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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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제목에서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절벽 끝에서 한 발을 내딛는 용기. 그것은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행위다. 끝이라고 더이상 갈 곳이 없다고 뒤돌아서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얻으려면 끝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한 발 더 내딛기 위해서.

 

르 귄의 이 책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너머로 가고자 하는 르 귄의 노력이 글 속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그렇게 르 귄은 자신을 옥죄는 세계에 갇히지 않고 그 세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나아갔다. 또 작가로서 르 귄을 말한다면 르 귄은 이미 존재하는 세상만이 아니라 상상 속의 세상을 창조해냈다. 그야말로 '세상 끝에서 춤을 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러한 르 귄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된다.

 

  소설, 일반적으로 서사는, 주어진 사실에 대한 가장이나 왜곡이 아니라 선택지와 대안들을 제기하여 환경에 적극적으로 직면하는 과정이자, 현재 현실을 증명할 수 없는 과거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연결하여 확장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85-86쪽)

 

이보다 세상 끝에서 춤을 춘다는 말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을까? 소설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한 세계에서 멈추지 않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해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상상력만이 우리를 영원한 현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으며, 상상력이 길을 발명하거나 가정하거나 꾸며 내거나 발견하면 그제야 이성이 그 길을 따라 무한한 선택지 안으로 뛰어들 수 있다. 선택의 미로 안을 통과하는 하나의 단서이며 미궁 속의 금실인 그 길, 이야기가 우리를 제대로 인간일 수 있는 자유로 이끌어 준다. 비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86-87쪽)

 

소설도 그렇고 이야기도 그렇고 핵심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은 법의 굴레에 매여 산다. 이들은 세상 끝까지 가지도 않지만, 만약 가게 되더라도 곧 되돌아 온다. 그들에게는 그곳에서 한 발 앞으로 내딜 상상력, 용기가 없다.

 

그래서 르 귄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면 물론 오래된 세계로 시작해야죠. 세계를 하나 찾으려면, 잃어버린 세계가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잃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부활의 춤, 세계를 만드는 춤은 언제나 여기 세상 끝에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안개 낀 해안에서 추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92쪽)

 

그렇다면 이런 상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와 떨어져 존재하는가? 아니다. 상상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찾지 않고 있을 뿐. 또는 찾아도 무시하고 있었을 뿐. 르 귄의 말을 보자. 이것이 바로 상상이고 문학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실제로 보는 건 우리 머릿속에 든 무언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꿈이죠. 좋은 것도, 나쁜 것도요. (252쪽)

 

이런 상상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언어가 중요하다. 결국 우리 생각은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언어 없는 문학을 상상해보라.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러니 어떤 언어를 쓰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르 귄은 지배의 언어와 협동의 언어를 구분한다. 지배의 언어는 그동안 세상을 지배해 왔던 남성의 언어다. 협동의 언어는 그와 다른 언어다. 그의 말을 보자.

 

  어머니말은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예요. 어머니말은 연결해요. 쌍방향으로, 아니 많은 방향으로 오가는 교환의 연결망이에요. 어머니말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벌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어요. (263-264쪽)

 

이런데도 아직 사회는 강력한 권위를 지닌 말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사용하도록 교육한다.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르 귄은 이렇게 비판한다.

 

  가부장제 교육시설인 우리의 학교와 대학들은 보통 우리에게 힘을 가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아버지말을 하는 남자나 여자들의 말을 들으라고 가르치죠. 따라서 어머니말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가난한 남자, 여자, 아이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쳐요. 그런 사람들의 말을 타당한 담화로 듣지 말라고요.

  저는 이런 가르침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267쪽)

 

하지만 이런 일은 쉽지 않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르 귄 역시 자신은 배운 것을 잊는데 느린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을 완전히 잊기 위해서는 세상 끝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서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르 귄에게 이것은 바로 작품 활동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비영웅적 이야기다.(298쪽) ... 소설의 자연스럽고 적절하며 알맞은 형태는 자루나 가방일지 모른다고 말하련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는다. 의미를 품는다. 소설은 약보따리이며 그 속에 담긴 것들은 서로와, 그리고 우리와 특별하고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다. (299쪽)

 

그렇다. 바로 이것이 르 귄이 소설을 쓰는 이유다. 말을, 사물을, 의미를 담은 그릇. 그래서 르 귄 소설은 약보따리다. 우리에게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게 해주고 다른 세계를 보게 해준다. 그야말로 틀에 갇히지 않고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마음껏 만나게 해준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도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이런 점들, 문학을 통해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음을 르 귄은 이 책 [세상 끝에서 춤추다]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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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06 0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선택지와 대안들을 제기하여 환경에 적극적으로 직면하는 과정, 현실을 과거와 미래에 연결하여 확장하는 방법 💥 💥 💥

kinye91 2021-12-06 09:12   좋아요 1 | URL
르 귄의 문학에 대한 생각에 대한 글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해주고 있어서 좋았어요.

프레이야 2021-12-06 09: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르 귄의 이런 책이 있군요. 리뷰 고맙습니다.
책 담아가요^^
˝완전히 잊기 위해서는 세상 끝까지 가서 그곳에서 춤을 추어야 한다.˝
문장도 함께.

kinye91 2021-12-06 11:54   좋아요 2 | URL
르 귄 소설도 좋지만, 이렇게 여러 글을 모아놓은 책도 좋더라고요.

러블리땡 2022-01-08 0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kinye91 2022-01-08 05:5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1-08 0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kinye91 2022-01-08 05: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님께서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1-08 0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감사합니다!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청소년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청소년들이 직접 쓴 시라면 더욱 그 마음을 알게 되겠지만, 시인이란 존재는 본래 철이 없는 존재라, 청소년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청소년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들 중에서 어른이 쓴 시들이 많은데, 누가 썼느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마음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청소년시집을 낸 시인들 중에 교사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청소년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직업이 교사일테니.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느끼는 마음들을 많이 느꼈을테니


이 시집을 쓴 이정록 시인도 교사다. 시집을 읽다보면 학생들을 이해해주는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가 쓴 시 '의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의자가 되어주라는 어머니 말씀을 시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런 시인이 교사라면 학생들이 언제라도 와서 쉬면서 기댈 수 있는 의자가 되어 주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시인에게는 지금 청소년들이 살아갈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졌으리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서 지내게 될 사회가 그들에게 즐거움과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세상을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슬픈 종착'을 보면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슬픈 종착


규직이는 좋겠다.

서른 살쯤이면 너를 더 좋아할 거야.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 거야.

약사 세무사가 꿈인 친구도

검사 변호사 감리사 사업가가 꿈인 애들도

다들 주문처럼 네 이름만 부를 거야.

규직아, 오, 정규직아.


이정록, 까짓것, 창비. 2017년. 44쪽.


이런 상황이 슬픈 종착이 아니라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슬픈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나이가 거의 서른으로 되어가는 지금, 그들에게는 정규직이라는 말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낱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그것을 인식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알게 하고 있지 않은지.


슬픈 종착이 아니라 이미 슬픈 출발을 하게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는데...


청소년 시집을 읽으며 희망보다는 불안을 느끼다니... 아니,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후대가 살아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이 시에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사로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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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없는 아이들 -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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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 이주아동은 공부할 권리는 있지만 살아갈 자격은 없는 모순된 현실에서 '있지만 없는 아이들'로 자라는 것이다.' (8쪽)


이것도 법이 바뀌어서 공부할 권리가 생겼다. 그 전에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학교에 가려고 해도 가기가 힘들었다. 배울 권리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지냈던 현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학교를 갈 수 있게 하고 있으니. 그러나 학교까지만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학교를 마치면 곧 출국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여기서 태어나 (또는 아주 어린시절에 들어와) 자랐기 때문에 삶터가 바로 우리나라인데,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한다. 떠나지 않으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법체류자가 된다.


이미 이들 아동의 부모들은 불법체류자가 (이 말을 쓰지 말자고 이 책을 쓴 은유 작가는 말한다.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을 어겼다고 하기 보다는 단지 등록이 안 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고) 되었다. 그래서 단속에 걸리면 추방당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학습권을 보장했다고 하지만, 부모 없이 어떻게 학교를 마칠 수 있겠으며,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부모의 나라로 가야 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어 버린다.


이 책 말미에 보면 최근에 법이 바뀌었다고 한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 조금, 아주 조금 유리하게 바뀌었는데, 이게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법무부는 2021년 4월 '국내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 시행방안'을 발표했다. (범부부 용어에서도 불법체류라는 말이 나오다니... 외국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용어다) 한국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한국에 체류한 미등록 이주아동들에 한해 체류자격을 심사받을 기회를 준다. (229쪽)


이 조항에 의하면 부모를 따라 아주 어릴 적에 온 아동은 해당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부모를 따라와서 우리나라에서 초,중,고를 다녔다면 최소한 12년을 살게 된다. 그런데도 체류자격을 심사받을 자격조차 받지 못한다. 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고 하더라도, 영주권이 나오지 않고 겨우 체류자격 심사받을 기회만 주어진다. 뭐야? 만약 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우리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거나, 아니면 부모들처럼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어 버려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또는 아주 어릴 적에 와) 여기서 자랐다면 언어나 친구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 부모 나라는 외국이나 다름없다. 그런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하면 어떤 아동들이 가려고 하겠는가. 가려는 마음도 없겠지만 가도 우리나라에서보다 잘살 수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법무부에서 발표한 이 대책도 보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에는 이런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을 돕는 사람들 이야기, 부모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다. 운 좋게(?) 비자를 받은 아이도 있지만, 비자를 받지 못해(비자다. 영주권이 아니라)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아이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구보다도 국어(한국어)와 역사(한국역사)를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지만 대학에는 갈 수 없는 아이, 비자가 없어서 통장도 만들 수 없는 아이, 그래서 비행기도 탈 수 없고, 공연장에도 갈 수 없는 아이의 이야기가 가슴을 때린다.


정말로 '있지만 없는 아이'가 되어버린 그 아이들의 이야기에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랑스러워 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선진국이라면 적어도 사람을 등록, 미등록으로 나누기 전에 그들이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이 되었다가 이제는 선진국이 되었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쥬라는 말이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면 사람을 국적으로 나누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보고,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또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와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까지(이제는 고등학교까지가 거의 무상교육이니) 다녔다면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권리를 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선진국이 지녀야 할 의무 아닐까. 여전히 '있지만 없는 아이들' 이 많다고 한다. 수십 만에 해당한다고 한다. 인구 절벽을 실감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국적으로 사람을, 그것도 아동들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국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미국 시민권을 주는 경우와 같이 그런 아동들에게는 우리나라 영주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국적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회의 품격이 달라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 사회의 품격이 높아지려면 이들을 먼저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사람이 지녀야 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쪽으로 정책이나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사회의 품격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판명 된다. 그들을 지칭하는 언어에서도 사회의 품격이 나오고. 앞에서 '불법체류'라는 말을 썼지만, 이 말에는 이미 법을 어긴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이런 말 대신에 '미등록 이주'라는 말을 쓰자고 한다. 찬성한다. 


단지 등록이 안 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이 등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있지만 없는' 이 아니라 '있으면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책은 그렇게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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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보이는창 2021년 가을호. 127호다. 이제는 나에게 오는 몇 안 되는 잡지다. 예전에 구독하던 많은 잡지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거나 내가 떠나가게 했는데...

 

  노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에 실린 이인휘 소설(시인, 강이산)이 마음에 와 닿았다. 와 닿은 정도가 아니라, 입에 이름을 담기 싫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도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꼴이 싫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득세하던 시절, 그리고 그가 뿌린 씨앗들이 득세하던 시절을 오롯이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로 실려 있으니...

 

 물론 강이산으로 등장하는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1980-19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시대의 격랑에 온몸을 맡기고 살아갔던 사람, 그 시대의 격랑에 결국 부서져 버린 사람. 이름을 입에 담기 싫은 사람이 아무런 사과도 용서도 구하지 않고 사라져버린 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은 분이 차가운 물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용서받지 못할 그 누구는 거대한 병원장례식장에서 그가 뿌린 씨앗들의 조문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차가운, 딱딱한 곳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으니...

 

격동의 시대가 지나고, 인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우리도 이제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하는 이 시대에도, 좋지 않은 과거와 연결된 끈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인휘가 쓴, '시인 강이산'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번 호에서 이 소설을 온전히 읽을 수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마음에 무거운 짐이 들어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연 우리는 이 소설의 주인공 강이산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을까?

 

우리는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을까?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승해야 한다고, 더 멀리 가면 4·19혁명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87년 민주화 운동을, 촛불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쩌면 자꾸 과거를 잊어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사람 대접도 못 받고 개 끌려 가듯 경찰에게 끌려가는 장면,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친구를 도와줬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사람이 결국 죽음에 이르는 장면, 그러면서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자책하면서 세상에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강이산의 모습.

 

과거로 머물렀으면 좋겠는데,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는 생각에 씁쓸하면서도 마음이 아려왔으니...

 

'삶이 보이는 창'. 여전히 우리에게 가야할 길이 있음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있음을, 이런 소설을 비롯해서 여러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삶이 보이는 창'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 과거 악의 씨앗들이 자라나지 못하게, 좋은 씨앗들이 살아갈 수 있게, 우리들 마음을 다잡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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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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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슐러 르 귄. 


요즘 들어 관심을 가진 작가다. 한두 작품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 여러 권을 사서 읽게 되었다. 빌려 읽은 소설도 있지만, 왠지 소장하고 싶은 작가의 작품이다. 소설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쓴 글도 좋다. 그런 글에서 마음의 울림을 느낀다. 그러니 어찌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권 두권 계속 사 모으기로 하고, 이번에는 '밤의 언어'라는 르 귄이 쓴 소설이 아닌 다른 글들을 편집한 책을 읽게 되었다.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책을 사서 읽었지만,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발간이 되었다고 하는데도, 읽는데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당시 르 귄이 느꼈던 문제들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동안 거의 50년이 흐르는 동안 무엇을 했는가 자괴감도 든다.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르 귄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게 왜?" 라고.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왼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있다. 또 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과격, 편협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 그럴까? 아직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대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남성이고 여성이고 또는 다른 성을 추구하든지 간에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을텐데...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앞세우고, 거기서 성별로 나는 차이를 인정하면 차이가 차별이 되지는 않을텐데, 아직도 그러니, 당시 르 귄이 난 페미니스트다. 그게 왜 문제인가라고 말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읽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SF작품이라고 하지만, 그런 용어를 쓰기 이전에 먼저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르 귄의 글을 읽고 더 강하게 들었지만...


이처럼 이 책에 실린 어느 글을 읽어도 좋다. 작가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글쓰기에 관한 글들이 실려 있어서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 그냥 아무 글이나 펼쳐서 읽어도 르 귄이라는 사람을 알아갈 수 있다.


몇몇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환상 작가들은, 신화와 전설이라는 고대의 원형을 인용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보다 젊은 과학과 기술의 원형을 끌어들이는 사람이든, 사회학자들만큼이나 진지하고 어쩌면 훨씬 직설적으로,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인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8쪽)


이것이 바로 이런 소설을 읽은 이유가 되고, 르 귄이 이렇게 평가받는 작품을 쓰는 이유다.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해서 르 귄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 한쪽으로 규정하는 일은 잘못이다. 소설은 소설일뿐이다. 소설이라는 큰틀을 인정하고, 소설에서 작가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찾아야 한다. 


작품을 하위 분야로 분류하고, 그 틀에 가두는 일이 문제가 있음을, 그렇게 틀로 나누고 가둬 그 작가를, 또는 그 작품을 이해하는데 한 가지 틀만 제시하면 안 된다고...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르 귄은 이 책 도처에서 하고 있다.


  상상력을 위협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보통 판타지 작품을 '유치하다'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이런 배제야말로 자신이 무력하며 노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할 때는 어린아이의 역할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이득에 눈이 먼 상인, 관능주의자들은 상상 세계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다.(294-295쪽)


자ㅡ 우리는 얼마나 상상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또 즐기고 있는가. 예전 생각을 해보자. 학창시절에 소설책을(어떤 소설책이든 상관없었다. 세계 명작이든, 추리소설이든, 로맨스 소설이든) 읽다가 교사에게 걸리면 교사들은 대뜸 공부 안하고 이런 것이나 읽고 있느냐고 야단을 쳤다.


상상력이 가장 잘 발휘된 문학 작품을 꿈으로 가득 찬 시기에 들어선 청소년들이 읽다가 야단을 맞는 경우, 이런 경우 우리는 더이상 상상력을 지닌 존재로, 세상을 새로움이 가득찬 경이로운 세계로 보는 눈을 지닌 존재로 지낼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자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자라왔다고, 후대 세대들에게까지 이런 모습을 강요해야 하는가. 입시라는 굴레로 여전히 상상력이 억압당하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시험 점수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해야 하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우리가 상상의 세계를 완전히 막아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니 판타지라고 하든 환상이라고 하든, 아니면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든 읽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는 이 현실에서 르 귄이 말하고 있는 앞 구절은 우리에겐 아프게 다가온다. 그것을 '유치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 자신이 늙어버린, 무력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이...


제목이 된 '밤의 언어'. 자, 밤은 명징함을 넘어서 상상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는 때다. 밤의 언어는 바로 그런 상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하는 언어...


르 귄의 글은 바로 그런 밤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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