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일문학을 배우고 응용언어학을 공부한 미국인 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씨가 ‘한글’로 쓴 도시탐구기입니다.
서울출생으로 도시에서만 살아온 도시인으로서 도시의 여러 인문지리적 현상에 대해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책은 범주를 굳이 나눈다면 인문학자가 쓴 도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학 ( Urban Studies)이나 건축 (Architecture)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평소 살아온 경험이나 인문학적 감성 그리고 이 저자가 보여주는 평소의 식견으로 충분히 훌륭한 도시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유사한 범주의 책을 읽었는데 서울의 일반 서민들의 살아온 흔적을 답사한 김시덕 작가의 서울 답사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서지학과 전쟁사를 전공한 김작가는 ‘서지학적 방법론’을 도시답사에 적용해 서울과 그 위성도시들, 서울과 경인지역의 관계를 일제시대까지 소급해 살폈습니다 ( 서울선언, 2018 & 갈등 도시,2019)
이 책의 미덕은 이전에 문화재 위주로 조선시대 유적위주로 행해지던 도시답사를 근현대 시기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현재의 서울에 맞춰 현재 서울의 공간을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 연관지어 바라본 것입니다.
파우저씨의 책은 서울을 포함한 한국의 도시뿐만 아니라 저자가 살았거나 인연이 있어 자주 방문했던 영어권의 도시들과 일본의 도시를 대상으로 합니다.
제가 인상깊었던 도시를 꼽자면 일본의 가고시마와 아일랜드 더블린입니다. 두 도시는 공교롭게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도시들입니다.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는 고립된 규수 남부 지방도시이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나온 특이한 지역으로 젊은이들이 지역에 남아 일원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더블린은 저자가 언어학 박사학위를 공부한 곳으로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학가 제임스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고향이자 아일랜드의 수도입니다. 영연방이지만 잉글랜드와 다른 독립국가이고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로 아일랜드어를 잃어버리고 영어를 쓰는 국가입니다.
영국이 아일랜드 지배를 위해 16세기에 더블린에 트리니티 컬리지 (Trinity College Dublin)를 세우고 영국에 협력할 수 있는 지배층을 양성했다는 사실은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 양성을 위해 경성에 제국대학을 세운 일제의 모습과 겹칩니다. 일본이 영국의 정책을 모방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특히 각 도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는 도시화와 재개발, 그리고 도시 재생의 문제를 상당한 전문가적 식견으로 설명합니다.
도시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저자가 살아온 여러 도시에서의 삶과 저자가 느낀 점을 적은 에세이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는 공간과 도시의 경관이 정치인들의 의지에 따라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삶의 공간과 결부되어 기억되는 추억과 경험이 얼마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각 도시에 얼마나 괜찮은 헌책방이 존재하는지 이 책에 잘 나와있습니다.
사람들의 삶과 그 공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각 도시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이렇게 펼치기 여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자가 서울에 거주할 당시 한옥에 살면서 서촌의 한옥보전운동을 한 적이 있는데, 도시개발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영향을 주고 역사의 시간이 쌓인 공간을 배려하고 보존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반드시 경청해야 할 주장입니다.
부동산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토건세력들과 그에 결탁한 기득권층이 부동산으로 불로소득을 얻고 그 구조가 당연시되는 마당에 원주민의 기존의 삶을 보장하고 공동체의 편익을 위해 도시재생을 하고 재개발을 해야한다는 주장은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외국도시들의 사례를 통해 가능성을 입증시킵니다.
이익을 추구하려고 역사의 흔적을 망치는 우를 또 범해서야 될까요?
서울시장으로 두번째 당선되신 오세훈씨가 MB 시절 진행했던 종로 재개발은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개발 중 하나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건너편에서 시작되던 ‘피맛골’의 옛 흔적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고층 ‘쇼핑센터’가 자리잡아 서울이 아니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상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당시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던 독특한 피맛골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이유는 역사보다 이익만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이외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토건 원류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 개발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지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이 개발로 청진동의 옛모습도 모두 사라졌죠.
조선시대 500년은 현재 서울 사람들과 아무 연관도 없는데도 보존한다고 난리면서, 왜 직접적인 연관이 있던 피맛골, 청진동의 흔적이 사라지는 건 괜찮은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한국이 20세기 초부터 경험한 일제시대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 기억해야 할 그 시대 서민의 역사가 그 시대의 건축양식이 단지 ‘왜색 ( 倭色)’ 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헐리는 것은 반대합니다.
부끄럽기 때문에라도 당시 흔적을 알리고 교육해야 하므로 보통사람들이 그 당시 어떻게 살았나 알기 위해서라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싫어도 눈에 보여야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흔적을 없애려는 세력은 돈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제에 부역한 적이 없는지도 의심해야 합니다.
범죄자가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아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의 결과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자 파우저씨는 애호가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의 사진가로 알려졌는데, 그의 도시공간에 대한 관찰은 그가 사진을 찍으며 평소 공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서 나온 결과로 보입니다.
사진가는 당연히 자신의 파인더로 보이는 풍경과 피사체에 애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장소는 무수히 방문하게 됩니다. 같은 장소도 아침과 저녁에 다르고 여름과 겨울이 다르며 눈이 오거나 비가 온후와 그냥 활짝 개어 있을 때 다릅니다.
더구나 좋아하는 공간과 경관이 재개발이나 도시재생으로 바뀌게 된다면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육안으로 관찰하는 행위는 피상적일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매우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것으로 내공이 깊어지면 단순한 논리 이상을 꿰뚫는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관심은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의 특징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매우 예민한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이 책에 포함된 사진 상당수가 저자가 오래전부터 직접 찍어 장소를 기록한 사진들이고 글과 함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과거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