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의 역습 - 대가 없이 당신에게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
크레이그 램버트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일리치의 개념을 빌려와 현대인의 일상을 분석하고 있는 책인데,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이란 책에서 집안일처럼 임금에 기초한 경제에서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모든 일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했다. (17쪽 참조, 또는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 참조)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이제는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가 도래했는데, 그러면 인간은 자신들의 노동을 기계에 맡기고 더 많은 여가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이론상 그래야 하는데... 과연 우리에게 여가 시간이 늘어났는가? 하는 질문을 이 책은 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이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니, 이것은 분명이 기계화, 정보화 되었음에도, 아니 기계화 정보화 되면서 그림자 노동이 더 늘어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즉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여기서 임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예전에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즉, 예전에는 그 일을 누군가가 임금을 받고 일을 했는데, 기계화, 정보화 되면서 그 일을 포함하고 있는 일을 기계가 처리하고 (이런 기계 군단을 '키오스크'라고 한다. 무인정보화시스템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김포공항에 갔다가 그 키오스크를 보게 됐다. 당당하게 키오스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기계. 거기에서 직원 없이 직접 항공권을 뽑는 사람들) 그에 따르는, 누구 말로는 부수적인 일들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예전에는 주유소에 가면 주유를 해주고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냥 앉아서 카드만 내면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셀프 주유소가 많이 생겼다. 셀프 주유소에서는 내가 차에서 내려 직접 주유를 해야 한다.

 

주유를 해주던 사람은 임금을 받고 그 일을 했는데, 이제는 직접 내가 임금을 받지 않고 내 차에 기름을 넣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다.

 

비슷한 예가 바로 지금 이렇게 리뷰를 작성하는 일. 예전에는 서평을 기고가들이 돈을 받고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쓴다. 이렇게 시간을 쓰면서도 돈은 받지 않는다. 이것 역시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다.

 

이런 사례들이 이 책에는 많이 나온다. 매표를 하는 경우도 그렇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먹고 나오는 경우도 그렇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경우도 그렇다. 여기에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의 일은 더 많아졌다.

 

프랑스에서는 업무시간 외에 오는 상사의 이메일에는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명시한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하고, 우리나라 역시 이와 비슷한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단다.

 

그만큼 여가 시간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된 사회가 되었는데, 일을 지시하는 일 이외에도 이메일로 오는 수많은 스팸메일들을 확인하고 지우는 시간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노동 시간을 줄여준다는 기계들이 오히려 다른 일을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사회적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간이 돈이기 때문이다. 즉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지닌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자신의 돈을 소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상류층도 그림자 노동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그 일을 할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류층은 이런 변화된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림자 노동을 시킬 수가 없다. 자신이 온전히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가 시간이 늘어날 수가 없다. 오히려 노동 시간은 비슷하다고 해도 하지 않았던 일까지 떠맡게 된 것이 현실이다.

 

알게모르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기계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회색신사들에게 시간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시간을 많이 확보한다는 환상을 지닌 발달이 오히려 그림자 노동을 더 확산시킨 셈. 회색신사들의 꾀임에 빠진 소설 속 사람들처럼 우리는 참 바쁘게 산다.

 

바쁘게 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에 대한 대책은 나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시간은 돈이다'는 명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물어 보라. 왜 공부하니? 대학 가려고요? 왜 대학 가려고 하니? 돈 잘 벌려고요. 왜 돈을 벌려고 하니? 행복하게 잘 살려고요. 그럼 지금 행복하니? 아니요.

 

삶의 목표는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결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수단인 돈을 벌기 위해 행복을 희생시키고 있는 현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그럼 대책이 뭔가? 답은 명확하다. 시간이 중요하다.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은 내가 자유롭게 쓸 시간이라는 의미다. 돈을 버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즐기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돈을 쓸 수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또 내가 쓸 수 있는 시간보다 더 빨리 하기 위해 기계를 확산하는 것보다, 조금 벌더라도 내가 쓸 수 있는 만큼 벌고 나머지 시간은 여유롭고 자유롭게 보낼 시간을 확보하는 것.

 

나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너무 빠른 속도의 기계를 거부할 수도 있는 것. 미국에서도 셀프 주유소를 금지하고 있는 주가 있다는 사실... 이런 사실이 더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회색신사로부터 그림자 노동의 역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 아닐까.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대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계가 처음 나왔던 시대처럼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 운동)'을 벌일 수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슬로 라이프라고 천천히 여유롭게 살기 운동을 전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행복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그리고 인터넷 속에, 스마트 폰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시간, 그런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 가는 것.

 

조금 더디더라도 일자리를 나누는 것, 기계에 모든 일자리를 주지 않는 것, 아마도 인공지능이 모든 직업에 잠식한다면 사람들에게 여가 시간이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즐길 수 없는 생계 불능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우리 모두가 조금씩 불편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지니고, 더 즐거운 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요즘 그런 느리게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대안을 제시 못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대안은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이 시대의 방향을 틀거나 반대로 돌려야 하는데, 그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제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더 많은 여가 시간,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문제는 제기해야 한다. 문제를 알아야 해답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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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2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트런드러셀의 <게으름에대한찬양>에서 주장하는 철학과 일맥상통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kinye91 2017-02-25 18:13   좋아요 1 | URL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란 책은 그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기는 하지만 통하는 면도 꽤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은 빨리빨리 문화나, 또 자동화, 기계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니까요.
 

  시집 전체가 불행으로 꽉 차 있다. 시들이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 모두 불행이다.

 

  어쩌면 이렇게 징글징글하게 불행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 어둠 속에 고통 속에 불행 속에 있을까?

 

  어떤 시를 펼쳐보아도 불행이 나타난다. 마치 피할 수 없다는 듯이. 제목이 좀 밝은 느낌을 줘서 읽어보면 아니다. 제목과 달리 내용은 불행으로 점철된다.

 

  시인을 등단하게 한 시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란 시를 보면 시인의 출발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반지하동굴이라면 반지하 생활, 이미 낮은 곳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유적지란 말이 나온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담담하게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시집에는 이렇게 죽음을 당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아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그게 현실이다. 현실, 시인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런 현실을 보여준다. 이게 현실이라고. 아무리 눈 감고 귀 막아도 이런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외치는 시인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등단작이 반지하에서 시작하는데 지상으로 올라와도 사람들은 목을 매달고(누가 달에 이불을 널어놓는가), 공중으로 올라가도 떨어져 죽고 만다. (땅속을 나는 새)

 

이 시집에서처럼 불행한 시대에 우리 사회에는 도처에 죽음이 존재한다. 죽고 싶어서 죽는 죽음이 아니라 살기 위해 바둥대다 죽는 죽음, 결국 사회적 타살이라 할 수 있는 죽음들이 사회 곳곳에 있기 때문에 그런 불행들이 이 시집 곳곳에 널려 있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지니고 있는 나라인데, 자살만이 아니라 사고로 죽는 죽음도 많은 이 나라, 시인은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나 보다.

 

이토록 불행한 사연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음에도 시집을 탁 덮지 못하는 이유는 시인의 표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불행하고 힘든 현실이지만 그 현실을 언어로 표현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까지만 한 시인, 다음은 우리의 몫이라고 하는 듯하다. 시인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여줬으니까.

 

이 시집에서 가장 짧은 시를 골라 봤다. 짧은데, 이 짧음 속에서도 불행은 끝나지 않는다. 제목과 달리.

 

   만찬

 

밥상을 앞에 놓고

빈 그릇처럼 둘러앉은 식구들

한 대접씩 빗물을 퍼먹고 있다

 

김성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 2010년 초판 6쇄.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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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그림 여행
정지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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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림은 평면이 아니라 깊이다!"

 

이 책의 맨 뒷표지에 실려 있는 글이다. 신영복 선생의 추천의 글인지도 모르겠다. 그 밑에 일리야 레핀의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란 그림이 하나 나오고,  신영복 선생의 글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림은 평면에 그려졌지만 그 평면에는 상당한 깊이가 있다. 그 깊이를 읽어내는 마음이 바로 그림을 보는 영혼의 힘이다.

 

많은 작가들과 그림이 나오지만, 대체로 한 작가의 두 그림을 소개하고, 그 그림에서 느끼는 감정을 펼쳐나가고 있는데, 시인이어서 그런지 글이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 게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루하지 않다.

 

진보쪽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되는 글들이 도처에 실려 있고, 그래서 그런지 그림을 통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있으며, 뒷표지에 있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쉽게 민주화 운동 당시에 수배당하고 쫓기고 탄압받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그러할 것이다. 또 그런 내용이 이 그림에 대한 부분에서 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꼭 진보쪽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진보하면 이상하게 딱딱하고 경직된 무언가 진지하게 이야기만 해야 하는 사상이라고 이야기하기 쉬운데, 그건 아니다.

 

사회 혁명에 동조했던 샤갈, 그러나 그가 생각한 진보, 혁명과 실제 사회와는 다름을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고, 이런 샤갈의 그림은 책의 앞표지에 나와 있다. 샤갈의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라일락 속의 연인들]

 

이렇게 환상적인 아름다움 속에 연인이 서로 함께 있는 것,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고 혁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이 책에서는 두 그림이 내게는 처음과 끝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 상황과 관련지어 이 두 그림이 머리 속에서 또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나는 고야의 [이성의 잠은 요괴를 부른다]이고, 또 하나는 오윤의 [애비]다.

 

이성이 잠들 때 우리는 사회의 진보를 이끌 수 없다. 특히 자신의 이성을 잠재우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암울할 뿐이다.

 

   어떻게 이 그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아무리 잘해왔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순간에 잠들면 결국 괴물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

 

  하여 일은 끝나야 끝나는 것. 그때까지는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도록 할 것.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정에 휘둘려 이성이 잠들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그림은 그것을 명심하도록 해주고 있다.

 

여기에 오윤의 [애비]는 아들을 데리고 또는 아들을 보호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본인도 힘들지만 그래도 미래 세대인 아들을 지키고 보호해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 그림인데... (그림은 책을 참조... 저작권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2008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도 광장의 촛불은 시들지 않는다. 유장하게 퍼져나가는 '징소리'처럼 오윤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넘어 깊고 뜨거운 사랑과 연대의 자유를 되찾게 일깨워준다. 광장은 열려 있고 우리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서로의 촛불에 심지를 밝혀주며, 서로의 '애비'가 되어 서로를 굳세게 지켜주며, 마침내 길이 되어간다.' (279쪽)

 

이때 애비는 약자를 지켜주는 애비다. 결코 강한 자가 더 큰소리치게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애비가 아니다. 강한 자임에도 강한 자임을 부정하는, 약자 코스프레,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는 누군가를 지키는 그런 애비들이 아니다.

 

이 애비는 이 책의 238쪽에서 인용한 백석의 시처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들을 보듬고 그들과 함께 가는, 그래서 그들의 앞날이 밝아가게 하는 그런 애비인 것이다.

 

근 10년 전 책임에도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들, 그리고 그림을 보고 느낀 생각들이다.

 

이성이 잠들지 않도록 하고, 약자 코스프레를 도와주는 그런 애비가 아니라 진실로 약한 존재들이 고통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함께 보듬고 가는 그런 아버지가 필요한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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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종양까지 갖고 있냐


몸에 종양이 있어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에

친구가 대뜸 한 말

내가 그렇게 욕심이 많았나

비워두어야 다른 것들이 살 수 있는데

욕심이 지나쳐 종양까지도 내게 머물러

담장을 치고 있나

불현듯

빈집 운동이 생각이 나고

비움이 이렇듯 채움이 될 수 있는 세상에

비우지 못해 안달이 나

다른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철책까지 두르는

아파트들을 보며

이들이 이렇게 비워두지 않고

제 욕심을 차리면

몸 속 종양과 무엇이 다를까하는 생각도 하고

몸에 깃든 세균들이

세들어 산다고 하는 어느 시인의 시를 떠올리고 (이은봉, '셋집')

비우지 못했기에

철책을 두른 종양이 몸에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삶에 대한 반성


욕심을 비워야한다는, 그래야 삶이 채워진다는

그런 반성을 하게 한 몸 속 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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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22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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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펼쳤다가 조금 읽다가 다시 내려놓은 책인지 모른다.

 

도대체 무슨 소설이 이래? 하다가, 이건 소설도 아니다, 소설에 무슨 주가 더 많냐 하다가, 그만두자 하다가 그래도 보르헤스인데, 자꾸 인용이 되는 작가인데 한 권쯤은 아니 한 편쯤은 읽어야 하지 않나 하다가.

 

몇 년을 묵혀두었다가 다시 펼쳐 들고 읽어도 역시 모르겠다.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하는데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진술을 하고 있지만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여 놓은 것이 보르헤스의 소설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알 수가 없다.

 

환상과 사실을 구분하기 힘드니... 참.

 

이 책에는 많은 단편들이 묶여 있는데, 이 단편집의 이름이 [픽션들]이다. 픽션이란 허구라는 뜻이니 이 소설들에서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이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는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그것들이 어떻게 교묘하게 비틀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소설들이 대부분이고, 2부는 그래도 나름대로 사건이 있는 소설들이 제법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물과 인물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기보다는, 인물과 인물의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이 묘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안개 속을 헤매듯 흐릿한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런 갈등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 '죽음과 나침반' 정도 또는 '칼의 형상' 정도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1부의 소설을 읽다가 혹시 몇백억 년이 지나서 지금의 역사가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이 소설을 발견한다면, 이것을 소설로 볼까 역사로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이 소설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재구성한 역사를 마치 정통한 역사인 양 가르치고 배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만큼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역사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1부에 실린 소설 제목 몇 개를 보자.

 

'틀뢴, 우크발,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바빌로니아의 복권', '바벨의 도서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소설을 읽게 되면 무슨 고고학적 사실을 추구하는 연구서 정도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분명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이니까. 소설이라고 알고 읽기 때문이다.

 

그다지 마음에는 와닿지 않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다 읽었다는 점, 읽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속도가 붙고 흥미도 생긴다는 점. 무엇이라고 딱 정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 못 읽을 소설도 아니라는 점.

 

특히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사고를 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점, 우리가 세세한 점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억만으로는 안 된다는 점.

 

사실들을 꿰는 일반화, 개념화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직접 주장하고 있고, 이는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적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사실들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어떤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기도 했고...

 

역시 소설을 읽을 때 명심해야 할 것들은 지엽적인 사건, 사실들 하나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면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신자와 영웅이 같은 인물일 수도 있다는 점, 영웅에게서 어쩌면 우리를 배신하는 배신자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역시 보르헤스의 소설은 어렵다. 다시 읽어도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서양의 문학과 역사,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느 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비틀었는지를 알고 읽으면 보르헤스의 소설이 재미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비록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럽의 문화, 문학, 역사, 지리를 안다면 이 소설들 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많은 요소들이 한 줄로 꿰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아직은 그렇지 못하기에 그의 소설은 어렵다.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다. 그러나 주를 무시하고 그냥 본문만 소설이지 하면서 읽으면 그리 못 읽을 소설도 아니다. 이해나 해석은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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