(放棄)한 점이라든지, 조선의 명성황후가 친러정책을 펴서 일본의 영향력을 없애려 할 때 그녀를 살해한 점이라든지, 고종이 을미사변(乙未事變)이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을 하자 일본 조야가 충격에 빠지는 등 러시아를 극도로 경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청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제거하고 이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제거하면서 최종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합니다).

조선이 20세기 초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원인은 결국 사상적인 측면에서 조선의 ‘소중화(小中華)’사상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서인세력은 조선 중기에도 맹목적 대명 사대주의 (大明 事大主義)를 고수하고 당시 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이후 19세기 내내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안동김씨, 풍양조씨 가문으로 대표되는 왕의 외척 세력들은 조선후기 서인의 일파인 노론(老論) 벽파(僻派)를 대표하던 세력으로서 이들은 조선후기 국가 통치 시스템을 붕괴시켰습니다. 그리고 세계정세에 몹시 둔감했습니다.

정조 당시 이미 천주교 포교가 시작되었고 연행사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조선은 청과의 책봉관계에 얽매어 국제정세를 배우는데 소홀히 하고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청이 19세기 말에 조선이 청의’조공국’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은 이미 조선후기부터 조선이 청을 대해왔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격동기에 조선이 국제관계를 대처하는데 결정적 약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구나 청이 서양 제국의 이권침탈과 개방 압력으로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서양과 국제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황제권이 약화되고 지방 번벌세력들이 할거하면서 전통적 통치 체제가 무너져가는 동시에 ‘변법자강 (變法自彊)’ 운동과 같은 근대화 개혁이 시작되고 있을 때 조선은 매우 ‘피동적(被動的)’으로 근대화 개혁에 임하지 않았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도정치와 관련해서 ‘정조사후 63년 (창비,2011)’을 읽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세도정치의 시작부터 종말까 특히 조선후기 ‘성학론’과 ‘성왕론’을 둘러싼 왕과 사대부간 권력투쟁과 보수적 학자군주 정조 사후 그의 개인적 자질에 의해 유지되던 조선의 유교정치가 어떻게 외척에 의해 휘둘리게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구한말 고종시대 명성황후때까지 니어졌던 외척세력들의 정치 장악은 조선후기 마지막 100년과 그 이후 근대시기까지 그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책봉과 조공관계는 중국이 주변국을 고대로부터 어떻게 인식했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딱딱하기는 해도 ‘중국과 주변 (혜안,2009)’이라는 저작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1-02-26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소유하고 있는데, 제 책에는 미타니 히로시 나미키 요리히사 쓰키아시 다쓰히코가 쓴 머리말과 목차가 다 포함되어 있는데, 이상하군요

Dennis Kim 2021-02-26 15:45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빌려 책을 보았는데 서문 부분이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Redman 2021-02-26 16:28   좋아요 0 | URL
아이고 ㅠㅠ 누군가가 책을 훼손했나 보네요
 

현재 한국의 도시 모습은 식민지 시기 도시의 경관이 직접적으로 이어내려온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도시계획과 그 개발양상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인천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에서 기획한 이 논문집은 크게 두부분으로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과 조선에서 어떻게 도시가 계획되고 개발되었는지를 고찰한 전반부와 천황제 국가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고 식민지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국가신사를 지은 이유를 추적한 후반부로 나뉘어집니다. 물론 후반부에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어떻게 일제가 기념공간을 조성했는지도 추적합니다.

하지만 주목하는 부분은 4개의 논문입니다.

1. 1920년대 경성의 도시계획과 도시계획운동

2. 식민지 도시 인천의 도시계획과 도시공간의 확장

3. 조선신궁과 식민지 동화주의의 공간정치

4. 인천대신궁의 공간변용과 재인천 일본인


모두 일본보다는 식민지 조선의 공간변화에 관한 글로 특히 첫번째와 세번째 논문은 1910년 한일병합이후 서울의 공간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해방이전 서울의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줍니다.

한일병합이후 일제는 시구개정사업울 추진하는데 특히 경성의 경우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조선의 정치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한성부의 공간을 식민권력애 맞게 재조정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문명적 공간을 만들어 경성이 가진 정통성과 저항성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정권의 전시적 목적 이외에 한강의 수해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용산 일대의 치수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식민당국은 급격한 도시화로 경성에 조선인 빈민뮨제가 삼삭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경성을 식민지 수도로서 개조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식민관료들은 도시빈민문제를 도시의’미관’문제로만 바라보고 ‘복지’의 문제는 간과해 왔습니다. 이 불합리한 전통은 21세기 서울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20세기 초 일제 식민관료들이 빈민들을 도시외곽으로 집단이주시켰듯이 현재 한국의 관료들도 빈민들을 끊임없이 도시 외곽으로 몰아냅니다. 오랜 전통입니다.

이런 연유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전통적 거주지인 북촌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관사를 짓는 방식으로 이 곳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항하여 건설업자 정세권이 북촌에 소형개량한옥을 대량으로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정세권의 개량한옥건설사업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201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궁궐등 공유지에 관사를 짓고 총독부와 같은 공공건축물울 지으며 북촌을 침탈해 온 일제를 당시 건축업자인 정세권 선생이 어떻게 이들의 공간침탈을 막았는지 보여줍니다. 익선동과 북촌의 개량한옥촌의 숨은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식민관료들은 1920년대 내내 ‘대경성’이라는 허황된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탁상공론으로 일관했으며, 도시계획운동에 따라 도시계획의 법제화의 계기는 마련했으나 실제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고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해 식민지 동화정책을 본격화할 뿐 조선의 도시빈민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1920년대 실현되지 못했던 경성도시계획은 1934년 <경성시가지계획령>과 1936년 <대경성계획>으로 그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일제가 경성도시계획을 세우면서 도입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부의 ‘강남개발사업’에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한국이 일제의 영향을 해방이후에도 받았었다는 실례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일제 만주군 출신 전직 대통령은 본인이 일제 강점기 얻은 지식을 해방후 그대로 적용한 겁니다.

일제는 경성의 남산 아래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었던 충무로와 명동 그리고 남산에 그들만의 공간을 조성합니다.
개항이후 최초의 일본영사관도, 그리고 조선통감부도 남산아래 있었고 일본인들이 건립한 최초의 신사인 경성신사 ( 또는 남산대신궁)도 조선 거류 일본인들이 남산에 지었습니다.

이후 1930년대부터 본격화되는 식민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신사를 남산에 건립하기 시작해 1925년 조선신궁을 완공합니다.

이미 을사늑약이후 최초의 현충원이던 장충단을 파괴하고 신사를 건립한 일본인들은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해 일본색을 강하게 남산에 이식합니다.

일제는 1930년대들어 적극적 황민화정책을 시행해 강제적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창씨개명 등을 단행합니다.

조선신궁이 초기 단순한 통합의 장소로서 기능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해서 집단의례를 통한 대중동원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됩니다.

조선신궁은 1940년대 일제 말기 일상생활에 엄숙주의와 금욕주의를 강요하면서 식민지 전체를 집단적 규율화로 몰아가는 전시체제의 공간적 거점이었습니다.

따라서 해방이후 이 공간들이 그동안 억압받아온 조선인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파괴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국가신사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경성 공간통치, 특히 대표적 관가인 광화문 일대의 공간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한 책이 이순우 작가의’광화문 육조앞길(2012)’입니다. 조선 말기 이후 한양의 육조앞길이 어떻게 일제의 경성부 ‘광화문통’이 되어가는지 특히 북촌지역의 변화를 위주로 상세히 추적한 책입니다.

일제 패망이후 조선을 ‘점령 (occupied)’한 미군정당국은 광화문통의 조선총독부 중앙관가를 사실상 그대로 유지한 체 미국대사관을 이 자리에 건립합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은 일본 땅이었고, 일본이 점령된 상황에선 한국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팩트는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앞으로도 구한말이후 시작된 서울의 공간변화가 현재에 미친 영향을 지속적으로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현재 상황을 알려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도 과거를 추적하기 위한 최근 특히 해방 이후의 자료는 찿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요즘 1980년대 말 1990년대에 발행된 책을 찿아보려 하지만 겨우 30여년 밖에 안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록에 대해 사람들이 무심하다는데 매우 놀랐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겠지만 아무튼 충격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쩰’이라는 생소한 러시아말의 의미는 281쪽 에필로그에서 언급됩니다.

282쪽에 달하는 연구서에서 저자는 1890년대 말 일어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기의 조선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만큼’ 심한 ‘눈보라’의 시기로 표현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전 1894년 갑오경장과 1882년 임오군란까지 있었으니 정말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격동기였습니다.

그래서 ‘미쩰’의 시기라는 표현은 문학적이지만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9년전인 2012년 출판된 이 책은 메이지 일본의 명성황후의 암살과 그로인해 발생한 고종의 러시아대사관 파천(播遷), 즉 임금이 피난하는 일이 발생한 격변기를 다룹니다.

기본적으로 고종시대의 정치사이자 외교사를 다룬 책으로 이전까지 한국학계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러시아의 사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해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했다는 점이 이 연구의 의의라고 생각합니다.

을미사변이 친러파로 알려진 명성황후 민씨를 매이지 일본이 제거한 사건이고 당시 상황을 조선에 주재했던 일본 뿐만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이 주시하고 있었던 정변(政變)이라는 점에서 일본, 한국의 사료뿐만 아니라 각국의 사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데 을미사변을 너무 일본측 자료에 의지해 설명해 온 것이 기존 연구의 한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아관파천은 명성황후가 암살당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정변입니다.

일본정계와 외교가에 충격을 준 이 사건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감소하였습니다. 고종은 유럽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외교 및 군사관계 문서를 보는 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주로 인용된 사료들을 주로 일본 측 사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1990년대 러시아와 수교를 하고 러시아 문서의 접근이 가능한데도 한국에서 러시아 문서 관련 연구가 그리 많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추정합니다:

첫째, 근대사 연구자들이 일본의 영향력을 기본으로 생각해 최우선으로 일본자료를 우선 고려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직접적 영향을 받았으니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선학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둘째, 비록 한러수교를 하고 러시아 문서에 접근이 가능해도 실제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연구자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한국풍토에서 러시아 자료 접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이미 개항기 이래 조선에 러시아어 통역관이 존재했었지만 일제 해방 후 상당 기간 남한에서 러시아 관련 발언 자체가 금기시되어 상당 부분 러시아 관련 연구도 영미권 연구의 번역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와 직접 연관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 대한 연구도 러시아 사료의 직접 이용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합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고종은 전근대적 왕권주의자로서 전통적인 ‘절대왕권’을 추구한 군주로서 비록 조선에 서양의 문물을 도입하고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지만,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구미열강과 러시아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던 인물이지만 절대 근대적 인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관파천이후 왕권강화를 위해 보수적인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의 김병시를 기용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집니다. 당시 친러파로 을미사변 관련자를 체포하며 영향력을 확대해오던 법부대신 이범선은 이후 주미공사로 임명되며 조선정계에서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고종은 이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활동이 자신의 왕권강화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이들을 탄압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이런 행동들은 왕권강화로 정국이 안정될 것으로 믿었지만 결국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어떤 논의도 하지 못한체 정치변화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결과를 맞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성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고종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상반되는 건 그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을 유지하려 애썼는데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절대왕권만을 추구해 상황과 인식이 맞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관파천에 대한 본격적 연구서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청계,2017)’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갑오경장을 ‘갑오왜란’으로 아관파천을 ‘아관망명’으로 재해석한 책입니다.

친일개혁세력들이 일본의 힘을 빌어 근대화를 이루려 한 것으로 알려진 ‘갑오경장’을 16세기 임진왜란에 이은 제2의 임란으로 인식했고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파천을 사실상의 ‘국내망명’으로 인식한 책으로 역사를 보는데 해석과 시각의 중요성을 일깨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연구자 김영수씨는 아관파천관련 저서를 한권 더 출간했는데 본서와 비교해서 어떤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시간이 되면 읽어볼 예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 중 한분인 정세권은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 경성에서 활약하신 부동산 디벨로퍼( Real Estate Developer)입니다.

부동산 디벨로퍼란 말 그대로 토지를 싼값에 사들여 그 토지를 시장 활황시 그대로 매각하거나 그 토지에 건물을 지어 부사가치를 올린후 그 건물을 매매하거나 임대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자를 말하지요.

2017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경민 교수가 쓴 이 책은 200여 페이지 내외의 짧은 책이지만 흔히 ‘집장사’로 폄하되어온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의 일생을 당시 신문기사, 정세권의 아들, 딸, 외손녀 등 후손들을 인터뷰해 다시 재구성하고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을 재조명한 책입니다.

도시공간이나 도시의 역사,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 분야가 토지의 경제적 측면을 보는 부동산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한국에서 이런 부분에 촛점을 맞춘 경우는 이 책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읽었던 김시덕교수의 ‘갈등도시 ( 열린책들,2019)’에서 이 책을 처음 소개하셨고, 현재의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최근 일독을 한 것입니다.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된 이책의 1부와 2부는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과 1920-30년 당시 경성의 일본인 진출상황에 관련된 내용이고 3부는 정세권이 본업인 부동산 개발 이외 참여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후원 관련된 내용입니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숭리한 이후 사실상 서구의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지배를 공인받고 인천지역인 현재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에 진출하여 남산 아래 통감부를 세우고 최초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꾸고 조선신사를 세우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마련하여 사실상 남촌을 장악했습니다.

‘명동길거리문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2019)’에서는 일본인의 남촌 정착과정과 명동에서 일본 백화점들이 진출해 일제시대 어떻게 이곳이 소비의 중심으로 떠올랐는지 그리고 당시 명동의 메이지좌 ( 현재 명동예술극장)가 북촌의 조선인과 남촌의 일본인을 관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처음에 명확하던 남촌의 일본인 관객과 북촌의 조선인 관객의 경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분명해지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조선과 일본의 관객들이 남촌과 북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불분명해지는 것은 이 당시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과 무관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에 완공된 것을 기회로 일제는 여기서 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관사를 짓는 수법으로 지금의 북촌과 서촌일대 그리고 서소문 경희궁을 비롯한 관화문 주위의 ‘북촌지역 ‘에 그들의 거주지를 확대해 갑니다.

광화문 일대 관청가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이순우 작가의 ‘광화문 육조앞길 (하늘재,2012)’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소위 서양식 ‘문화주택’의 개발에만 집중하고 조선인 중하층 인구에 대해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아 토막민(土幕民)으로 불리는 영세민들이 열악한 토굴과 같은 오두막에 사는 등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사회갈등의 요인이었는데도 일제는 그냥 무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세권은 1920년대 북촌에 ‘개량한옥’을 개발해서 중하층 조선인들에게 싼값으로 공급했습니다. 일본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였던 조선인들이 고급주택을 살수는 없어 기존의 한옥을 규모가 작고 생활이 편리하도록 개량해서 공급한 것입니다.

그는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성북동, 혜화동, 창신동,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을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전통한옥마을로 알고 있는 북촌한옥마을이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익선동의 풍경은 모두 정세권이라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린시절 보았던 개량한옥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이 생각납니다. 혜화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저는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명륜동의 한옥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삼선교로 가는 길목에도 한옥들이 가득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근래 익선동이 힙한 카페들로 다시 뜨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무조건 새것보다 세월의 때가 묻은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살기 불편한 집이라고 다 밀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은 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닙니다.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 나라라고 명시되어 있고, 서울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호불호와 관련없이 일제강점기 때 이루어진 그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더구나 일반 시민들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일제시대 가옥과 공간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일제 유산 청산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밀어버리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처사인 것 같습니다.

일부라도 보존해 일제가 한국에 어떤일을 벌였는지 증거로서 남겨두어야 하고 그래야 잊혀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자비한 철거는 과거의 위정자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이들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3부에서 정세권이 안재홍과 벌인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이극로와 함께 동참한 조선어학회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소위 먹물이라는 지식인들이 노선투쟁이나 하고 뜬구름잡는 이론을 잡지에 내면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말아먹다가 정세권의 합류로 이 운동이 되살아나는 모습은 보기 상당히 안쓰럽습니다. 물산장려화관을 지어서 후원금으로 충당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정세권 사비로 건축비를 츙당했다는 에피소드는 지식인들의 ‘허위’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도 정세권을 ‘집장사’라고 폄하했다니 황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 의식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단순히 당시 신문기사 등 일차사료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정세권의 딸 아들 등 후손들과 직접 인터뷰해 당시 상황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현재 서울의 공간이 일률적으로 모두 아파트라는 공동주거형태로 재편되고 있는데, 과거 1970년대 이전,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인 일제강점기 서울의 주거형태가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과 그 이후 한국을 통치한 이들이 수도 서울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집장사라고 폄하되었던 정세권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것도 그래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1926년 완공되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에 의해 1990년대 초에 철거된 것 만큼 서울에 존재하던 수많은 개량한옥들이 1920-30년대 건축왕 정세권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한옥들이 필요에 위해 헐려나갔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정말 필요한 것이 맞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