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 창비교양문고 20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디아스포라'라는 말로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은 자신을 표현한다. '이산'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재일교포. 서경식의 삶은 이 말로 정리가 된다. '자이니치'라고도 하는데 일본인으로서도 한국인으로서도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의 삶이다. 그런 삶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바로 서경식의 가족이 아닌가 한다.

 

형인 서승과 서준식이 한국에 유학왔다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 조작되어 - 감옥생활을 하고,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이런 형들의 구명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다.

 

형들을 면회가는 어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누이, 결국 자식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이런 상태에서 그는 유럽을 여행하기로 한다.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있으므로, 변화가 필요했을 터. 유럽 여행을 통해 자신을 추스리려고 하는데...

 

어쩌다가 여행이 미술관 기행이 되어 버렸고, 그 기행을 오랫동안 하게 된다. 미술관에서 그는 자신을 만나고, 자신이 겪어야 했던 현대사를, 가족의 현대사를 만나게 된다.

 

그가 처음 만난 그림은 '캄뷰세스 왕의 재판'이다. 어떤 판사가 형벌을 받고 있는 장면. 그 형벌이 무엇이냐면 껍데기를 벗기는 형벌이다. 형리들이 사람의 껍데기를 벗기고 있는 극히 사실적인 그림.

 

이 그림에서 그는 충격을 받는다. 이 그림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연상하는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것은 가족의 비극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을 만나게 된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과는 달리 그림에 대한 미술사적 설명보다는, 그 그림을 통해서 느낀 점을 더 잘 표현하고 있고, 또 그림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림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에서 느끼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들을 떠올리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단지 그림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만나고 보듬어 가는 과정을 서술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 표지에 나오는 조각상은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다. 이 반항하는 노예에서 그는 자신의 형을 연상하게 되는데... (바뀐 판본에서는 모딜리아니의 '하임 수띤 초상'이 표지 그림인듯)

 

조국에 돌아와서 조국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형들, 그들은 순종하는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반항하는 인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그림 순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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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에는 마법이 있다고 하지.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듯이, 언어에는 어떤 주술적인 요소가 담겨 있어,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반대로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했을 때 그것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주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언어를 통하여 나타내고 현실이 되게 하는 것.

 

  옛날 삼국시대 신라의 수로부인 이야기를 보면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 수 있다. 바닷속으로 잡혀간 수로부인을 구해내기 위해 동원된 무기가 바로 말이니...

 

  그러나 그것은 과거 신화적 이야기이고, 지금 시대에 언어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냥 허황되게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루려고 실력을 쌓아야 한다.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도 없이, 또 현실의 밑바탕도 없이 그냥 원한다고 해서 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무슨 마법세계의 주문처럼 외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청년들에게도 주문이 있다. 그것은 "할 수 있다"라는 주문과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주문이다. 청춘은 아파야 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너희들이 아픈 것은 청춘이어서 그런다는 주문.

 

그러니까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주문.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주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주문(注文) 

  어떤 상품을 만들거나 파는 사람에게 그 상품의 생산이나 수송, 또는 서비스의 제공을 요구하거나 청구함. 또는 그 요구나 청구.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요구하거나 부탁함. 또는 그 요구나 부탁.

주문(呪文) 

  음양가나 점술에 정통한 사람이 술법을 부리거나 귀신을 쫓을 때 외는 글귀.

 

이미 청년시절을 겪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하는 주문은 앞의 주문(注文)으로, 청년시절을 혹독하게 겪고 있는 청년들에게는 뒤의 주문(呪文)으로.

 

그러나 앞의 주문을 뒤의 주문이 받쳐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 왜냐하면 주문은 '어려서부터 주문이 통하지 않는 날이 더 많긴 했다'는 표현과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 적이 더 많이 때문이다.

 

그러니 공연히 "할 수 있다"라든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주문을 외우라고 주문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리잡고 살 수 있도록,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현실을 바꾸어가려고 해야 한다.

 

누가?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와 힘을 합쳐. 그렇게 해야 하는데... 윤의섭의 시집 "마계"를 읽다가 '주문'이라는 시를 보고서, 이 시에서 말하는 주문이 두 뜻을 지니고 있으며, 어쩌면 이 시에 나오는 그녀는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생을 하는 청년들의 모습. 있는 사람들의 주문을 받지만, 자신도 자기 나름의 주문으로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를 꿈꾸는 존재. 그러나 현실은 냉혹해서 자신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할 수밖에 없는 청년.

 

그래서 주문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적이 더 많았다고 한탄을 해야 하지만, 한탄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주문이 현실이 될 수 있게 기반을 쌓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기성세대는 주문만 하지 말고 현실을 바꾸려 해야 하고, 청년들도 주문을 외우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줄탁동시()'라고 현실이 바뀌게 된다.

 

근데...이 시를 이렇게 읽어도 되나?

 

주문

 

손님이 메뉴를 고르는 사이

그녀는 침착하게 손님의 입에서 흘러나올 주문을 기다린다

메뉴판을 짚어 가며 손님은 그날의 만찬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음식을 주문한다

주방으로 향하면서 그녀는 늘 그렇듯 주문을 왼다

싱카폴슬링 크림슾 닭고기샐러드 구운감자 연어스테이크 중얼거리며

계속 중얼거리며 주문을 왼다 디저트는 디저트는

창밖 가로등 위로 초승달이 떴다

오늘의 디저트는 초승달 한 조각

그녀가 주문을 외자 식당 손님들은

접시에 놓인 초승달 조각을 잘라 먹을 수 있었다 배를

불릴 수 있었다

이른 새벽 퇴근길에 그녀는 가로등 아래에서 택시를 기다린다

정작은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 줄 택시라는 주문을 외치진 않고

이미 사라져 버린 초승달 떠 있던 자리만 바라본다

언젠가 남아 있는 주문을 다 외고 나면

입에 반쯤 걸린 초승달이고 은하수고 꿈이고 영혼이고 다 쏟아 내면

조금 추운지 그녀는 구두 굽을 두어 번 부딪친다

갑자기 바람이 잔잔해지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제자리다

어려서부터 주문이 통하지 않는 날이 더 많긴 했다

 

윤의섭, 마계. 민음사. 2010년. 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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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1-30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로 하면..˝오더˝ 와 ˝스펠˝의 차이니까 확연히 차이가 있겟네요...오더는 주는 거고 스펠은 시전하는 거니까요.ㅎㅎㅎ kor ot par....아 시집 리뷰 재미났습니다...^^.

kinye91 2017-01-30 10:15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kor ot par가 무슨 뜻인지? 전 모르겠는데, 좀 알려주셨으면...
 
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시인선 139
이승훈 지음 / 세계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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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이 참 도발적이다. 시인이 시집을 내면서 제목을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다니. 이런 식의 제목을 본 적이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었던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 제목.

 

시인은 '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집 [비누](2004) 이후 내가 관심을 둔 것은 한마디로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것. ... 이런 시쓰기가 노리는 것은 시 따로 인생 따로 노는 이 시대 시인들의 위선과 오만을 미적으로 비판하고 근대 부르조아 예술이 강조한 이른바 자율성 미학을 파괴하고 일상과 예술의 단절을 극복함에 있다. 물론 이런 극복이 현실 환원주의나 거친 리얼리즘으로 퇴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不二 사상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삶에는 무슨 의미도 본질도 없고 그저 흘러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아방가르드 니힐리즘을 사랑하자.'

 

그러면서 시집의 뒷부분에 비평가의 해설을 실지 않고 본인의 시론을 싣고 있다. 시집으로서는 특이한 형식이다. 시론의 제목도 또한 특이하다.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다.

 

결국 시란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시가 언어로 이루어지는 이상, 본질과 실제 또 그를 반영하는 문제에서 어떤 미끄러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이 간혹 말하듯이 말하고 싶은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 마음이 언어로 표현되었을 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온전히 드러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현실을 그대로 옮긴다'고 했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기에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언어로 표현했다고 하지만, 그래서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 언어로 인해서 '이것은 시가 된 것'이다.

 

시론에서도 나오지만 뒤샹이 변기를 가지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변기는 예술이 된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도 비록 시인 이승훈이 또는 대학교수 이승훈이, 한 가정의 구성원인 이승훈이 겪은 일들을 사실적으로 - 사실 사실적으로라는 말은 많이 고민해야 한다. 과연 사실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 자체가 이미 사실에서 벗어나 있는데 - 표현했다고 하지만, 언어로 표현된 순간, 그 사실들은 다른 상황에 자리잡게 된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일기에 적었다면 일기라고 할테고, 수필로 발표했다면 수필이 되었을테고, 시론이라는 주장하는 글로 발표했다면 시론이 되었을 거다. 그러나 분명 시인은 '시'라고 발표했다.

 

시인이 시로 발표했을 경우, 그 언어들은 시로 인정을 받는다. 그것이 언어의 사회성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 시인이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것은 시이다'라는 주장을 좀더 강하게 하는 것이다.

 

시란 특정인의 것만이 아니라, 특정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우리의 생활 자체가 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이 들린다.

 

어차피 언어라는 것 자체가 사실과 떨어져 있는 것이니,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실들, 사건들은 시가 될 수 있음을, 시를 특정한 형식에 가둬두어서는 안 됨을 시로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집을 읽어가면서 또 시론을 읽으면서 시론에 불교의 예를 든 것 때문인지 십우도(심우도라고도 한다)가 자꾸 생각났다.

 

그 중 유명한 십우도의 열 가지 과정은 다음과 같은데...

 

1. 심우() -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속을 헤맴 

2. 견적() - 소 발자국을 발견함 

3. 견우() - 동자가 멀리서 소를 발견함 

4. 득우(牛) -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씌움 

5. 목우() -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임 

6. 기우귀가() -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옴 

7. 망우존인() -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만 남아 있음

8. 인우구망() -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

9. 반본환원(源) 이제 주객이 텅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침

10. 입전수수() -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감

 

시 쓰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무엇이 시일까를 찾아 헤매다 시를 발견하고 시를 쓰다가 결국 시도 잊고 자신도 잊는 단계에 이르는 상태. 시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8. 인우구망 정도 아닐까 하는데...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 자체가 시가 되는 상태, 그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 자체도 시가 되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즉,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해탈은 자신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참선 이후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저잣거리로 나오지 않던가.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 시, 아니 사람들의 삶 자체도 시가 되는 경지... 그런 경지를 어쩌면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 멋대로의 곡해일 수 있지만, 불교의 십우도와 이 시집의 시들, 그리고 시론이 연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시들이냐고? 그냥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시만 인용해 본다. 이 시집의 시들은 다 이런 형식의 이런 내용의 시들이다.

 

담배

 

  깊은 밤 술에 취해 택시를 타면 담배 생각이 나고 난 기사 옆 자리에 앉아 기사에게 말한다 담배 한 대만 피웁시다 그러세요 어떤 기사는 허락하고 에이 좀 참으세요 어떤 기사는 참으란다 깊은 밤엔 많은 기사들이 담배를 허락하고 난 창문을 반쯤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가 떨어져 기사에게 담배를 빌릴 때도 있다 어느 해던가? 성냥을 켜던 나를 보고 기사가 말했지 선생님 이상하네요 아니 켜기 쉬운 라이터를 두고 왜 성냥을 넣고 다니십니까? 네 성냥이 좋아서요 라이터는 무겁고 성냥은 가볍잖아요? 그런 밤도 있었다

 

이승훈, 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2007년 초판 2쇄.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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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도시들에서 책읽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여러 도시에서 책 몇 권을 정해 돌아가며 읽기를 권장하고 있는데...

 

  이 시집은 부산에서 선정한 책이다. 이 시집을 읽고 소감을 쓰고, 돌려가며 읽으라고 했다. 2015년에.

 

  부산에서 추진한 책이라고 꼭 부산 사람들만 읽으라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다 이 책이 중고서점을 통해서 내 손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이 책을 부산에서 왜 선정했는지 대략 알만하다. 시라는 특성도 있지만, 이 시집에는 부산이 참 많이도 등장한다.

 

  부산의 정서를, 모습을, 문화를 시를 통해 표현해내고 있으니, 다른 마을에 사는 사람들보단 부산 사람들이 이 시들을 읽었을 때 좀더 공감하는 면이 많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꼭 부산 사람들에게만 친숙한 시들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누구나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시들이 많다는 뜻인데.

 

제목이 된 '금정산을 보낸다'가 부산에 있는 산인 금정산을 중동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안기는 그런 내용의 시. 조선시대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로 끌려가는 김상헌이 읊었다는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처럼 머나 먼 타국으로 가는 사람에게 고국을 기억할 수 있는 존재는 소중하다.

 

그 시조에서는 두고 떠나는데, 그래서 다시 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데, 중동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금정산을 함께 보내는 것은 고국을 언제든지 곁에 두고 있다는 것, 잊을 수 없다는 것, 꼭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비록 몸은 떠나 있더라도 마음은 늘 고국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절절한 마음이 녹아들어가 있는 시 '금정산을 보낸다'를 제목으로 삼았으니 부산 독서 릴레이 책으로도 적당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시집에는 바삐 살아가는 제 시간을 잊은, 또는 잃은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낸 시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에 나오는 회색신사들에게 시간을 빼앗기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냥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는 사람들,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남들보다 더 빨리 달리지 못하고 그냥 달리기만 하면 그것은 제자리라는 그런 역설. (거울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상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 과연 행복할까. 어떨 때는 멈춰야 하지 않을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책도 있던데.

 

시인은 이런 상황, 이런 모습을 시계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진화'에 빗대어서. 그것이 '진화'라면 곧 멸망이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시다.

 

한 해 이제 시작이다. 바쁘게 뛰기 보다는 좀더 천천히 걸을 수 있는 한 해, 걷다가 쉴 수 있으면 쉬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시간의 진화

 

옛날 시계 분침보다 시침이 더 길었다는 사실

분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

분침 따위 무시해도 좋은 잔챙이였다는 사실

그런 분침이 지금 시침을 졸병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

그렇게 사람들이 야금야금 시간을 다 파먹었다는 사실

이대로 가다간 초침이 제일 길어질 날 올 거라는 사실

그 아래 조금 작은 분침이 돌고

그 아래 시침은 떨어져 나와

서랍 속 다이어리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

 

최영철, 금정산을 보냈다. 산지니. 2015년.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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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의 황홀경
조용훈 / 문학동네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시골 -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다른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에 내려가 살던 저자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하다, 그 자연에서 시와 그림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옮긴 책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에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로움, 아름다움, 즐거움, 놀라움 등등을 느끼다가 문득 자연에서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그림을 떠올리면서 화가가 왜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하고, 다시 그림과 더불어 또 자연과 더불어 떠오르는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시와 그림과 자연이 하나로 저자의 마음 속에 파고든다. 그 파고듦을 혼자 누릴 수 없어 편지 형식의 글로 엮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편지 형식은 읽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순간 책을 쓴 이와 읽는 이 단 둘만이 존재한다. 책을 쓴 이가 자신이 느낀 것을 조근조근하게 읽는 이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사실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감정의 전달, 글을 쓴 이의 감정이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서 오롯이 읽는 이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그 장소에서 어떤 감정이었으며 무엇을 느꼈고, 그 때 떠올린 그림들과 시에 대해서 읽는 사람 역시 공감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특히 이 책은 가을에서 겨울의 초엽까지의 계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상실의 계절이기도 한 가을에서 느끼는 감정...

 

책의 시작은 그래서 고흐의 그림에서 시작한다. '감자 먹는 사람들' 결코 부유하지 않은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려 했던 고흐. 그는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과 공감하려 했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그렸으며, 이렇게 가난한 가족을 그렸다.

 

그런 그를 가을이 깊어가는 시점에서 떠올리고 있다. 황금빛 논을 바라보면서 벼를 생각하면서 고흐의 그림과 더불어 이성부의 시 '벼'를 소개하고, 이윤택의 시 '이런 정신주의를 경계함'을 떠올린다.

 

가을이 결실의 계절이라고 마냥 풍요로운 것이 아님을, 그 속에는 치열한 노동과 사람들의 땀이 배어 있음을, 그래서 이윤택의 시에서는 '논길은 .... 농부가 걸어가야 할 노동의 길'이라고 하지 않는다.

 

수확의 기쁨만을 누리는, 결실의 모습만 보고 환희에 젖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배인 땀을 알아봐야 하는 것, 그런 가을...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에 수록된 많은 글들이 그래서 자연을 객관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과 함께 하는 자연으로, 단순히 배경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에 깊숙히 들어와 사람 삶의 일부가 된 자연으로 이야기된다.

 

이런 자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을 화가는 어떻게 표현했고,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편지 형식으로 전해주고 있다.

 

아니, 화가와 시인의 표현을 전해주고 있다기보다는 그것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전해주고 있다. 그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듯이.

 

하여 시와 그림과 글이 하나로 엮여 감동을 준다. 예술이 각 분야로 찢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행을 갈 때 그곳에서 그동안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또 머리 속에 있던 예술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비단 저자의 느낌만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이 사람의 삶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자연과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삶과 예술과 자연이 하나로 엮여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잔잔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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