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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평점 :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로맨스 장르의 열렬한 팬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당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파리의 연인>, <풀 하우스> 같은 드라마를 보았다. 대학 시절에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눈물이 주룩주룩> 같은 일본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 사회인이 된 후에는 독서 트렌드를 파악한다는 핑계로 <트와일라잇>,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같은 소설을 섭렵했다. 그런 내가 로맨스 드라마 속 주인공 같은 남자를 만나 로맨스 영화 같은 연애를 하고 로맨스 소설로 남을 만한 사랑을 하길 꿈꾼 건 두말할 필요 없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도통 로맨스 장르에 무심하다. 몇 번의 연애를 통해 내가 꿈꾸는 로맨스와 현실에서의 이성 간의 사귐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들처럼 멋진 남자들이 현실에도 있기는 하다. 영화에 나오는 운명적인 만남이나 소설에 나오는 로맨틱한 연애가 현실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멋진 남자들이 여자의 능력과 성취를 깎아내리는 가스라이팅을 하고, 이별 선언을 한 여자에게 앙심을 품어 스토킹을 하고, 전 여자친구가 나오는 불법 촬영물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하는 일이 로맨스 드라마, 영화, 소설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이런 현실을 알면서 로맨스 장르에 열광한다는 게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국 작가 베스 올리리의 장편 로맨스 소설 <셰어 하우스>를 읽기 직전까지도 사실 기대하는 마음보다 경계하는 마음이 더 컸다. 티피는 실용서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박봉을 받으며 일하는 편집자다. 직장이 있는 런던에서 가장 저렴한 금액으로 살 수 있는 집을 찾던 티피는 병원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간호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동안에만 집에서 머물 의향이 있는 세입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게 된다. 티피는 광고를 낸 사람이 남자인 걸 알고 고민하지만, 그 남자에게 여자친구가 있고 서로 일하는 시간이 달라서 만날 일도 없다는 말에 안심하고 세입자가 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티피는 리언의 집에서 살게 된다. 같은 집에서 낮에는 티피가, 밤에는 리언이 사는 기묘한 동거다.
티피가 리언의 집에서 살기로 결정했을 때, 나라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사는 것만 해도 불안한데 한 방, 한 침대를 공유하다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덜컥 들어가 사는 티피가 너무 무모하고 대책 없다고 생각했다. 티피와 리언이 서로의 얼굴조차 모른 채 포스트잇 메모와 간단한 음식으로 소통하며 마음을 나눌 때에도 방 어딘가에 초소형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마침내 티피와 리언이 운명적인 첫 대면을 했을 때에도 혹시나 헐벗은(!) 티피를 벌거벗은(!!) 리언이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불안했다.
하지만 티피에게 호의를 베푸는 리언의 마음이 진심이고, 티피가 전 남자친구한테 받은 상처를 리언 덕분에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나쁜 건 사람이지, 사랑이 아니다. 나쁜 남자를 만났다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영영 없어지는 건 아니다. 전 여자친구를 스토킹하는 남자, 스토킹하는 걸 도와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남자 등 한심하다는 말도 아까운 남자들 사이에서 금처럼 귀한 남자를 발견해낸 티피가 부럽기도 했다. '호모'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웃에게 "호모는 더 이상 올바른 용어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라고 대꾸하는 남자. 잠들기 전에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를 읽는 남자라니! 이런 남자가 있다면(있을까?) 나라도 연애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씩씩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는 마음이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쓰렸다. 결말과 상관없이 티피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기묘한 동거를 하는 모험을 감수해야 했던 건 티피와 리언 모두 경제적 불안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삼포 세대인 탓이 크다.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티피는 작가의 비서 일까지 대행하는데도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서 런던의 비싼 월세를 감당하지 못한다. 리언 역시 야간 근무를 자처하는 데도 집세를 치르기가 버거워서 이성인 티피를 세입자로 받아들여야 했다. 생계가 버겁고 생활이 바쁘니 누가 약간의 관심과 애정만 보여도 쉽게 마음을 허락한다. 티피와 리언이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잘 맞지 않는 상대와 불편한 연애를 했던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티피와 리언을 힘들게 하는 건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티피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스토킹과 협박, 강제 주거 침입까지 당하지만 적절한 보호 조치를 받지 못하고 주변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한다.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인 리언은 동생 리치가 감옥살이를 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돈이 없어서 실력 있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결국 티피는 리언의 도움을 받고 리언은 티피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21세기 국가에서 이런 기본적인 법적 권리조차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누군가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사랑이 피어난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어려움은 어려움이고 사랑은 사랑이다. 그 둘이 진정한 인연이라면 각자도생, 자력구제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도 예쁜 사랑을 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남자가 재벌 2세, 여자가 유명 여배우 정도는 되어야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데, 지금처럼 사랑이 사치인 시대에는 평범한 남녀의 연애마저도 로맨스 소설의 글감이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로맨스 소설을 읽고도 이런 건 다 허구라며 한숨 쉬는 내가 이상한 걸까. 로맨스 소설을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