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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평점 :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제목에서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절벽 끝에서 한 발을 내딛는 용기. 그것은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행위다. 끝이라고 더이상 갈 곳이 없다고 뒤돌아서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얻으려면 끝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한 발 더 내딛기 위해서.
르 귄의 이 책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너머로 가고자 하는 르 귄의 노력이 글 속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그렇게 르 귄은 자신을 옥죄는 세계에 갇히지 않고 그 세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나아갔다. 또 작가로서 르 귄을 말한다면 르 귄은 이미 존재하는 세상만이 아니라 상상 속의 세상을 창조해냈다. 그야말로 '세상 끝에서 춤을 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러한 르 귄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된다.
소설, 일반적으로 서사는, 주어진 사실에 대한 가장이나 왜곡이 아니라 선택지와 대안들을 제기하여 환경에 적극적으로 직면하는 과정이자, 현재 현실을 증명할 수 없는 과거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연결하여 확장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85-86쪽)
이보다 세상 끝에서 춤을 춘다는 말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을까? 소설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한 세계에서 멈추지 않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해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상상력만이 우리를 영원한 현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으며, 상상력이 길을 발명하거나 가정하거나 꾸며 내거나 발견하면 그제야 이성이 그 길을 따라 무한한 선택지 안으로 뛰어들 수 있다. 선택의 미로 안을 통과하는 하나의 단서이며 미궁 속의 금실인 그 길, 이야기가 우리를 제대로 인간일 수 있는 자유로 이끌어 준다. 비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86-87쪽)
소설도 그렇고 이야기도 그렇고 핵심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은 법의 굴레에 매여 산다. 이들은 세상 끝까지 가지도 않지만, 만약 가게 되더라도 곧 되돌아 온다. 그들에게는 그곳에서 한 발 앞으로 내딜 상상력, 용기가 없다.
그래서 르 귄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면 물론 오래된 세계로 시작해야죠. 세계를 하나 찾으려면, 잃어버린 세계가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잃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부활의 춤, 세계를 만드는 춤은 언제나 여기 세상 끝에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안개 낀 해안에서 추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92쪽)
그렇다면 이런 상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와 떨어져 존재하는가? 아니다. 상상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찾지 않고 있을 뿐. 또는 찾아도 무시하고 있었을 뿐. 르 귄의 말을 보자. 이것이 바로 상상이고 문학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실제로 보는 건 우리 머릿속에 든 무언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꿈이죠. 좋은 것도, 나쁜 것도요. (252쪽)
이런 상상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언어가 중요하다. 결국 우리 생각은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언어 없는 문학을 상상해보라.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러니 어떤 언어를 쓰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르 귄은 지배의 언어와 협동의 언어를 구분한다. 지배의 언어는 그동안 세상을 지배해 왔던 남성의 언어다. 협동의 언어는 그와 다른 언어다. 그의 말을 보자.
어머니말은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예요. 어머니말은 연결해요. 쌍방향으로, 아니 많은 방향으로 오가는 교환의 연결망이에요. 어머니말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벌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어요. (263-264쪽)
이런데도 아직 사회는 강력한 권위를 지닌 말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사용하도록 교육한다.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르 귄은 이렇게 비판한다.
가부장제 교육시설인 우리의 학교와 대학들은 보통 우리에게 힘을 가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아버지말을 하는 남자나 여자들의 말을 들으라고 가르치죠. 따라서 어머니말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가난한 남자, 여자, 아이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쳐요. 그런 사람들의 말을 타당한 담화로 듣지 말라고요.
저는 이런 가르침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267쪽)
하지만 이런 일은 쉽지 않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르 귄 역시 자신은 배운 것을 잊는데 느린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을 완전히 잊기 위해서는 세상 끝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서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르 귄에게 이것은 바로 작품 활동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비영웅적 이야기다.(298쪽) ... 소설의 자연스럽고 적절하며 알맞은 형태는 자루나 가방일지 모른다고 말하련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는다. 의미를 품는다. 소설은 약보따리이며 그 속에 담긴 것들은 서로와, 그리고 우리와 특별하고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다. (299쪽)
그렇다. 바로 이것이 르 귄이 소설을 쓰는 이유다. 말을, 사물을, 의미를 담은 그릇. 그래서 르 귄 소설은 약보따리다. 우리에게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게 해주고 다른 세계를 보게 해준다. 그야말로 틀에 갇히지 않고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마음껏 만나게 해준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도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이런 점들, 문학을 통해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음을 르 귄은 이 책 [세상 끝에서 춤추다]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