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사도들 - 최재천이 만난 다윈주의자들 드디어 다윈 6
최재천 지음,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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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도'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도란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제일 먼저 나와 있지만, 대부분은 예수의 제자들을 의미할 때 쓴다. 또한 그런 의미를 확장하여 스승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기도 하고.


그렇다면 사도들은 스승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다. 또한 스승을 뛰어넘지 않는다.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그를 남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사도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한계에 갇힌 존재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윈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킨 12사람을 인터뷰한 결과를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사도들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들이 다윈의 학설을 지지하고, 다윈의 학설을 우리들에게 널리 알린 공로를 들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 참 좋은 말이긴 한데...


대담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다윈의 위대함이다. 그의 위대함이 지금 그들을 낳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다윈의 위대함과 더불어 다윈의 잘못도 다루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 다윈의 잘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진화론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다윈이었다. 다윈은 진화론의 창시자로서 역할을 했을 뿐, 지금 과학계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다윈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학설은 계속 진화한다. 그렇다면 그의 학설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발전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윈은 이런 학설에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대담집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다윈의 학설은 단순하다는 점에 있음을 알았다. 그들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다윈의 주장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 단순함이 생물들의 진화를 설명하는데 유용하다는 것.


그렇다. 이론이 단순할수록 이해하기 쉽다. 또한 그 단순함으로 인해서 다양한 분야로 벋어나갈 수 있다.  


다들 다윈의 이론은 아래에서 위로, 단순함으로 생물학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던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코페르니쿠스가 생각났다.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 오죽하면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도 했겠는가.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역할. 


천문학이, 과학이 더 발전했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듯이, 다윈의 업적도 사라지지 않는데,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 이론으로는 천체의 운행을 단순하고 깔끔하게 설명하기 힘들다는 데서 천동설의 문제점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래서 지동설로 바꾸었더니 천체의 운행이 단순하고 명료하게 설명이 되더라는, 그런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다윈의 이론도 마찬가지다. 단순 명료.


여기서 출발하면 된다. 또한 과학자로서 다윈은 증거를 확보하기까지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 사회의 분위기가 엄중해서 안전을 고려해서 발표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간을 가진 것이 진화론을 발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


이런 태도가 바로 과학자가 지녀야 할 자세 아니던가. 그렇게 이 책을 통해서 다윈의 진화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과학자의 태도에 대해서, 왜 사람들이 다윈, 다윈 하는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속칭 다윈의 사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역시 다윈의 절대성 속에 무조건 자신들을 밀어넣지 않고 있음을... 다윈의 사도들은 다윈의 이론에서 출발해 더 진전된 과학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사도란 말에 대해서 지금도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이 책에 나온 사도들처럼 무조건적이지는 않음을... 이것이 바로 과학이고 과학자들의 태도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널리 이름을 날린 최재천이라는 학자가 다윈의 사도들이라고 만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만 여기에 적는다.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우리나라에 이 사람들 책이 많이 번역되어 있다고 하니, 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 아니면 다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 뒤에 실린 부록을 참고하면 좋겠다.


자 , 열두 사도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단순히 다윈 추종자라고 해서는 안 되고, 다윈의 학설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 사람들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피터와 로즈메리 그랜트(부부. 일심동체라고 한 사람으로 여기서 다룬다), 헬레나 크로닌, 스티븐 핑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피터 크레인, 마쓰자와 데쓰로, 스티브 존스, 매트 리들리와 마이클 셔머, 제임스 왓슨, 재닛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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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죽음
호세 코르데이로.데이비드 우드 지음, 박영숙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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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불멸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불멸의 존재. 예전에 과학계에서는 영구동력을 연구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번 작동하면 다른 에너지를 투입하지 않아도 계속 작동하는 동력.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영구동력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영구동력과 불멸을 비교할 수 있는가? 저자들은 비교할 수 있다고 한다. 과학적 기술적으로 영구동력은 불가능하지만, 불멸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고.


불가능하지 않다면 불멸이 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불가능이 아닌 경우 시일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가능으로 변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저자들은 불멸은 '어떻게'라는 질문 보다는 '언제'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있었고, 약간의 성과도 있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갈 길이 멀다는 말을 불가능이 아니라, 갈 수 있음으로, 가능으로 판단하고, 저자들은 이 갈 길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고, 불멸 운동에 참여한다면 그 시기는 많이 앞당겨질 수 있다고... 지금도 필멸에서 불멸로 넘어가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을 냉동시키는 업체도 생겨났다고 한다.


'언제'가 '언제'일지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그 '언제'가 다가올 때까지 인간을 냉동시켜 보존했다가, 불멸의 존재로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


몇 십 년 전부터 냉동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 왔다. 서양에서 이미 그런 일을 하는 업체가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고. 그냥 그렇겠거니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들이 단지 현재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한 과정으로 '냉동인간'을 도입했음을 알게 됐다.


저자들은 과학적, 의학적으로 불멸이 가능하고, 또 많은 성과들이 있으며, 최신 과학기술을 동원하면 '언제'가 더 앞당겨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노화로 인한 치료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지구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이제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 또 신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례들을 들어 불멸이 가능함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런데 과연 이 지구에서 인간이 불멸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우리가 시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하지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멸을 꿈꾼다. 불멸을 꿈꾸는데, 건강하게 -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이 들어서 약해진 몸으로 온갖 약을 달고 살면서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으로, 청장년기와 마찬가지로 활달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 사람들이 계속 살아간다면...    


넘치는 인구는 어떻게 하지? 지금은 효용성이 떨어진 '맬서스'의 이론이 다시 적용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는다. 결국 인간은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가게 된다?


여기에 대한 답은 내놓지 않지만, 이들은 이런 주장이 터무니 없음을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야기하면서 암시하고 힜다. 즉 그 인구에 맞는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함께 발전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먹는 즐거움을 제외한다면, 식량은 최소한의 또는 최대한의 영양소로 구성된 알약처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죽지 않게 만드는 기술을 지닌 사회가 그 정도 기술도 만들 수 없지는 않으니까. 이런 사회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기아로 죽는 사람은 없는 세상이라고 하면, 인구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죽지 않고, 또는 몇 백 년 살아간다면 태어나는 사람들의 숫자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엄청나게 많아질 것은 분명한 일.


그 많은 인구들,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마치 엔트로피 법칙을 연상하게 하는 인구증가일텐데, 그런 지구에서 과연 인간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이들 논의에서는 그래서 우주개발이 함께 되어야 한다. 노화를 방지하는, 불멸의 존재로 인간을 만드는 기술을 지니고 있다면 우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즉 이들이 말하는 불멸에 관한 논의에서 '언제'는 우주에서 인간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언제'와 함께 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이미 태어난 인간들은 자신들의 불멸을 위해서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불멸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어쩌면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 아닐까?


불멸의 존재를 꿈꾸기보다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게 살다 가는 인간을 꿈꾸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 한다. 죽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이런 연구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지금도 활발하게 불멸을 향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전지구적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들은 전지구적 노력으로 불멸을 향해 가야 한다고 하지만, 이런 연구가 시행되기 전에 전지구적으로 불멸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과학기술에는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가장 보수적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불멸 또는 노화방지, 노화역전에 관한 주장을 하는 근거 몇 구절 적어본다. 아직은 무어라 확신을 할 수 없는데... 이들이 '어떻게' 보다는 '언제'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나는 '왜'에 중점을 먼저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노화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비극이다. 세상의 모든 다른 사망 원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매일 노화로 사망한다. 구체적으로 말라리아, 결핵, 사고, 전쟁, 테러 및 기근 등 다른 모든 원인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노화로 인한 사망자가 2배 이상 많다.'(42쪽)


'인류의 가장 큰 적은 노화로 인한 죽음이다. 죽음은 항상 우리에게 최악의 적이었다.'(43쪽)


'우리가 생명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모르지만, 특정한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살기 위해 태어났지,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상적인 조건에서 대칭적으로 번식하는 박테리아는 그렇다. 하지만 비대칭적으로 번식하는 박테리아는 나이를 먹는다.

  죽음은 항상 존재해왔음이 분명하지만, 최초의 생명체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영원히 젊게 살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영양소 부족이나 질병과 같은 삶의 가혹한 현실은 노화하는 유기체와 노화하지 않은 유기체 모두에게 죽음을 초래했다.'(55쪽)


. 분열 효모 새표는 이상적인 성장 조건에서 노화하지 않는다.

. 비노화는 분열의 대칭과는 무관하다.

. 노화는 스트레스로 인한 비대칭 손상 분리 후 발생한다.

. 스트레스 응집체의 유전은 노화 및 죽음과 관련 있다. (57쪽)


'우리는 기본적으로 노화하지 않는 다른 유기체, 즉 노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유기체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신체에서 '최고의' 세포(생식세포)는 노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즉, 생물학적 불멸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문제는 오히려 언제 인간의 노화를 멈출 수 있는지가 되어야 한다.' (70쪽)


'노화의 일곱 가지 원인은 무엇인가? 1. 세포 내 노폐물, 2. 세포 간 노폐물, 3. 핵 돌연변이, 4. 미토콘드리아 돌연변이, 5. 줄기세포 손실, 6. 노화 세포의 증가, 7. 세포 간 단백질 연결의 증가 (89쪽)


'노화의 일곱 가지 근간, 1. 염증, 2. 스트레스 적응, 3. 후생유전학과 조절 RNA, 4. 신진대사, 5. 고분자 손상, 6.. 단백질 항상성, 7. 줄기세포와 재생' (97-98쪽)


'노화를 질병으로 치료하면 연구와 자금 지원의 수준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의료, 제약, 보험 산업의 명확한 목표를 파악할 수 있다. 

  항노화 및 노화 역전 산업이 곧 세계 최대 산업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은 큰 기회다.'(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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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따스해지는 시다. 어떤 시를 읽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냥 우리들 생활이 시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생활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진다. 아니면 '삶시'라고 하던지.


  서정홍 시인의 시들도 이렇게 생활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번 김용만 시집도 마찬가지다.


  시골에 살고 있는 시인의 삶이 눈 앞에 보이는 듯하다. 따스하고 또 따스하다.


  요즘같이 척박한 시절에 이런 따스한 시들은 우리 마음을 한결 너그럽게 만들어준다.


  각박한 시절, 시가 왜 필요한지, 또 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다.


이러한 시들은 땅에 발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 발이 허공에 떠 있으면 이런 시가 나올 수가 없다. 시인들이 하늘의 별을 따듯이, 소위 구름 따 먹는 소리를 하는 시들이 많은 시대에, 흙냄새가 물씬 나는, 또 흙에 발이 닿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집은 참 소중하다.


머언 우주를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시인들이 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바라보게 하는 역할도 시인은 해야 한다.


그런 시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이 시집에서 시인은 이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


      아름다운 것들은

      땅에 있다


      시인들이여


      호박순 하나

      걸 수 없는


      허공을 파지 말라


      땅을 파라


김용만,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 삶창시선. 2021년 초판 2쇄. 70쪽.


그래, 현실과 동떨어진 말들이 난무하는 요즈음, 이렇게 땅을 파라는 시인의 외침. 단지 시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땅을 파는 일을 우선 해야 하는 사람들은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허공을 파는 일을 많이 한다. 자신들은 땅을 판다고 하지만, 가만 보면 그들은 전혀 땅을 파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 있다. 그냥 땅을 판다면서 허공만 들입다 파고 있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있으니,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러니 이 시에서 시인을 정치가로 바꿔도 무방하다. 우리에게는 우리 땅을 딛고 서서, 우리 땅을 파는 정치가가 필요하니까. 하여 시인의 말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말이 된다.


우리 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한다. 허공을 파는 일이 아니라 땅을 파는 일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그것이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임을 깨닫게 한다.


참 마음이 따스해지고 편해지는 시집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한 번씩 꺼내 읽으면 좋을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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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gial 2023-09-27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 님 덕분에 알게 되어 흠뻑 젖어 들었네요. 멋진 시인의 훌륭한 시집이에요. 감사합니다!

kinye91 2023-09-27 13:31   좋아요 1 | URL
저도 아는 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데요.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따스해졌어요. 좋은 시들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어루만지는지 체험할 수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해요.

dalgial 2023-09-27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bs 다큐 자연의 철학자들 중에 시인 편이 있어요. 시집 읽고 다큐 보니 화면에 시가 가득합니다.
 
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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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등장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은 결코 균일하지 않다. 시간은 누구냐에 따라 다 다르게 느껴진다. 여기에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앞두고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인생 전체에 걸친 긴 시간이.


이처럼 시간은 다르다. 시계에서 볼 수 있는 균등하게 분절된 시간이 아니다. 어떤 시간은 한없이 늘어지고, 어떤 시간은 그냥 건너뛴다. 그렇게 다른 시간. 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르게 느끼는 시간. 이것이 삶이다.


누구나 다 다른 삶. 그래서 시간이 다르듯이 삶도 달라야 한다. 삶이 같아야 한다고 할 수 없다. 천선란이 쓴 소설 [천 개의 파랑]이다.


파랑, 색깔이다. 그 색깔이 파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될까? 시간이 그냥 기계적인 시간, 수학적인 시간으로 누구에게나 똑 같은 시간이 될 수 없듯이,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파랑은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다 다른 파랑이 된다. 마치 우리들의 삶처럼.


우리들이라고 했지만, 이 우리들은 인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존재라고 해야 한다.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은 지금, 과연 인공지능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봐야 하는지를 논의하기도 한다. 복제인간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이 소설에는 로봇이 나온다. 경마 기수로 만들어진 로봇. 이는 인간의 흥미를 위해서 로봇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로봇만이 아니다. 경마를 하려면 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말에는 속도가 필요하다. 경마가 무엇인가. 인간들이 자동차 경주를 하듯, 말을 경주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 아닌가.


이런 경마에 참여시키는 말은 생명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는 도구일 뿐이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사람 기수에 비해 효용도가 높기 때문에 도입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경마에 동원된 로봇 기수나 말은 생명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로지 경마에 쓸모 있을 때까지만 존재해야 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어느 순간 칩이 하나 자리를 잘못 찾아 들어가 학습 능력이 있는 로봇이 된 콜리가 있다. 다른 생명체와 교감이 가능한 로봇. 그래서 말이 힘들어 하자 스스로 말에서 떨어진다.


고장난 로봇. 폐기될 뿐이다. 또 너무 혹사당해 무릎 관절이 나간 말, 투데이. 역시 도태되어야 할 존재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주류에 끼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도 과연 도태되어야 하는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던 사람들. 무언가 하나씩 결핍을 안고 살던 사람들. 보경, 은혜, 연재. 이 가족에게 콜리는 다른 시간을 살되, 함께 하는 시간도 있어야 함을 알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로봇을 통해서 가족들은 닫혀 있던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점차 나아가게 되고. 여기에 수의사 복희와 말 관리인 민주, 연재의 친구가 되는 지수가 함께 등장한다.


그들은 로봇을 생명체로 대한다. 로봇도 생명체로 대하는 이들에게 말은 함부로 도태시켜서는 안 될 존재다. 이렇게 경주마로서의 생명이 끝난 말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그들이 함께 하는 과정. 이 과정이 콜리가 투데이에게서 떨어지는 짧은 시간에 다 펼쳐진다.


콜리가 천 개의 파랑이 있다고 하듯이, 삶도 모두 다른 삶들이 있고, 이들의 시간 역시 다르게 흘러가겠지만, 이 다름 속에서도 함께 함이 있음을, 결국 삶은 라이프니츠의 말을 빌리면 '창이 없는 단자'가 아닌 '창이 있는 단자'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 열린 창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하는 시간이 있음을,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로봇 콜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만, 말을 함으로써 느끼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보경 가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삶은 다양함을,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것에는 존재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를 인정해야 함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 콜리의 독백으로 시작해서, 다시 콜리의 독백으로 끝난다. 여기에 중간 중간 서술자로 등장하는 보경, 은혜, 연재, 복희를 통해서 로봇의 관점에서 본 사람들의 삶과 사람들이 겪는 삶들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이미 처음에 이별이 표현되어 있기에 소설은 이 이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이를 끝부분에서 작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소설을 비극으로 이끌어가지 않고, 삶에서 겪는 이별을 통해서 한층 더 성숙해지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니 소설에서 극적인 반전을 느낄 수는 없지만, 콜리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게 된다.


그 점이 이 소설을 SF소설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요소들을 떠나서 소설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빈 공간을 서로가 채워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좋다. 파랑이 천 개의 파랑일 수 있듯이, 이들의 삶 역시 천 개의 삶이고, 이들의 시간 역시 천 개의 시간일 수 있음을. 


이런 다양함이 결국 서로의 비움을 채워줄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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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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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이 쓴 단편 소설집이다. 8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연결이 안 되는 소설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연결이 되기도 한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각자 존재하는 하루하루들이 모여 삶을 이루고 있으니, 또 전혀 다른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늘 일어나고, 그러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나란 인간을 만들어가고 있듯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소설들이 모여 한 작품집을 이루고, 그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인생에 깊이와 넓이를 더한다. 전혀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라도,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생에 무언가를 더해줄 수 있다.


우리는 불가능을 꿈꾸므로.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상상하고, 그런 상상을 통해서 현실을 견디기도 하므로.


소설집 제목이 된 '어떤 물질의 사랑'이 그렇다. 사랑에 과연 형태가 있을까? 한계가 있을까? 사랑에 국경이 없다는 말, 나이가 없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외계인과 사랑에 빠진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성으로 변한다? 이런 일들... 너무도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게 여기는 존재.


이 소설은 그런 점을 보여준다. 이상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세상에 이상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똑같으면 그것이 어떤 즐거움을 주겠는가? 사랑은 그래서 형체가 없다. 사랑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무엇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변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떠날 수 있다. 온전히 상대방을 느끼고 받아들이기에 어떤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에 대해서, '어떤 물질의 사랑'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이 소설에만 나타나 있지는 않다. '마지막 드라이브'라는 소설을 보면 교통사고 실험을 하는 '더미'가 느끼는 사랑, 그런 더미를 바라보는 사람의 사랑이 나온다. 로봇인 더미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단지, 입력된 명령어 대로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랑을 어떤 특정한 형태로 규정짓는 일이다.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일이다. 결코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없는 사랑을. 그러므로 더미의 사랑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것을 뇌의 작용 또는 호르몬 작용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사랑 또한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이 아님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즉, 이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사랑이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작가는 인간이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단 느낌을 많이 받는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인간들은 지구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그려진다. 지구의 생물들을 멸종시키거나(레시,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또는 스스로들 외계인과의 전투에서 죽어간다.(두하나) 아니면 감정을 없애버리려고 하거나(그림자놀이) 유전자를 통해 자식을 만들려고 한다.(너를 위해서)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하겠지만, 그런 과학기술로 인해서 인류는 파멸의 길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음을,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한 사회는 아님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 천선란의 소설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많은 고난에도 어떤 희망이 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현재가 비록 힘들지만,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두하나'라는 소설에서 외계인과의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 또는 그들에 의해 같은 인간을 죽이게 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참혹한 과거지만, 이겨내야 함을...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있다. 진정한 반성, 참회가 있어야만 용서가 있을 수 있음을... 반성과 참회가 없는 존재에겐 용서도 없음을... 무엇이 먼저여야 하는지를 잊은 자들에게는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없을 것이다.


'삶을 재건하기 위해 모두가 바빴다. ...... 뒤늦은 용서는 사회 속에서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이 상황을 올바르게 헤쳐나갈 수 있는 선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불안할 것이다. 오래도록 의심할 것이다. 오래도록 용서할 것이고, 오래도록 받지 못한 용서가 토양에 쌓여 침전되고 그렇게 지구가 될 것이다.('두하나'에서. 256쪽)'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있어도 용서는 오래 갈 텐데, 그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족속에겐 용서란 없다. 용서란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잘못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반성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다. 


하여 이 소설집은 '사랑'에 관한 소설집이다. 무엇이라 딱 고정된 사랑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사랑. 어떤 특정한 형체가 없는 사랑. 무한한 사랑이기에 시간의 제약도 공간의 제약도 없다. 사랑은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 속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이 소설집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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