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라이벌 의식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 1
김윤식 지음 / 그린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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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故 김윤식교수님이 2013년 내신 비평서입니다.

문학관련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유명한 평론가의 책을 언젠가 읽고자 했는데 오늘 그 첫권을 완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6장인 ‘벤쿠버 동굴에 비친 물빛무늬 : 이문구와 박상률’은 너무 난해해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故 박상륭 작가의 경우는 어렸을 때 ‘죽음의 한 연구 ( 문학과 지성사,1986)‘를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종교적 주제를 특히나 삶과 죽음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길고 긴 만연체를 구사해서 매우 난해한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김윤식 교수의 해설과 비평도 난해해서 이해가 어렵습니다. 비평이 문학작품의 이해를 방해하는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책의 거의 절반 가까이는 1970년대를 양분하던 문단의 두 세력 창작과 비평(창비) 와 문학과지성(문지) 두 계간지에 관한 글입니다. 두 계간지를 대표하는 평론가 백낙청 교수와 김현교수에 대한 글이고 흥미롭게 본 글입니다.

다만, 문학을 논리로 설명하려 했다는 백낙청 평론가를 평가하는데 그가 나온 하바드 이력이 지나치게 많이 언급되는 건 매우 불편했습니다. 하바드 영문과 박사여서 정통문학을 공부했다는 설명은 너무 시대착오적이고 사대주의적이라는 생각이 우선 듭니다.

더구나 한국의 현실과 한국문학을 비평하는데 왜 이 대학을 언급하는게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론 김현 평론가도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유학도 다녀오신 분인데, 놀랍게도 이분에 대해서는 유학이력에 대해 별 설명이 없습니다. 불균형이 지나칩니다.

이 책의 첫장은 국문학자인 양동주 선생의 신라 향가연구와 함께 경성제대 교수였던 오구라 신페이 (小倉進平)의 향가및 이두 연구를 대조시킵니다.

김윤식 교수가 보여준 경성제대에 대한 입장은 일제가 경성제대를 통해 근대적 학문을 식민지 조선에 이식했다는 긍정적인 입장이고 특히 국문학의 입장에서 오구라신페이의 향가및 이두 연구 논고를 매우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집필 당시 현직 서울대 교수 입장인 김윤식 평론가께서 전신 학교의 일본인 교수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식민지 경영을 위한 현지연구의 일환의 하나로 기획된 연구를 맥락(context)을 고려하지 않은체 그 자체로만 평가하는 건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 읽으면서 매우 불편했습니다.

끝으로 이 책의 편집 관련입니다.

무려 한국문학사를 관통하는 문학비평서인데도 이 책은 서지목록이 아예 없습니다. 이러한 무경우를 어떻기 보아야 할지 난감합니다. 더구나 저자는 스스로 자료를 찿아 도서관 서고에 파뭍혀 계셨다는 언급을 하셨는데 정작 글에 서지목록조차 없는 경우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김윤식 평론가께서 글을 인용하시면서 작품명과 연도 표기는 불규칙적으로 하셨지만 본문의 직접인용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작품의 특성상 알수 없는 표현이 많은데도 별도의 추가해설이 없습니다.

서두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글이 있다고 했는데, 저는 문학이라서 그리고 문학평론이라서 그 고담준론( 高談峻論)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체 넘어간다는 상황을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학평론/비평이 문학으로의 접근을 막으면 그건 평론가로서 도리를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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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19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듣던대로군요. 이분 글이 좀 어렵다고 듣긴했거든요. 문학평론 1세 대라서 이분에 줄을 대려고했던 작가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찍히지는 말아야죠. ㅎ 평론계대부고 김현 선생하고는 라이벌이었을테니 다룬다는게 좀 껄끄러웠을 겁니다. 지금은 문학평론 재밌게 쓰는 사람 많죠.
 

일제강점기를 시대배경으로 건축과 당시 발간된 소설의 내용을 결합해 당시 서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당시 소시민의 생활사이자 사회사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사진만 님은 당시 건축물에 대한 건축사이기도 합니다.

특히 저자는 건축을 공부하신 분이라 건축물과 당시 도시계획 등은 특히 잘 설명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딱 일제시대 서울의 공간과 건축문화 그리고 1920-30년대 조선의 인텔리에게 큰 영향을 준 모더니즘과 사회주의의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여러분야가 모두 들어있지만 가볍게 읽기 좋을만큼의 분량과 글이라서 입문서로 읽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서울의 현재의 모습을 이루는 토대는 언제 만들어졌나를 생각하면 우선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기 전 1960년대를 떠올릴 것이고, 더 전으로 소급하면 1950년 한국전쟁이전이 될 것이고, 더 소급한다면 일제시대가 될 것입니다.

일제는 고종 재위시인 19세기 말 기존의 서울의 4대문 중 일부를 철거하고 이후 각종 건물을 지으면서 서울의 공간구조를 바꿔왔습니다. 물론 일제의 식민통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을 떠나 그들이 남긴 도시계획의 흔적과 구획정리의 흔적이 서울의 공간 안에 남아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상당히 많은 일제시대 건물이 사라지고 이후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서울은 모습을 바꿉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조부모님들로 들었던 수많은 건물들, 예를 들면 부민관이나 화신백화점에 대한 이야기는 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렸을 때 버스를 타고 가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화신백화점 건물과 ‘화신 앞’이라는 버스정류장 이름이 생각나고, 서울시 의회 건물을 할머니들이 왜 ‘부민관’이라고 부르는지 의아해 했었습니다.

고등학교따까지 등교를 하는 버스창가에서 본 돈암동, 보문동 그리고 혜화동 성대입구에 즐비했던 도시형 한옥도 기억합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가던 언덕에는 커다란 성문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오래된 음식점이름에 집 옥(屋)을 쓰는 이유가 일본어의 영향인 걸 알지만 , 어릴때는 왜 음식점이름을 이렇게 알 수 없는 한자를 붙이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아마 건축사 사회사 공간사를 연구하시는 대부분 연구자들도 독자인 저와 비슷하게 서울의 현재공간을 이루는 직접적인 출발이 어디인지를 찿으려니 일제시대 도시계획과 건축물을 보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대한극장이 문을 닫고 그 주위의 사무소 건물들이 공실로 남아있다 철거될 것이라는 뉴스를 봤습니다. 멀티플렉스와 스트리밍이 대세인 시대라고 하지만 한 때 한국을 대표하던 극장이 폐관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 무척 놀랐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된 ‘단성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게 가능한 곳이 서울이라서 그런지 매우 씁쓸합니다. 한국사람들은 조선까지만 역사적 유적이고 이미 125년이나 시간 간극이 있는 20세기의 흔적은 관심이 없나 봅니다. 다행히 근대문화유산이란 제도가 있어 몇몇 근대건축물은 살아남았지만 일반 살림집들, 도시형 한옥이나 1960-70년대의 단독주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좋으니 싫으니 해도 서울의 주 거주형태는 공동주택인 아파트인데, 아파트 재개발로 30여년 이상된 아파트들도 철거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성인이 될만한 시간이고 그래서 과거 유년시절 살았던 아파트를 기억하려는 책도 나오고 있습니다.

건축회사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혹시 아파트도 일부러 내구연한이 30년으로 지정되게해서 만드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벌이가 눈앞에 보이니 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런 마음가짐이면 앞으로 100년 후 한국사람들이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알 길이 없을겁니다. 다 부수고 새로 지어졌을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옛건물들을 부수려고만 하지말고 다른용도로 리노베이션해서 사용항 방법을 찿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순간 철공소와 공장들이 몰려있던 오래된 공장지대 을지로가 젊은이들의 힙한 성지가 된 것도, 전형적인 도시형 한옥지대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익선동이 핫한 지역으로 떠오른 것도 지역이 가진 ‘시간’의 힘이 컸습니다.

인테리어와 리노베이션으로 커버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과 공간의 아우라가 그 공간을 독특하고 모방할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저자께서 이 책 이전에 출간한 다른 책을 한권 소개합니다.

경성의 건축가들, 김소연 지음 (루아크,2017)

개인적으로 난해한 시인으로 알았던 천재시인 이상의 건축가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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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콜럼비아 대학에서 팔레스타인을 연구하는 라시드 칼리디 (Rashid Khalidi)의 팔레스타인 현대사 연구서입니다.

저자가 책 말미에서 밝혔듯 자신의 아들이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써보라고 권유한게 이 책을 집필한 동기가 되었다고 했고, 책은 집필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인근의 레바논,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등 다른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팔레스타인 난민을 사이에 두고 어떤 갈등이 존재했는지 협상의 당사자 중 한명으로 참가한 경험을 토대로 풀어냅니다.

이 책은 현재 아마존에서 현재 진행되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여파인지 몰라도 이 분야 베스트셀러이고, 한국에도 2021년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미국판이 2020년 출판되었고 페이퍼백판이 2022년 출판되었으니, 현재 진행되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별개로 한국에서 번역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라시드 칼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2021)

이 책의 미덕은 대체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전쟁의 역사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서술한 경우가 대부분인 경우에 비추어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귀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에 살던 유태인들이 제1차세계대전이후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1948년 실제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현재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한 시오니즘( Zionism)이 유럽에 살던 유태인이 주장한 것으로 아랍세계에서 아랍인과 같이 살던 유태인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외무장관이던 발포어( Balfour)의 선언으로 시작된 유태인의 중동이주계획은 제1차세계대전으로 붕괴한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아랍세계의 독립을 선동하면서 이 지역에 풍부한 석유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00여년 이상 지속되온 중동지역의 분쟁과 테러 그리고 전쟁의 원인제공에 영국은 그 원죄가 있습니다.

이 주장은 중동문제에 정통한 전문가 대부분이 공유하는 관점으로 영국의 지식인들도 인정을 합니다.

최초 유럽의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인정했던 식민주의 세력이던 영국은 하지만 1956년 수에즈 위기 (the Suez Crisis)를 계기로 주도권을 미국으로 넘기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지역의 국경선을 결정하며 헤게모니를 행사해 왔지만 수에즈 위기에 미국이 개입하며 이집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주도권을 상실합니다.

영국의 현대사가들이 수에즈 위기가 대영제국이 쇠퇴하게 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책은 팔레스타인이 겪은 수많은 전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보다 유럽의 유태인 시오니즘 추종자들, 영국의 정치가들과 미국의 정치가들 그리고 그들을 후원하고 미국의 중동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유태계 백만장자들(대부분 골수 시오니즘 추종자들임)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건국시키고 이들을 내쫓았는가입니다.

저자는 이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재(existence) 자체를 부정하는 철저한 식민주의자들이라고 봅니다.

이들 미국의 시오니즘 추종자들인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공간으로 인식하고, 성경에 나와있듯 원래 유태인이 살았던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이 돌아오는 것 ( return to homeland)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유태인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반을 둔 미국의 주류 백인들 사이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종교적 정당성을 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수 세대간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재, 문화,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는 매우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식민주의적 관점의 시각입니다.

그리고 이 시각은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전쟁에서 학살되고 난민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이는 미국이 서부개척을 할 때 이 지역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 (Native American)들의 삶을 깡그리 부정하고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로 생각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미국을 건국한 백인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서양문명을 비문명세계인 원주민이 사는 빈공간에 채워넣는다는 제국주의적 발상을 한 겁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는 않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는 원주민들이 만들었 문명과 문화가 있었지만 이는 ‘없는 존재’로 간주된 겁니다.

유럽출신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세운 것이나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국하고 이후 독일 등 동유럽 출신 이민들이 미국의 중서부를 개척하는 모든 과정이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주의 그리고 서구우월주의 ( Eurocentrism)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구인들이 비서구 유색인종들에게 행한 폭력과 학살 전쟁을 보면 이들이 진정 선진문명을 이룬 이들이 맞는지 회의적입니다.

최근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보면 벤자민 네탄야후 수상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극단주의적 시오니즘 추종 군부세력이 사실상 가자지구( Gaza Strip)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무차별 학살(massacre)하는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의 지경에 으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학교와 병원을 폭격해서 이 지역에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하고 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서구언론에서 절대말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이스라엜군이 팔래스타인에 가하는 절대우위의 불균형적 군사적 타격 (disproportionate strike)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지 못하도록 공중폭격과 포격을 민간안이 밀집한 시가지에 무차별적으로 퍼붓습니다. 네탄야후 총리는 이번 전쟁으로 전범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자가 일하는 콜럼비아 대학을 비롯한 미국 대학가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공격에 대한 시위가 일어나는 등 그 폭력과 잔인함이 이미 임계치를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하바드, 유펜 그리고 콜럼비아 대학 총정이 사임을 했고, 그 배후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골수 시오니즘 지지자인 유태인 백만장자들이 압력을 가한 사실이 드러나는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라는 사실이 무색합니다.

이 책을 보면 미국을 비롯한 주류 서구사회가 지칭하는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이 과연 온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거지와 난민캠프가 무차별 폭격을 당하고 탱크가 들어오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살폭탄테러나 암살 이외에 저항할 방법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끝으로 한국의 최근 우려되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려 합니다.

과도한 친일로 일관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을 앞두고 뉴라이트계통의 역사학자인 김형석씨를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해 군인출신이며 보수인 이종찬 광복회장과 갈등양상을 보였습니다.

이분의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인식때문입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시켜주는 무서운 발언으로, 전형적인 식민주의자적인 인식입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의 유태인 시오니즘 추종자들이 팔래스타인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유태인들은 이들의 국가수립의 권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대화상대로 인정되지 않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국 미국 이스라엘과의 대외관계에서 제외되고, 협상에서 배제되어 왔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형석 신임관장의 한국인 국민 존재 부정발언은 그가 친일이고 극단주의적 식민주의자라는 자기증명입니다. 자기나라 국민의 존재를 부정하고 식민지 일제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주장이 친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친일일까요?

최근 용산 대통령실이 용산 총독부라고 불리는 것도 신임 독립관장 임명과 관련해 볼 때 사실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개인적으로 식민지 모국에 부역하던 엘리트들의 전통이 청산되지 않은 체 남아있다가 때를 만나 활개를 치는 것으로 봅니다. 친일파를 우대했던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역사적 후과가, 역사적으로 단죄되지 못했던 친일파에 대한 후유증이 21세기 들어 나타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출신 지식인들에 대한 연구서 한권 소개합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 지음 (휴머니스트,2019)

위의 책에서 일제시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중 특히 법조인들은 일제로부터 사상검증을 받은 ‘검증된’ 친일파라는 역사적 사실이 나옵니다. 다른분야는 시험에만 합격하면 임용이 보장된 것과 달리 판검사 임용은 시험합격은 물론이고 추가적으로 그 사람이 ‘친일’임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꿔말하면 친일이 아니라면 조선인은 결코 일제시대에 판검사 임용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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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처음 출간된 이 유명한 책이 2024년 발간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작가후기와 함께 10주년 기념판으로 재출간 되었습니다.

뉴요커 (the New Yorker)라는 잡지에 글을 써온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고생물학(paleontology)과 지질학(geology)그리고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 고인류학(paleo anthropology),곤충학((entomology) 등 이외에도 셀수 없이 세분화된 생명과학 분야의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해서 책을 낸다는 건 한국에선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책은 이미 지질학적 관점에서 5번의 지구상 생물의 대멸종이 있었고, 현재 지질학적으로 새로 정의된 인간세(Anthropocene)에서 바로 인간에 의해 인간이 바꾸어놓은 생태환경의 변화로 인해 많은 생물들에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주장이 이 책의 주제입니다.

지질학적인 먼 과거를 이야기하다보니 과거 기후변화로 인한 생물의 멸종, 잘 알려진 소행성(asteroid)의 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종, 빙하기때 생물의 멸종 등을 언급합니다.

전체 지구의 역사로 봤을 때 인간의 출현은 매우 최근이나 18세기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환경이 파괴되면서 인간에 의해 수많은 종의 생물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졌거나 사라지기 직전의 위기에 처해있어 자연상태에서 생존할 수 없어 인간들의 보호아래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경우도 소개됩니다.

특히 인간세는 흔히 생각하던 산업혁명이후가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한 고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라고 설명합니다. 덩치가 큰 맘모스나 마스토돈과 같은 거대 포유류가 고인류가 나타나면서 멸종에 이르렀는데, 대체로 초식성이 이 거대 포유류들이 덩치로 육식 포유류에 맞섰지만, 고인류는 생각보다 강력한 포식자로 먹이사슬 위에 자리잡았다는 겁니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가 출현한 이후 거대포유류 멸종에 대한 단서가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고인류학에서 네란데르탈인은 현생인류(Homo Spiens)에 의해 대체(replacement)되었다는 주장이 오랜기간 정설이었지만 고인류를 유전적으로 분석하는 고생물유전학(Paleogenetics)이 발전하면서 네인데르탈인과 현생인류가 결합해 현재 인간들의 유전자 지도에 그 흔적을 남겨놓은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네인데르탈인이 멸종한 것이 아니라 현생인류에 유전적인 흔적을 남겨 우리는 네인데르탈인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이 책의 후기는 출간 10년이후 취재했던멸종위기종들의 근황을 확인하고 또한 곤충들의 상당수가 멸종의 위기에 처한 현상황에 대한 경고를 보냅니다. 공룡보다 먼저 지구상에 나타나 이전 5번의 대멸종의 위기를 통과해온 곤충류가 인간세를 맞아 이전에 보기 어려운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겁니다.

생태계 먹이사슬의 하부에 위치해 양서류와 파충류 그리고 포유류들의 먹이가 되어온 곤충이 사라진다는 건 지구의 자연생태에 커다란 재앙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곤충이나 야생동물들은 늘 발견의 대상이거나 인간의 사회의 배경으로서만 인식되어와서 그 심각성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저 역시 저널리스트의 자연과학책으로 생물의 멸종에 대한 주제라 심각한 연구과제라기보다 혹시 센세이션을 노린 출판이 아닌가 솔직히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저자가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의 논문처럼 형식적 고루함에서 탈피하면서도 최신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논문저자인 학자들 연구소를 방문하고 이들이 조사하는 현장에 동행하고 인터뷰하면서 이야기를 입체적이고 알기쉽게 설명해주었습니다.

후속취재를 위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여러번 방문하고 시간적인 비교를 하는 대목은 이 책이 오랜 준비기간과 여러사람들간 협업의 산물이라는 걸 실감합니다.

사족으로 ‘뉴욕커(the New Yorker)’라는 잡지에 대해 한마디 하려 합니다. 아마도 시사와 정치,외교 등 미국사회의 현재를 가장 잘 취재하는 잡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저자와 같은 일급필자들이 스탭으로 참여하고 단행본을 낸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유려한 영어문장을 접할 수 있는 잡지이기도 합니다. 매달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지를 그리고 특히 시사만평에 해당하는 한컷만화가 압도적인 잡지입니다. 제가 예전에 구독했었던 뉴스위크에 비하면 급이 훨씬 높은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과 관련된 책 몇가지 소개합니다.

이 책이 번역이 안된 줄 알았는데 2022년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

여섯번 째 대멸종, 엘리자베트 콜버트 지음, 김보영 번역, 최재천 감수 (쌤엔파커스,2022)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소행성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종에 대한 테마는 별도의 책을 한권 소개합니다.

The Last Days of Dinosaurs: An Asteroid,Extinction, and the Beginning of of Our World, Riley Black ( St. Martin’s Press,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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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출간된 이책은 미국의 MZ세대 중 특히 Z세대(Generation Z)의 불안(Anxiety)과 우울증(Depression) 등 정신질환 (Mental illness)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입니다.

저자는 NYU Stern Business School에서 윤리적 리더쉽(Ethical Leadership)을 강의하는 사회심리학자(Social Psychologist)입니다.

하지만 저지의 전공과 별개로 이 책은 발달심리학(Developmental Psychology)와 뇌과학(Brain Science)에 기반한 논의이며 특히 유년기와 사춘기에 무분별하게 스마트폰에 노출되는 것이 Z세대의 정신건강에 얼마나 해로운지, 그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지장을 주는지 부모와의 관계가 스마트폰 중독으로 얼마나 피폐하게 되는지 주로 미국과 영국 등 영어권 지역의 사례를 위주로 설명합니다.

영미권 사례로 설명하니 한국에서 참고할만할 수 있을까 싶지만 소위 MZ세대가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소셜미디어에 매여있는 상황(hook up)은 별반 다를바 없습니다. 가상세계(virtual world)에 매올되어 서로 소통도 안하고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상황을 미국의 한 고교 교장은 새로 부임해서 마치 자신이 ‘좀비로 가득찬 세상의 종말 (Zobie Apocalypse)’을 보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습니다.

스마트폰에 매몰되어 불안증상과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이 제일 심한 쪽은 Z세대 여학생들로 이 증상이 폭증하기 시작한 것은 2010-2015년 사이였습니다. 이 시기 애플은 스마트폰을 출시하고 다른 기업들에게 app개발권을 주고 app 생태계를 조성한 때입니다.

반면 남학생의 경우 가상세계에 몰입하게 되는 기간이 매우 오래되었고 이는 Z세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컴퓨터가 보급되고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1970년대말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여학생과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이 폭증한 시기는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한 2010-2015년입니다.

플랫폼 비지니스가 시작되고 소셜미디어 사업은 비즈니스 모델이 무료이용을 기반으로 한 광고노출이기 때문에 이용자는 계속 app을 이용해야 하고 계속 이용을 유도하는 알람이 울리면서 유년기 사춘기 청소년들이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고, 공부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부모와 대화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플랫폼 비즈니스 자체가 물적기반 없이 다른이가 구축한 인프라를 거의 무임승차하는 모델이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플랫폼 비즈니스의 좋은 점만 지나치게 부풀려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한 이모델은 애초 성인을 대상으로 개발된 비즈니스 모델로 청소년들이 사용할 경우의 부작용에 대해서눈 전혀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청소년들이 사용가능한데도 가능성 자체를 무시한 겁니다. 오히려 시장의 측면에서 청소년들의 사용을 묵인한체 조장했다고 봐야합니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측면에서는 스마트폰 도입이후 그 부작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 것입니다. 교육환경과 생활환경이 급속도로 온라인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환경변화에 대한 연구가 수행된 것이죠.

한국에서 스마트폰 이용에 대한 부작용과 이로 인한 각종 정신질환에 대한 논의가 없는 건 매우 놀랍습니다. 비록 영미권 사례가 많이 논의되었더라도 스마트폰의 부작용은 영미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자에 따르면 스마트폰 이용은 최소 16세 이후에 허락되어야 하며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계정을 만드는 것도 역시 16세 이상 되어야합니다. 또한 저자는 교육적 측면에서 청소년들이 친구들과 실제로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며 육체적인 놀이를 장려하고 약간의 상처가 나는 건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셜미디어를 통한 가상세계에 매몰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부모가 이를 신경써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서로 부대끼고 직접 소통하고 같이 육체적인 놀이를 하면서 사회관계를 형성하도록 진화된 존재이기 때문에 대면접촉이 차단된체 가상세계에 매몰되는 건 고립감을 심화시키게 되는 등 부작용이 불가피합니다.

아무튼 교육적인 측면에서 한국에서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스마트폰을 허용하는 정책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춘기의 학생들이 전두엽 대뇌피질의 발달되지 않은 상태에 공부와 교내 생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어주면서 수업시간 분위기가 좋길 바라는 건 모순적입니다.

학교는 저자의 주장대로 학생들이 학교에 있는동안 스마트폰을 제출받아 따로 보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교때 지급해야 하고요. 이건 자유와 별개의 문제로 학생들의 미래와 교육의 질이 걸린 중대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을 한 저자는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에서 다른곳도 아닌 경영대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모르지 않을 사람이 학생들은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한 겁니다. 이 주장을 한 이유는 스마트폰이 학생들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부작용이 학계에서 이미 확인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스마트폰에 대한 부작용이 특히 여학생들에게 더 심하다고 했는데 남학생에 비해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 이용빈도가 높고 외모에 대한 비교가 심하고 자신들이 이룰수 없는 외모의 인플루언서를 알고리즘에 따라 보여주기 때문에 자존감이 내려가는 등 심한 심리적 타격을 입습니다.

저자는 사춘기 학생들이 평균 하루 8시간씩 소셜미디어를 이용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인이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이고 이말은 학생들이 풀타임으로 학생으로 생활하면서 소셜미디어를 관리한다는 말입니다.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상황입니다. 미성숙한 학생들이 감당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한국의 연구가 있습니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인생샷을 찍고 편집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문화를 분석한 책입니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 김지효 지음 (오월의 봄,2023)

교육적인 관점에서 두뇌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유년기와 특히 사춘기에 스마트폰 사용을 금하는 것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부모와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옳은 방향이고 결국 현실세계에서 부모의 지나친 보호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현실세계에서 친구들과 몸으로 부딫치며 사회생활을 배워가는 과거의 방식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가야 Z세대 젊은이들의 불안과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디지털로 대단한 발전과 진보를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과연 1980년대 이후 디지털 경제.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로 이행한 것이 진보가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무심코 하는 말 중 디지털 디톡스( Digital Detox)라는 말이 있습니다. 곱씹어보면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의 디지털환경이 ‘독성이 있다(toxic)’라는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쉽게 풀면 우리는 늘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이고, 특히 소셜미디어에 많이 노출된 Z세대에서 정신질환이 많이 나타나면서 스마트폰 중독, 소셜미디어 중독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으로 사회생활이 힘든 지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해한’ 소셜미디어와 이를 매개하는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해결방안입니다. 디톡스가 필요할 정도로 유해한 매체인 스마트폰 사용을 두뇌발달이 끝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제한하는 건 매우 상식적인 해결책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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