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일문학을 배우고 응용언어학을 공부한 미국인 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씨가 ‘한글’로 쓴 도시탐구기입니다.

서울출생으로 도시에서만 살아온 도시인으로서 도시의 여러 인문지리적 현상에 대해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책은 범주를 굳이 나눈다면 인문학자가 쓴 도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학 ( Urban Studies)이나 건축 (Architecture)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평소 살아온 경험이나 인문학적 감성 그리고 이 저자가 보여주는 평소의 식견으로 충분히 훌륭한 도시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유사한 범주의 책을 읽었는데 서울의 일반 서민들의 살아온 흔적을 답사한 김시덕 작가의 서울 답사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서지학과 전쟁사를 전공한 김작가는 ‘서지학적 방법론’을 도시답사에 적용해 서울과 그 위성도시들, 서울과 경인지역의 관계를 일제시대까지 소급해 살폈습니다 ( 서울선언, 2018 & 갈등 도시,2019)

이 책의 미덕은 이전에 문화재 위주로 조선시대 유적위주로 행해지던 도시답사를 근현대 시기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현재의 서울에 맞춰 현재 서울의 공간을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 연관지어 바라본 것입니다.

파우저씨의 책은 서울을 포함한 한국의 도시뿐만 아니라 저자가 살았거나 인연이 있어 자주 방문했던 영어권의 도시들과 일본의 도시를 대상으로 합니다.
제가 인상깊었던 도시를 꼽자면 일본의 가고시마와 아일랜드 더블린입니다. 두 도시는 공교롭게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도시들입니다.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는 고립된 규수 남부 지방도시이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나온 특이한 지역으로 젊은이들이 지역에 남아 일원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더블린은 저자가 언어학 박사학위를 공부한 곳으로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학가 제임스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고향이자 아일랜드의 수도입니다. 영연방이지만 잉글랜드와 다른 독립국가이고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로 아일랜드어를 잃어버리고 영어를 쓰는 국가입니다.
영국이 아일랜드 지배를 위해 16세기에 더블린에 트리니티 컬리지 (Trinity College Dublin)를 세우고 영국에 협력할 수 있는 지배층을 양성했다는 사실은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 양성을 위해 경성에 제국대학을 세운 일제의 모습과 겹칩니다. 일본이 영국의 정책을 모방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특히 각 도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는 도시화와 재개발, 그리고 도시 재생의 문제를 상당한 전문가적 식견으로 설명합니다.
도시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저자가 살아온 여러 도시에서의 삶과 저자가 느낀 점을 적은 에세이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는 공간과 도시의 경관이 정치인들의 의지에 따라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삶의 공간과 결부되어 기억되는 추억과 경험이 얼마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각 도시에 얼마나 괜찮은 헌책방이 존재하는지 이 책에 잘 나와있습니다.

사람들의 삶과 그 공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각 도시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이렇게 펼치기 여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자가 서울에 거주할 당시 한옥에 살면서 서촌의 한옥보전운동을 한 적이 있는데, 도시개발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영향을 주고 역사의 시간이 쌓인 공간을 배려하고 보존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반드시 경청해야 할 주장입니다.
부동산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토건세력들과 그에 결탁한 기득권층이 부동산으로 불로소득을 얻고 그 구조가 당연시되는 마당에 원주민의 기존의 삶을 보장하고 공동체의 편익을 위해 도시재생을 하고 재개발을 해야한다는 주장은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외국도시들의 사례를 통해 가능성을 입증시킵니다.

이익을 추구하려고 역사의 흔적을 망치는 우를 또 범해서야 될까요?

서울시장으로 두번째 당선되신 오세훈씨가 MB 시절 진행했던 종로 재개발은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개발 중 하나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건너편에서 시작되던 ‘피맛골’의 옛 흔적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고층 ‘쇼핑센터’가 자리잡아 서울이 아니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상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당시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던 독특한 피맛골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이유는 역사보다 이익만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이외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토건 원류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 개발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지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이 개발로 청진동의 옛모습도 모두 사라졌죠.

조선시대 500년은 현재 서울 사람들과 아무 연관도 없는데도 보존한다고 난리면서, 왜 직접적인 연관이 있던 피맛골, 청진동의 흔적이 사라지는 건 괜찮은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한국이 20세기 초부터 경험한 일제시대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 기억해야 할 그 시대 서민의 역사가 그 시대의 건축양식이 단지 ‘왜색 ( 倭色)’ 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헐리는 것은 반대합니다.

부끄럽기 때문에라도 당시 흔적을 알리고 교육해야 하므로 보통사람들이 그 당시 어떻게 살았나 알기 위해서라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싫어도 눈에 보여야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흔적을 없애려는 세력은 돈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제에 부역한 적이 없는지도 의심해야 합니다.

범죄자가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아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의 결과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자 파우저씨는 애호가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의 사진가로 알려졌는데, 그의 도시공간에 대한 관찰은 그가 사진을 찍으며 평소 공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서 나온 결과로 보입니다.

사진가는 당연히 자신의 파인더로 보이는 풍경과 피사체에 애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장소는 무수히 방문하게 됩니다. 같은 장소도 아침과 저녁에 다르고 여름과 겨울이 다르며 눈이 오거나 비가 온후와 그냥 활짝 개어 있을 때 다릅니다.

더구나 좋아하는 공간과 경관이 재개발이나 도시재생으로 바뀌게 된다면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육안으로 관찰하는 행위는 피상적일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매우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것으로 내공이 깊어지면 단순한 논리 이상을 꿰뚫는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관심은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의 특징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매우 예민한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이 책에 포함된 사진 상당수가 저자가 오래전부터 직접 찍어 장소를 기록한 사진들이고 글과 함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과거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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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된 시간 -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학술총서 27
계승범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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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부터 1907년까지 약 200여년의 조선후기 시기 대보단((大報壇)이라는 제단에서 명의 삼황제에게 의식을 올리던 조선 지배층들의 의식의 변천사를 연구한 책입니다.

서강대 사학과 계승범 교수께서 2011년 쓰신 책입니다.

이책의 핵심적인 단어 하나만 고르라면 바로 존명의리(尊明義理), 즉 명나라를 존경하고 의리를 지킨다라는 말입니다.

다른말로 제조지은 (再造之恩)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이말의 뜻은 (임진왜란으로부터) 명나라가 조선을 지켜준 은혜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기보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수긍하는 편이지만, 오늘의 주제는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려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 후기 양반지식인들의 두 믿음은 사실 ‘이상하다’ 내지 ‘병적이다’라는 평가말고 다른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대보단의 의미도 (이미 망한) 명나라에게 큰 보답 (大報)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라는 의미입니다.

1704년 중국의 중원은 이미 만주족의 대청국(다이칭구룬; 大淸國)이 지배하고 있었고, 조선은 병자호란의 패배로 이미 청에게 삼전도에서 항복(1637)을 했습니다. 명나라는 청에 의해 1644년 멸망했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불 때, 아무리 명나라의 은혜로 나라를 구원받아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1644년 망한 명나라를 60년이나 지난후부터 조선의 궁궐인 창덕궁에 제단을 만들고 왕이 친히 200여년이나 제사를 지내고, 더구나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침탈이 시작되고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도입되는 시기까지 이 제사가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계승범 교수께서도 이런 제사는 세계사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이런 이례적 의례의 정치적 함의는 왜 이 책의 제목이 ‘정지된 시간’인지 알려줍니다 .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 양반들은 명에대한 화이론(華夷論)과 존주론 (尊周論)적 대외관계론과 세계관이라는 관념적 세계에서 단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체 1644년 이후 그대로 멈춰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지된 시간’입니다. 이미 현실은 1664년 이후 오랑캐인 만주족이 중국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이전 병자호란의 결과 삼전도에서의 항복으로 청과도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수립하고 중국의 왕조로서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하고 있었는데도 조선의 지배층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사대부 지배층은 이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그들의 ‘무능’을 검증받은 셈이었습니다.

무능한 사대부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머리 속의 관념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희의 유학인 성리학만을 신성시하며 유학의 다른 유파인 양명학조차 경원시하던 양반 사대부들은 사실상 호위호식하며 아무 생산활동도 안 한체 모든 부담을 양민들과 농민들에게 지우고 있었습니다.

같은 양반이라도 기호지방이나 영남출신만 출사의 기회를 가졌고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은 지역적 차별을 받았습니다.

무인을 천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니 생산성이 올라갈 리 없고 국방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평양으로 의주로 달아가기 바빴고 심지어 명나라에 망명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일본과 명은 조선의 통치력 부재를 틈타 조선의 분할을 가지고 외교교섭까지 벌였습니다.

조선이 명에게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국방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국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양반들은 임진왜란에서 명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나라를 지킨 은혜 ( 재조지은, 再造之恩)’라고 명을 다시 떠받드는 어처구니 없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특히 성리학의 노론(老論)계통이 이런 생각을 교조적으로 밀어붙인 장본인들입니다.

조선시대 송자(宋子)로 불린 송시열(宋時烈)이 현대에 와서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 황당한 믿음과 생각을 조선지배층에게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노론 성리학자들의 폐단은 단지 17-18세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정조 사후 19세기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주역이 되어 조선의 정치 경제를 망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순조이후 임금들이 사실상 척족세력에 휘둘려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19세기에 수많은 민란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노론 성리학 지배층들이 국정을 100여년간 농단했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의 사익을 위해 국가의 통치구조를 와해시키고 공권력을 가지고 사익추구를 했으니 국정농단 말고 다른 말을 찿기 힘듭니다.

즉 이들은 교조적이고 완고한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세계에서 고립시키고 국가의 통찰력을 사적으로 이용해 본인들 배를 불린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국가가 힘이 없고 군사력이 약하면 어떻게 이를 양성하고 더 강하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아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런 실질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명나라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고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실제 청으로부터 국왕의 책봉을 받은 외교현실을 그들이 오랑캐라는 아유 하나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조선이 20세기 초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미 16세기 임진왜란때부터 그 씨앗이 있었고 병자호란 이후 더 확고해졌다고 확인하는 건 참 씁쓸합니다.

일단 조선의 사대부가 결국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들을 더 알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리 의리가 중요하다고 해도 타국에서 망한 나라의 제사를 자그마치 200여년간 지내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이상한 것이고 성리학자들이 와 병적으로 이런 행위에 집착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심없이 조선의 지배층을 바라보려 해도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허우적거리면서도 기득권은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계몽절대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사실 과거와 존명의리에 집착한 보수적 절대군주였다는 주장입니다. 정조는 성리학적 지식에 통달한 성리학적 철인군주이만 계몽적 절대군주는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하십니다.

서양사에서 계몽주의 (enlightenment)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 지역의 절대군주를 뜻하는 계몽절대군주라는 개념은 성리학적 전제군주인 정조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정조시대를 과장되게 근대의 길목으로 보는 건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조가 존명의리(尊明義理)를 철저히 숭상하고 대보단의 의례를 국가의례로 확립했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정조 때 일어난 북학 (北學)파는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을 하는 일군의 학자들인데 저자는 그들이 소수였다고 주장하십니다. 저도 여기 동감합니다.

명이 멸망한지 100년이 넘도록 ‘재조지은’과 ‘존명의리’를 핵심적 세계관으로 믿고 있는 주류 사대부들이 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북학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이후 북경에서 많은 서양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사행(使行)을 통해 일부 양반들이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할 수 있었지만 교조적이고 완고한 성리학자들은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하게 망한 명나라와의 의리만을 지키는 행보를 지속했습니다.

이책은 조선 양반지배층의 세계관이 현재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당히 병리적 (病理的,pathological)인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반들이 지배층이면서도 통치의 기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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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발간 당시 이전의 전통적 시각과는 다른 접근법 (approach)로 주목을 받았던 책입니다.

1980년대에 출생한 저자들이 한국은 더이상 선진국을 롤모델로 발전을 추구하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지난 60여년의 경제발전 전략과 지난 40여년 간 축적된 민주화 경험으로 신흥 선진국으로 들어섰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일본의 설비와 기술을 들여오고 미국의 원조와 정책조언을 받고 시작한 산업화와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시작한 민주화운동이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1997년 김대중 정권의 시작으로 정치적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후 1930년대 생으로 대표되는 ‘산업화 세력’과 1960년대 생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이 사실상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이 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이책은 ‘586세대’를 현재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고착시킨 세대로 인식하고 이들이 권력을 장기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한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를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책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가 서로 반목하고 서로의 공울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양국화된 양당정치가 고착되어 이 두 세대 이후 후속세대들이 목소리를 낼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진단합니다.

이책의 p85-86에는 출생연도별 인구통계가 나와 있는데 산업화세대 인수가 약 15백만, 베이비부머 약 9백만, 민주화 세대 중 대졸자가 약 7백만, X세대 9백만, N세대(1980년대생)약 7백 2십만, 그리고 민주화 2세대 (1990년대생). 6백 8십만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업화세대의 경우 이미 은퇴를 했고 생물학적 사망 등으로 많은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퇴장하였는데도 다른 젊은 세대들보다 인구수에서 압도적입니다.

반면 지난 1970년대 이후 지속된 가족계획정책의 영향으로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1990년대 생의 경우 7백만이 체 되지 않을정도입니다.

1990년대까지 가족계획정책을 너무 오래 지속해서 현재와 같은 고령화된 인구구조를 한국사회가 가지게 되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선망국’으로 보는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의 주장( 선망국의 시간, 사이행성,2018)에서 빌어온 7장은 한국 제조업의 자동화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자동화와 AI의 위험에 현재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이유는 ‘선망’, 즉 미리 망한다는 의미인데 풀면’한국이 매를 먼저 맞았다’는 의미로 한국의 노동자들은 이미 1987년이후 대기업의 자동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이미 공장들이 자동화 될만큼 다 되어 위험이 적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한국의 정규직 노조들과 대기업간의 ‘적대적 노사관계’가 원인이라고 하는데 기업가들이 전투적 노조들과의 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일찍부터 자동화 투자를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소위 기득권으로 불리는 이들 정규직 노조원들이 정년퇴직으로 퇴사할 시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장의 아쉬운 점은 회사측의 정규직 노조 대응전략을 주로 다루었지만 상대적으로 기업가들과 전문경영자들의 생산성에 대해 언급을 전혀 안한 점입니다. 결정권자로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이론적으로 최종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이니 리스크가 큰걸로 봐서 고액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차이가 약 100배정도나 되는 건 맞는 것인지, 그게 공정한 것인지 말입니다.

이책에서 기득권으로 지칭되는 정규직 노조원들은 잔업수당까지 포함해서 연봉 1억정도 받는 이들을 말하는데, 최고경영자들 중에 최소 이들 연봉의 10배 이상을 받고 삼성의 경우 이보다 연봉이 더 클것으로 보이는데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아 의아했습니다.

다음 관심을 끈 주장은 9장 ‘기적의 재구성’입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소수의 독재자와 엘리트들의 공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한국의 우파에서 이승만을 국부로 박정희를 한국을 빈곤에서 탈출시킨 위인으로 보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박정희가 1960-70년대 실시했던 경제개발정책과 도시화 정책은 그가 1930-40년대 만주국에서 보고 체험한 정책을 한국에서 그대로 다시 진행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급속한 근대화의 기원이 만주국이라는 주장으로 한석정교구의 ‘만주모던(문학과지성사,2016)’에 상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1980년대 시장주의적 경제정책을 주도한 김재익 논쟁을 언급하면서 1997년 IMF사태이후 주류가 된 줄 알았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원이 사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서 실시한 ‘경제안정화 정책’이라는 몰랐던 사실을 소환합니다.

1979년 10.26이후의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 대처와 ‘안정화정책’은 전 국무총리 신현확의 회고록에도 일부 언급됩니다.

IMF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씨가 당시 김재익씨와 시장주의 경제를 추진하던 신흥관료였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마지막으로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가 주장한 ‘벼농사협업체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집단주의, 협업속의 경쟁, 비교와 질시의 문화의 요소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한 훌륭한 설명방식이 될 수 있다고 긍정합니다.

전근대 한국의 사회가 소농위주로 만들어진 사회였고 꼭 해양세력( 일본과 미국)의 문명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내재적인 경제발전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뉴라이트와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한국이 열등한 비문명국이라는 믿음을 기본전제로 하고 미국과 일본 등 해양의 서구세력들만이 ‘문명’이라고 본 자학적 사관과는 정반대의 주장인데 아직도 이런 서구중심적 생각을 하고 계신 소위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데 놀랐습니다.
여러모로 이승만학당의 이영훈 교수와 그 학파들이 초심을 잃고 망상적 주장을 하는 건 안타깝습니다.

이 벼농사협업체계에 대해 얼마전 이철승 교수께서 신간(쌀,재난,국가,문학과지성사, 2021)을 내셨는데 읽어볼 후 리뷰를 남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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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10-05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정희와 만주국 관련으로는, 강상중의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라는 책도 읽아볼 만합니다

Dennis Kim 2021-10-0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소개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되면 읽어보겠습니다.
 
춘추전국이야기 2 - 영웅의 탄생 춘추전국이야기 2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태항산 (太行山) 에 자리잡은 산악극가 진(晉)이 관중의 제(齊)나라에 이어 어떻게 두번째로 춘추시대의 패자가 되는지를 설명한 책입니다.

1편과 마찬가지로 춘추시대의 배경이 되는 자연지리의 영향력과 고대 중국의 전쟁과 정치의 변화양상을 추적합니다.

어려운 중국역사서와 여러 경서를 인용하는 점도 1권과 동일합니다.

제환공(齊桓公)과 관중(管仲)의 정치와 진문공(晉文公) 정치의 차이는 진문공이 첫번째 패자보다 군국주의자(軍國主義者)의 면모가 강해 경제적 이득과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관중은 준비가 되지 않고 명분이 없으면 절대 전쟁을 하지 않았고 패권을 잡는 목적이 침략이 아니라 영향력 확대였습니다.

하지만 진문공은 열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진나라의 경제적 역량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중원(中原)에 진출해 비옥한 농토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성안의 국인(國人)으로 한정되던 전쟁 참여인원도 당시 태항산 근처에 중국인들과 섞여 살던 융(戎)인의 참여로 양상이 변해갔고 점차 도성 밖의 야인(野人)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쪽으로 바뀌어 갑니다.

야인(농부)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던 양상이 점점 전쟁이 격화되어 전쟁참여의 방향으로 진화합니다.


진헌공(晉獻公)사후 19년간이니 외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던 중이(重耳)는 초(楚)나라를 거쳐 관중평원을 장악한 서쪽의 맹주 진(秦)나라의 진목공(秦穆公)의 도움으로 진나라의 통치자가 됩니다.

아직 무지막지한 전국시대가 도래하기 전이라 무자비한 살육은 없었지만 진문공은 초기 군국주의적 절대군주로서 신하들에 대한 신상필벌 (信賞必罰)에 무척 엄격한 면모를 보입니다.

또 자신이 오랜 망명생활과 고난을 겪어 인재의 중요함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통치자입니다.

자신의 모자람과 부적합으로 끊임없이 반성하는 동시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가졌든 상관없이 등용했습니다.

첫번째 춘추의 패자인 제환공이 전적으로 관중의 정치에 의존해 국가를 통치했다면 진문공은 훌륭한 인재들의 인력풀을 가지고 적절하게 리더쉽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중국에서 전통적인 전제주의적 봉건적 정치체제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항산에 자리잡은 진(晉)은 서쪽의 진(秦)과 연합하여 남쪽의 강자인 초(楚)의 중원진출을 저지합니다.
초나라는 진문공 이전부터 중원으로 세력을 넓히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만 춘추 초기 진진초제 (秦 晉 楚 齊 ) 4국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후 더이상 북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초와 서쪽의 진과 동쪽의 진이 맞서 싸운 이 전투를 성복대전(城濮大戰)이라고 합니다.

진문공은 이 전투 이후 중국 남부의 강자 초나라를 제압하고 서쪽의 진나라와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중원을 장악하는 패권국이 된 것입니다.

서쪽의 진과 동쪽의 진은 동쪽의 진이 춘추의 패권을 잡은 이후 다시한번 전투를 벌입니다.

진문공 사후 진목공(秦穆公)은 중국의 서쪽의 관중평원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원을 향해 동진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관중평원 동쪽 끝에서 진(晉)과 일전을 벌이고 패하게 됩니다. 효산(殽山)에서 맞붙은 두나라는 진(秦)의 대패로 끝나고 진나라 병사들은 이 전투에서 거의 몰살을 당했습니다.
적을 섬멸시키는 목적의 전투로 중국사에 최초로 기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책에 공감되는 문장이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고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의 절반은 사실 전쟁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의 이면을 들추다 보면 고대사를 결정하는 요인, 심지어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힘까지 볼 수 있다.” (제15장 문공이 패자의 길을 보이다,p251)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역사를 읽게 되면 필연적으로 정치를 만나게 되고 정치는 필연적으로 전쟁과 연결됩니다.

국제관계도 국내정치도 모두 먹고 사는 것과 관계되고 리더가 사회를 또는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와 관계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었던 고대에는 전쟁에 대한 기술이 역사를 기록하는데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왕조의 교체가 빈번했던 중국의 경우 전쟁의 역사가 곧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서주(西周)시대 이후 정립되어 주나라의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들의 관계를 말하는 사대(事大)-책봉(冊封)관계는 춘추전국시대와 중국의 통일왕조시대를 거치며 조선과 일본 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관계의 기본을 이룬 것입니다.

근세이후 조선이 제후국으로 중국에 사대하고 중국은 화이론(華夷論)애 입각해 본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독특한 외교관계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19세기 제국주의 서양열강들이 동아시아에 조약체계를 강요하기 전까지 중국문화권은 천자-제후를 중심으로 하는 고유의 외교관계를 이어왔고, 중국이 유목제국인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가서도 이 체제는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춘추 초기 중원의 중국인들은 정주농경과 유목을 병행했던 서북쪽의 융(戎), 그리고 북쪽의 적(狄)과 상당한 교류와 함께 전쟁도 있었고 춘추의 또다른 강자 진(秦)은 춘추이전 시대 사실상 서쪽의 융의 한일파로 알려졌다는 점입니다. 진은 중국의 사서에 진융(秦戎)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秦)이 오랜기간 서쪽의 유목민족들과 전쟁으로 단련되어 춘추의 패자를 노리고 결국 그들의 군사력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하기 된것이 중국사에 끼친 유목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랑캐라고 멸시를 받아왔고 이들의 흔적을 찿기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지만 문화가 없다고 그냥 무시하는 건 지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漢)이 통일 왕조를 이루었을 당시 북쪽의 흉노(匈奴)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기마궁수이자 유목민족인 흉노와 위에서 언급한 진(秦)나라 주변에 살던 서융 (西戎)의 무리들은 동일한 종족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기록을 보면 오해할 소지가 상당하기 때문에 저자가 갈조했고 더구나 융(戎)과 적(狄)이라는 말이 특정민족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합니다.

고대의 유목민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아직도 많아 오해를 줄이는 것이 역사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아무튼 책이 기원전 7세기를 이야기하고 있고 아직도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21세기 한국에서 이책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마치 무협지를 읽는 듯 하면서도 철저히 사서의 기록과 다른 기록들을 모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하는 건 분명 보통의 내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책 시리즈를 다 읽으면 이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춘추좌전>,<사기>,<국어> 등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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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쪽이 되지 않는 작은 책입니다.
2017년 출판된 책으로 재야사학자이신 이이화 선생께서 쓰셨습니다.

몇해전 돌아가셨으니 선생의 후기저작이고 연구서라기보다 입문서에 해당됩니다.

19세기 조선말부터 을사조약 당시까지 조선의 하층민들과 농민들이 지배 세력인 양반 유림 (儒林)에 어떻게 저항해왔는지 일별할 수 있습니다.

정조사후 1800년대부터 집권한 문벌(門閥)세력, 다른 용어로 세도정치( 勢道政治)가문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그리고 고종이후 신흥 문벌인 여흥 민씨 세력들이 조선의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을 수탈해온 것이 민란 발생의 원인입니다.

철저한 신분사회인 조선은 생산을 하지 않고 군역도 지지 않는 양반층이 과중한 납세와 군역의 의무를 하층민들애게 부담시켰고 살기 힘든 이들이 봉기한 겁니다.

따라서 이들 세도정치가문들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데 직접적 책임이 있습니다.

이 문벌가문들이 국가의 부를 사사로이 독점하고, 국방의 의무를 지지않은 체 국가를 사유화한 농단(隴斷)을 일으킨 것이 조선 멸망의 직접적 원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소위 세도가 출신 명문가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 명문가라고 치켜세우는 건 그래서 시대착오적입니다.

조선의 서북지역 차별은 이책의 초반부에서 설명되고 1812년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이후 발생하는 여러 농민봉기들과 동학농민전쟁의 출발점으로 거론됩니다.

홍경래난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하버드대 김선주 교수의 ‘조선 변방과 반란,1812년 홍경래난(푸른역사,2020)’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의 문벌이 기호지방과 영남지방 위주라서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양반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출사의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황당한 사회가 바로 조선사회였습니다. 양반끼리도 적서(嫡庶)차별은 물론이고 지역(地域) 차별을 두는 마당에 농민이나 천민들 그리고 노비들이 얼마나 비참한 대접을 받았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에 대한 조세의 부과가 너무 가혹하여 농민들과 하층민들이 먹고 살수가 없게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조선의 마지막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특히 현재 한반도 정세와 연계해 봤을 때 시사하는 바가 커서 자세한 복기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외세의 동향에 무지한 반면 아주 좁은 시야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만을 탐해 나라를 나락으로 끌고 간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만을 심봉하고 화이론 (華夷論)의 덫에 걸려 구한말 청에게 주권침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양대신 (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 그 수하인 원세개(袁世凱)는 조선이 전통적인 중국의 제후국이라고 주장하며 조선의 외교권을 노골적으로 유린했습니다.

유생들이 주장하던 화이론과 사대주의에 대한 역풍이 분 것입니다. 시대가 변한 것도 만국공법이 아시아에 적용되고 있었던 상황도 조선의 양반인 노론 지배층도 세도정치세력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는 청의 세력을 청일전쟁으로 물리쳤고, 19세기 내내 동진(東進)을 계속하며 해양세력인 영국과의 Great Game을 지속해 오던 러시아는 영국을 대신한 일본과 러일전쟁을 치룹니다.

이 두번의 전쟁을 이긴 후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정조이후 19세기 조선의 역사를 보면 도무지 노론 양반세력과 새도정치세력이 허울뿐인 명분말고 나라를 위해 한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국가를 털어 사리사욕을 채웠을 뿐입니다.

고종이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어 참담하기도 하지만 나름 없는 군사력과 터무니없는 외교력을 가지고 노력을 했습니다.

고종 자신이 봉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한계가 있었지만 노력조차 안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외세지향적이었던 이유는 무력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고종은 러일전쟁 이전 일본이 두려워하던 러시아 세력에 의지를 해보려고도 하고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일제의 조선 침탈에 제동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영수 교수의 ‘미쩰의 시기( 경인문화사,2012)’를 참조 바랍니다. 러시아측이 사료를 바탕으로 고종시기 조선의 정권과 이권을 둘러싼 친러파들과 친일파 그리고 각국의 동향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친일)개화파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일정한 교정이 필요한데 이는 주로 일본측 사료에 의거한 상황 설명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부질없는 것이 조선은 군사력이 없는 국가였고 군사력이 없어서 고종은 러시아와 청에 군사력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이 판단이 상황을 그르치게 한 것입니다.

세도정치가들이 100년가까이 나라의 부를 다 해먹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다른 나라와 다르게 지배계층이 국방의 의무도 지지 않는 비정상적인 조선의 지배계층의 국정농단이 결국 조선의 마지막 100년간 농민과 하층계급의 저항을 불러와 ‘민란’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한말의 지사라고 알려진 황현(黃玹)이나 의병장으로 알려진 유인석(柳麟錫) 등 양반 유생들의 행동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가당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인석 의병장은 일본과 외세에 대항해 의병을 알으켰다는 분이 평민출신 의병장을 무시하고 깔보던 황당한 행동을 한 분입니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국에 양반이라고 같은 의병장을 평민이라고 무시하다니. 조선이라는 소수 특권층만을 위한 신분사회가 결국 사회전체의 역동성을 억눌렀고 이것이 결국엔 망국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980년대 민중사관이 활개를 펴던 시기도 아니고 2021년에 ‘민란’에 대한 책을 읽어 무엇하나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민란이나 혁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되짚어 복기하는 것이 민란에 대한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과연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갈등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지나친 부의 편중과 박탈감이 200년 전처럼 하층민들을 자극하게 되지 않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20년간 지속된 부의 편중이 사회갈등을 유발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책도 그렇고 이전에 읽은 ‘홍경래의 난’에 대한 책도 그렇고 읽으면서 기시감 (déjà vu)을 느꼈습니다. 저만 이렇게 느낀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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