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시집을 읽다가 '치매'란 말이 생각났을까? 치매, 기억을 잃는 질병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기억을 잃는 것을 넘어,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치매란 누구에게도 좋은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왜 시집을 읽으면서 치매? 시와 치매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텐데...


  이 시집에 어두운, 어려운 생활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그런가 하다가, 시집에서 시인이 이런 내용을 다룬 것은 '지금-여기'의 우리가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여기',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한국. 선진국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을 거쳐 왔을까? 그런 어려움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또한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의 가족들, 아니 기택의 가족들보다도 더 아래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우리는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순간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다. 그들에게는 일상이 '별일'인데, 그들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보이는 것이 '별일'이다. 즉, 그들이 '별일 없다'고 했을 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고려 대상이 아닌 것이다.


최근 언론에서는 많은 죽음들을 다뤘다. 죽음은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지만, 죽음을 인식해야만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죽음까지 가기 위해서 우리는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신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자신의 삶이 '지금-여기'까지 오게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었음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여기'의 삶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최근 교사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이게 바로 '사회적 치매'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그들을 잊고 살았던 우리 자신이 바로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교육을 통해서 이만큼 왔는데, 최소한 자기 자식들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잊어서는 안 되는데, 교사들을 마치 자신들의 종처럼( 당연히 누구에게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자신들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그것이 감정이든 육체든, 편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데, 그것을 잊고 있으니 이를 사회적 치매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고 있으니...


어려운 시절에도 교사들을 대우했던 과거를 까맣게 잊고, 버리고 지내는 지금이 과연 치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자신들이 무시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식들이 무언가를 배울 수가 있나? 배움이 없는 학교가 되어 버리게 만든 사람들...


학교만 그런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간신히 이룬 형식적 민주주의마저도 껍데기만 남기고 다 잃고 있는 지금 아닌가? 과거를 지우듯이, 그냥 과거만 잊는 것이 아니라, 더욱 광포한 행위들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으니, '사회적 치매'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에게는 '별일 없는' 상태이겠으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별일인' 상태가 바로 지금 아닌가 하는 생각.


이렇게 과거를 잊으면서 어떻게 '별일 없이' 살 수 있겠는지... '별일 없이' 살기 위해... 시집을 읽는다.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내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점자 숲 오목눈이 교실3


 아함경 읽는다 가시 손으로

 모래사막 낙타가시풀의 고독을 읽는다

 하루가 무섭다 어두워지는 눈이 무섭다

 의사의 만류에도 삶의 낙이 이것뿐이라고

 어머니 철필로 점자 불경 닥종이에 옮겨 새기신다

 해진 열 손톱 끝에 봉선화 꽃물 번져 간다

 시치미 떼고, 연옥을 찾아가는 단테같이

 주문을 하얀 닥종이에 새긴다

 어디선가 찌르르 스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잘 알아보면, 점자별과 통신을 하는 소리...

 제 심장에다 나이테를 나무들이 새기듯이

 더듬더듬 감은 눈으로 무얼 쓰고 싶은 것인가

 오늘 만나도 내일은 알 수 없는 내 마음이

 답답한 마스크 끼고 앉아서 철필로 만다라 새긴다

 결국 시작과 끝이 만나서 바람에 털리고야 말

 모래 만다라처럼, 빈손은 백지로 돌아온다

 그래도 자꾸 점자별이 되고 싶어

 만다라 속을 수놓는

 오롯한 점자의 시간

 

송유미, 점자 편지. 실천문학사. 2023년.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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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폭식 사회 : 기술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잠식하는가? -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2023년도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선정 우수과학도서
이광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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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공지능에 환호하고 있을 때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이나 인공지능이나 또는 메타버스나 다 기술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진보라고 보고, 이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다른 나라보다도 더 빨리, 더 강하게 디지털화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 교육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학교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학습을 시켜야 하며, 칠판은 전자칠판으로 바뀌어야 하고, 교과서는 디지털 교과서가 되어야 하며, 학생들 개개인에게는 디지털 기기를 하나씩 보급해야 한다.


대면으로, 서로 몸을 부딪히며 경험해가는 교육에서, 교사와 학생이 얼굴을 맞대고 수업을 하던 장면에서 이제는 중간에 디지털 기기가 끼어들어 교사는 디지털 기기를 작동시키고(또는 학생들이 디지털 기기를 작동하며), 학생들은 그 기기를 통해 배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미래 교육의 모습이다. 과연 좋을지? 코로나19로 대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혀졌음에도, 학교라는 공간에 나오더라도 학습은 디지털 기기와 하는 비대면 교육이 강조되고 있으니, 가히 디지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학교가 이런 정도에 이르르면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는 더욱 디지털화가 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대체로 교육은 어떤 기술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을 우선시 하는 태도는 질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인수공통감염병조차도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더욱더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는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런 사회를 '디지털 폭식 사회' 또는 '기술 폭식 사회'라 부르고 있다. 저자가 정의하고 있는 기술 폭식 사회는 이렇다.


'기술 폭식 사회는 그 어떤 때보다 사회가 기술에 매달리고, 기술 그 자체를 사회문제의 직접적 해결책으로 보고, 자본주의 기술 그 자체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성찰의 여유가 적을 때 발생하는 이상 현상이다.' (205-206쪽)


과학기술이 초래한 문제는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보다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자신들의 생활 형태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기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 또 그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에 대한 논의도 없이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믿고 추진한다.


이런 사회에서 기술을 통제하는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지금도 그렇다. 인터넷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좋아요' 아닌가. 팔로워 숫자와 좋아요 숫자로 자신의 처지를 가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검증되지 않은 일들을 얼마나 빠르고 쉽게 유통시키는가?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가 몇 해 동안 계속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술 권력의 문제는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도덕성, 개인의 책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술 권력의 품에 안기게 된다.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기술 권력의 문제는 곧 기술을 오남용하는 사회에 대한 급진 정치적 개입이나 기술 실험과 연결되어야 문제의 해결 지점이 보인다. 이 점에서 개인의 데이터 역량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에 대한 개인 성찰 능력에 더해, 묵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의 도시설계 속 배합과 앙상블, 거의 모든 연령과 세대에 두루 친숙한 기술의 보편적 접근과 사회 공통의 보편적 '기술 감각' 마련,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 도입 시 시민 숙의 과정의 정례화, 풀뿌리 대안 생태 기술의 장려 등 기술 대안의 상상력을 동시다발적으로 창안해내야 한다.' (236쪽)


이런 주장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에 대해 과연 시민 숙의 과정을 거친 적이 있었던가? 디지털, 인공지능 시대가 되었다고 뒤처지면 안 된다고, 더욱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있지만, 여기서 잠시 멈추고 디지털 사회가 초래할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주장은 언급이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소수에게서 나오고 있지만, 더이상 퍼지지 않는다. 지지자를 획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술 권력을 쥔 자들이 이런 주장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은 쉽게 퍼뜨리지만 반대하는 주장은 묻어두는, 그

런 행태. 이것이 바로 기술 권력이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지금. 성장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가 겪었던 큰일들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저자는 묻고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이대로 나가면 우리가 겪었던 감염병이나 기후 재앙보다 더 심한 일들을 겪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모두가 우 몰려 가는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한다.


특히 이런 기술 개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더욱 극한 상황으로 내몰린 노동자들, 그리고 디지털이 초래하는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 저자는 '생태 기술과 공생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기술 개발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방향에서만은 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연-사회 생태계에 걸쳐, 생태 기술과 공생 기술의 문제를 전면화한 채 인공-자연, 생명-기계, 가상-실제, 물질-비물질 사이의 기술 배합 비율을 적정 수준에서 조절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지구 곳곳에 만연한 기술 독성을 치유할 자율 능력을 우리 스스로 익히는 길이기도 하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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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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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건축물을 다루고 있다. 너무도 유명한 건축물이다.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건축들. 그렇지만 아직 나는 한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는 건축들.


유현준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또는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축물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그 건축물이 왜 대단한지를 차분히 설명해 주고 있어서, 글을 읽다보면 그 건축물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그 건축물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친절하게도 시대 순으로 건축물을 소개하지 않고, 공간 순으로 건축물을 소개하고 있어서 나중에 그 지역을 여행하게 되면 건축물을 찾아보기 편하도록 소개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시작은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한 '빌라 사보아'로 시작한다. 건축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르 코르뷔지에인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그는 현대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가 건축한 빌라 사보아 역시 현대 건축에 영향을 준 건축물이고.


그러니 빌라 사보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 책의 구성상 옳다고 볼 수 있다. 빌라 사보아로부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공간은 유럽부터 시작하게 된다.


근대 건축과 더불어 고대, 중세에도 유럽에는 다양한 건축물이 있어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그런 과거를 더욱 풍성한 미래로 만들어낸 사람이 르 코르뷔지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은 무조건 칭찬만 하지 않는다. 빌라 사보아가 현대 건축을 이끈 선구적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당시 재료나 기술의 한계가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방향, 지표를 제시했다는 데서 르 코르뷔지에 건축의 위대함을 보게 된다고 한다. 가장 현대적인 건축을 표방했던 르 코르뷔지에가 나중에는 '롱샹 성당'같이 다른 방향의 건축을 했고, 그 건축 또한 위대한 건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유럽의 건축에서 북아메리카로 넘어갔다가 아시아로 끝내고 있다. 아시아에도 자랑스러워 할 만한 건축물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한계를 넘어선 건축과 또 자연과 어울리는 건축 등 다양한 건축물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따르고 싶은 건축, 다른 책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해비타트 67'이라는 건축물이다.


아파트라고 다 똑같은 아파트가 아닌 그런 건축. 지금 우리나라도 같은 아파트에도 내부 구조가 다른 아파트들이 많이 생기고는 있지만, 이 건축은 내부구조만이 아니다. 외부도 다르다. 즉 지금 우리나라 아파트가 지니고 있는 '베란다(발코니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를 정원과 같이 사용하는 그런 건축은 아직 없다.


'해비타트 67'은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건물들을 옮겨온 듯한 느낌을 주는, 다른 층의 지붕을 정원으로 쓸 수 있게끔 설계한 그러한 건축이다. 그러니 아파트 생활을 하지만 자연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건축인 것이다.


이런 건축은 우리에게 아파트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세상에 이런 아파트가 1967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냥 상자같은 아파트만 짓고 있지 않았나.


정책입안자들이 반성해야 하지 않나? 어디서 봐도 비슷한 아파트들만 난무하는 나라에서 무슨 다양성, 창의성이 길러지겠는가? 또 자연을 차단하고 기껏해야 옥상에 흙을 가져다 놓고 식물을 심고 있으니, 유현준이 소개한 이 건축물을 생각해 봐야 한다.


아시아에서 주목할 만한 건물은 바로 홍콩에 지어졌다는 'HSBC 빌딩'이다.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1층을 비워야 하는 제약을 건축공법으로 극복한 건축물. 이렇게 지어진 이 건물은 아시아 각국에서 온 가사도우미들이 일요일에 모여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고 하니, 대도시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렇듯 다양한 건축이 소개되고 있는데, 하나하나 들어보면 왜 그 건축물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지 알게 된다. 한번쯤은 직접 그 건축물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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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관계'를 생각했다. 관계는 나가 아닌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전제한다.


  다른 존재와 만날 때 어떠해야 하는지에 따라 관계를 잘 맺기도 하고, 잘못 맺기도 한다.


  디지털 사회로 넘어가면서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많고, 또 섣부르게 관계를 맺기보다는 홀로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은 다른 존재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 다룬 글 중에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에 나오는 말, 그렇다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관계를 전제로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소망. 참 어려운 소망이다.


나와 다른 존재는 나와 같지 않기에 내가 하는 말이 오롯이 그에게 전달되기는 힘들다. 다른 존재의 마음을 읽기도 힘들고. 그렇지만 관계를 맺지 않을 수는 없다. 또한 남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잃을 수는 없다.


그러니 할 말은 하자. 할 말을 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말도 받아들일 자세를 갖자. 그러면 된다.


이렇게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것이 꼭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만은 아니다. 도시와 지역의 관계일 수도 있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일 수도 있다. 


그러면 '칼부림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라는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사건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으면 안 된다. 사건은 관계맺기가 실패한 데서 나온다. 어떻게 관계맺기를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냥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지 말고.


결국 사회란 관계맺기가 펼쳐지는 장이다. 빅이슈가 추구하는 바도 바로 이런 관계맺기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 누가 누구를 소외시키지 않는 관계. 


빅이슈를 읽으면서 이런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제대로 된 관계맺기를 하고 있는가? 어쩌면 관계맺기를 남에게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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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3년 가을호 - 통권 183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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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을 읽다. 길을 잃은 시대에 길찾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여전히 녹색평론에서 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내는 녹색평론에 응원을 보낸다.


후쿠시마 오염수...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처리수라고 하자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흘러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그렇게 하자고 한다면 제 나라니까, 자기들 이익이 걸려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익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피해만 쌓여갈 뿐인 우리나라에서 오염수 방출을 반대하기는커녕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으니...


무엇이 과학인지 정말 알고 떠드는지 궁금하다. 원자력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쓰고, 핵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하는 집단에서, 인체에 해롭지 않은 피폭량이 있다고 하는 말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우리 몸에 들어온 방사능물질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나? 아주 작은 양은 몸이 견뎌낼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말이 과연 과학적인가?


진정 과학적이라면 아주 적은 양이라도 인체에 해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오랜 시간 동안 검증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그냥 주어진 자료만 보고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핵 오염수부터 시작하여 기후재앙, 그리고 정치의 후퇴 등을 다루고 있는데, 진정 민주주의라면 과학이라는 이름을 오용하면서까지 국민들 정서에 맞지 않는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너무도 후퇴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들을 통제할 수단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국한시킨 결과이기도 하겠고.


문제는 경제야가 아니라 문제는 정치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당연히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적인 사람들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 


4년에 한 번, 또는 5년에 한 번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늘 함께 할 수 있는 민주주의, 남에게 자신의 권리를 맡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면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왈가왈부 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또한 국회의원들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제대로 하지 않는 선거법 개정, 예전에 이루어졌으리라. 그나마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루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 형식마저도 하나하나 무너져 가고 있으니...


이런 정치적 후퇴는 삶의 퇴보를 부른다. 아니 퇴보가 아니라 위기다. 재앙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재난을 보라. 이는 정치의 퇴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향을 잃은 정치인데, 견제를 하지 못하고 바꾸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공론을 모으는 일을 하지도 않고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면서 지금 정치의 모습, 또는 경제 성장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이제석 광고가 떠올랐다.


앞으로, 적에게 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총구는 자신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광고..


<사진 출처 : [광고 천재 이제석] 개정판. 156-157쪽.>


이것이다. 성장을 외치는 지금의 모습은 이렇게 앞으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성장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성장, 성장 하고 있을텐가? 지금의 삶을 방식을 유지하면서 기후재앙을 벗어난다는 것은 망상이다. 이 성장이 결국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 광고처럼

<사진 출처 : [광고 천재 이제석] 개정판. 158-159쪽.>


그러니 우리는 삶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녹색평론 이번 호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성장 중심에서 벗어나 자급 중심의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공업이 아니라 농업을, 그것도 소농 중심의 농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큰집단보다는 작은집단이 공동체를 이루어 그곳에서 생활이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있다. 계속해서.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바위가 언젠가는 뚫리고 깨진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녹색평론을 꾸준히 외치고 있다. 아직까지도. 한편 한편의 글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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