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밖의 이름들 - 법 테두리 바깥의 정의를 찾아서
서혜진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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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끝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변호사님은 무슨 일을 주로 하세요?"

이 질문을 여전히 종종 받는다. 예전에는 그 질문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조금은 단단하게 말할 수 있다. "저는 피해자를 위한 일을 주로 합니다." (253쪽)


변호사에게 무슨 일을 주로 하느냐는 질문은 아마 당신은 무슨 사건을 주로 맡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다양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들이 있으니까.


그러니 이런 질문을 받으면 변호사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느낌에, 아마 내밀한 무엇을 끄집어 낸다는 느낌에 답을 하기가 꺼려졌을 수도 있다.


검찰에도 '특수통'이니 '공안통'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으니 변호사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법이 언론에 자주 거론되는 때에 변호사에게 무슨 일을 주로 하세요라고 질문한다면, 그 질문에 담겨 있는 의도를 파악하려 할 것이다.


'변호사'라는 말을 풀이하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변호-사(辯護士)「명사」 『법률』 법률에 규정된 자격을 가지고 소송 당사자나 관계인의 의뢰 또는 법원의 명령에 따라 피고나 원고를 변론하며 그 밖의 법률에 관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변호사라는 말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러나 변호사에게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마음?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마음? 아니면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도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 그도 아니면?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설마 변호사가 돈을 추구하지는 않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니까.


그런데 전에 읽은 [시장으로 간 성폭력]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돈을 목표로 성폭력 가해자를 변호하고, 그런 변호의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더욱 괴롭히는 변호사 이야기였으니까. 가해자를 적극 옹호하는 변호사들도 있으니까. 왜? 그의 행동을 지지해서? 글쎄? 


물론 가해자도 변호를 받아야 한다. 그건 최소한의 인권이니까. 그러나 마음이 있는 변호사라면 가해자의 잘못을 확실히 지적하고, 그 잘못에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변호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해자의 변호는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보다 더한 벌을 받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이것을 넘어서서 온갖 법기술을 동원해서 가해자를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변호사, 금력, 권력을 지닌 사람들을 변호해 그들이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는 변호사. 이런 사람을 변호사라고 할 수 있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변호사라고 할 수 있겠지. 법률에 관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변호사들과 구분하기 위해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권변호사'하면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변호사라면 당연히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을까, 또 변호사라면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을 변호사라고 한다면 굳이 '인권'이란 말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호사는 모두 사람의 인권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이 글의 저자는 그래서 인권 변호사라는 말을 거부한다. 또한 자신은 거창한 사명감 때문에 피해자를 위한 일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적어도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변호사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일을 할 테고,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인권은 기본이 될 테니까. 또한 변호사 역시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 또 자신의 마음이 가는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테니, 그런 변호사여야 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많은 피해자가 나온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일,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일들을 어렵사리 공론화 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할 때, 함께 있어주는 변호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되겠는가. 그런 힘이 되어주는 변호사가 바로 이 책의 저자다. 그러니 그가 '피해자를 위한 일'을 주로 한다고 하는 말을 수긍할 수 있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법률로 대응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마음이 없을 것 같은 법에 마음을 담으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은 변호사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법에 마음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에 이런 변호사들이 더 잘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힘이 있는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법정 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 하여 '법에도 마음이 있'(250쪽)고 믿는 변호사들이.


이런 변호사들로 인해 법은 특정인들만이 다루는 분야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법의 보호를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앞에 읽었던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호의에 대하여]에도 나오듯이 착한 사람들이 법을 알아야 하고, 착한 사람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변호사들이 많다면 '피해자들을 위한 일을 하는 변호사'이기 전에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변호사'라는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법정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는 변호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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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11-19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턱이 높은 곳...예전부터 병원과 법원이란 공간이 그런 곳 아닐까요. 그런 문턱을 낮추는 사람이야말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턱 낮은 곳을 좋아합니다~

kinye91 2025-11-19 08: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문턱을 찾아 낮추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저도 존경합니다.
 
리커넥트 - 누구나 한 번은 혼자가 된다
장재열 지음 / 저스피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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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관계를 끊고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람은 다른 누군가와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생물이 아니더라도 관계를 맺고 산다.


그런 관계가 끊기면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로 끊더라도 힘든 상황임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만큼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고립과 은둔. 사실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누구나 한 번은 혼자가 된다'고 이것은 특정한 어떤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느 순간, 불쑥 혼자 되는 시간이 올 수 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그때가 되면 늦었다고? 아니, 늦었다고 여긴 순간이 가장 빠른 시간이라는 말도 있다고? 이렇게 멀리서는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혼자됨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견딜 수 없는 힘듦. 자신만의 동굴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그렇게 그 동굴 속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은? 역시 함께 어두운 동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고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은둔이 아니다. 고립과 은둔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은 이 둘의 차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저자 역시 그랬다고 한다. 그러다 고립을 주제로 책을 써보자는 말에 고립과 은둔의 차이를 먼저 생각한다.


고립이 은둔과 다른 점은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고립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냥 집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밖에 나오기도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스스로든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든 끊고 있다는 것.


거기에 이르기까지 겪었을 고통을 짐작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상대의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순 없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렇다.


그랬기에 고립을 주제로 책을 내자는 말에 망설인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고립'의 상태에 처한 사람이 많다는 것. 누군가는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들에게 동굴 밖의 빛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많은 사람을 상담해 온 저자가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쓰기로 했다고. 그러면서 다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고립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그들의 경우는 다양하다. 하나로 정리할 수가 없다. 그러니 누구나 한 번은 혼자가 되는, 고립 상태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고 내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고립에서 나올 것인가? 또 고립의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가가 문제다. 이 책은 바로 그 점을 다루고 있다. 


섣불리 해결책은 이거다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 다른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립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도 다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말한다.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이 책을 읽으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물론 그 방법을 그대로 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자신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연결해주기도 한다. 즉 자신이 다 해결하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한다. 또한 쉽게 조언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조언보다는 함께 있어주는 것,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아주 다양한 사례들이 나오는데 읽으면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이러한 따스함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이 되어 고립에서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그건 읽어보면 아니까. 다만, 고립 상태에 있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서 고립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하여 그들을 의지가 약하다고, 시도도 안 한다고 비난하지 않아야겠다는, 그들이 그렇게 고립에 처하게 된 환경을 먼저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한 번은 혼자가 된다'는 말을 바꾸면 '누구나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다'가 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 그 말에 동의하면서, 읽으면서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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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문형배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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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연예인 못지 않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나 싶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을까? 작년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방송에서 보던 얼굴이니... 출연 횟수로 따지면 어느 연예인 못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탄핵 심판을 진행했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 그리고 올해 4월 침착하게 읽어가던 탄핵심판 선고문. 그것을 많은 국민이 지켜보았으니, 그를 아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얼굴은 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단편적으로밖에는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법관의 신상을 어떻게 잘 알겠는가? 신상이라고 해봤자 언론에 알려진 아주 적은 부분밖에는...


그가 탄핵심판 선고 이후에 퇴임을 했다. 그리고 책을 냈다. 책? 좋은 기회다. 문형배라는 판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주어지는 셈이니.


그가 판사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블로그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 블로그에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올린 글도 있고, 기쁜 마음으로 올린 글들도 있었겠다. 여기에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도 있었을 테고.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보지 않아서 추측을 할 뿐. 이 추측은 책에 기반하고 있고.


자신이 올린 글 중에서 고르고 골라 이 책을 엮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거의 20년의 시간을 두고 있다. 20년이라면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처럼 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두 번이 아니라 서너 번은 바뀌었다고 봐도 된다. 


그럼에도 과거 시기의 글들을 실은 이유는 그 글들이 과거에만 매어 있지 않고 현재에도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상에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쓴 글들과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글들, 마지막으로 법원과 관련된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읽어가면서 판사 문형배(그냥 판사로 직함을 통일하련다. 전 판사라는 말도 좀 우스우니까)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는 느낌, 판사 문형배 속에 사람 문형배가 들어있음을, 그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7쪽)이라고 했지만, 아니다. 그는 성공했다. (이 성공이 평균인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인지,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인지는 헷갈리지만, 두 경우 모두로 해석해도)


최근에 읽은 커트 보니것의 연설 중에 마크 트웨인을 인용한 글을 보면... 그 글은 이렇다.


마크 트웨인은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지만 노벨상은 못 받았죠. 그런 그가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사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드는 네 마디를 대답으로 떠올렸습니다. 저도 그 답이 마음에 듭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들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좋은 평가" 

(커트 보니것,,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문학동네. 2019년 1판 5쇄. 57쪽.)


이 글을 보면 문형배 판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감사의 말'에 보면 그가 버스를 탔을 때 버스 기사님이 '이 버스에 문형배 재판관이 타고 있습니다. "박수 한번 칩시다"'(405쪽)라고 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이웃의 평가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바로 우리와 같은 삶을 산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한 성공이 어디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두 의미 모두에서.


그만큼 책을 읽다보면 문형배 판사의 사람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그가 몇몇 글에서 '착한 사람이 법을 알아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이보다 더 평균적인 사람에 대한 호의를 드러내는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법을 몰라서, 그냥 사람은 다 자기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겠거니 해서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착한 사람들이 법을 알아야 한다고, 사건이 터지기 전에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최소한 법 공부는 해야 한다고 하니, 그가 사람에 대해 지닌 사랑을 이런 말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는 판사 재직 시절 사형 선고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고 있으며, 판사의 선고 이전에 당사자들끼리 조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 점을 봐도 그는 사람에 호의를 지닌 판사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가 '여는 말'에서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다고 하는 말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판사가 아니라 사람들 곁에 있는 판사 생활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책에서 은인으로 언급하고 있는 김장하 선생의 말처럼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존재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고, 그것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표현한 것은 겸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비록 판사로서 또 헌법재판관으로서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지만, 본질은 평균인의 삶을 살았다고, 그런 평균인의 삶이 바로 그의 삶에 체화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읽으면서 추웠던 작년 겨울부터 올 봄까지를 다시 떠올리기도 했는데, 그 추위를 그의 탄핵 심판 선고문을 통해 따스한 봄을 맞이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도 그의 삶을 통해 계속 그러한 따스함을 우리 사회에 전달해주기를 바란다.


그와 같은 판사들이 있다면 차가운 법이 아니라 따뜻한 법이 될 것이고, 그러한 따뜻한 법이 바로 우리 사회의 정의 실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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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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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틀막.


보니것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 무슨 헛소리야? 했을 거다. 당당하게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제퍼슨을 비판하면서 '불이 안 났는데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경우를 빼곤, 제 맘대로 말할 자유가 있거든요.'(153쪽)라고 한 사람이니...


대통령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입을 틀어막힌 채 끌려나가는 모습을 봤다면, 이 말을 다시 우리에게 들려줬을 수도 있겠다.


'요즘엔 그 어느 때보다 고문실이 많습니다. 이 나라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에는 많죠. 미국이 종종 우방이라 부르는 나라들 말입니다.'(200쪽)라는 말을.


그만큼 그는 말할 자유를 옹호한 사람이다. 그래서 검열을 반대했고, 검열에 반대했던 사서들에 대해서,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에서 검열을 가장 많이 당한 작가' 181쪽-188쪽)


그는 자신의 말할 권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할 권리, 심지어는 극단주의자들의 말할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줄지라도.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유가 책임져야 할 일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추악한 사상 하나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자유의 대가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미국의 영웅들처럼 씩씩하게 자기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188쪽)


이런 보니것에게 입틀막이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도 권력자가 권력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이 비판할 권리를 막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 (누가 좋아하는 말을 쓴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수정헌법1조를 옹호한다. 이 법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주로 대학 졸업식 연설문을 담은 이 책은 이렇게 보니것의 사상을 담고 있다. 그가 각 졸업식에서 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제 성인이라는 것, 성인으로서 책임을 지고 사회를 좋아지게 하는 쪽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졸업이 예전의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생을 즐기라는 것. 커다란 일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작은 것에서도 인생의 행복을 찾으라는 것.


그래서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라는 말을 때때로 하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제대로 받은 교육으로 세상의 억측가들에게 굽실거리지 말라는 것. 억측가들을 독재자라고 해도 좋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선동가라고 해도 좋다. 그런 인물들이 많은데, 지금 미국의 트럼프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아마 보니것이 살아 있었다면 이 트럼프를 풍자하는 말을 통렬하게 했을 텐데... 단지 트럼프 뿐만이 아니다. 지금 세상에는 지도자랍시고 트럼프의 아류들이 너무도 많은 현실이니... 보니것이 졸업생들에게 한 이 말,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나라 2030세대 (세대론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니것은 이러한 세대론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별개의 세대에 속한 구성원들이 아닙니다. ...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을 살며 떼어낼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겨야 합니다. ... 나의 아이들이 이 행성에 대해 불평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조용히 해! 나도 여기 좀 전에 도착했어. 내가 므두셀라-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969년동안 살았다고 전해진다-라도 되는 줄 알아?" ... 우리는 대체로 동일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28-29쪽)라고 하고 있으니, 이 말 정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에게 그대로 전해줘도 되겠단 생각이 든다.


'억측가들에 관한 사실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그들의 억측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남성과 현명한 여성입다. 

그러니 어떻게든 현명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우리의 생명과 여러분의 생명을 구하십시오. 존경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46쪽)


우리나라도 이런 억측가들이 있으니, 보니것의 이 말을 자꾸 되새겼으면 좋겠다. 그가한 것처럼 그들이 잘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회에 갓 발을 들여놓거나 사회 생활을 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들에게, 당신들이 배운 것을 생각해라. 그리고 지금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주장을 잘 생각해봐라. 우리는 현명해져야 한다는 이 말. 이것은 부탁이다. 그리고 당신들과 우리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세대 구분이 아니라 우리는 동시대에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니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는 이 말들.


여기에는 사랑이, 믿음이 그리고 연대가 깔려 있다. 이것이 보니것이 평생 동안 추구한 일들 아니었을까? 이런 그에게 '입틀막'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사회를 그는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하고 있으니... 보니것 연설이 지닌 보편성이 이런 데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참조할 만한 문장이 많은데, 친절하게도 책의 맨 뒤에 '시대로부터 동떨어졌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장 모음'이라는 장이 있다. 보니것의 문장 중에 생각해볼 만한 문장들이 실려 있으니, 그것을 읽어도 좋다.


이 책의 제목을 바꿔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 이 맛에 읽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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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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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구입해 놓고, 책장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가 이제는 읽어야지 하고 읽었는데, 일곱 편의 소설.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각 소설의 특징을 찾는 것이 더 좋은 읽기겠지만, 소설 역시 시대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 작품들이 지닌 어떤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더 앞선다. 그러다 실패. 


어떤 작품은 계속 마음 속에 남아 있고, 어떤 작품은 빠른 속도로 읽었고, 또 어떤 작품은 함께 실린 비평을 보고서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했는데...


대상 수상작이 백온유가 쓴 '반의반의 반'이란다. 반의 반이면 1/2이고, 그것의 반이라면 1/4이 되나? 그런데 왜 제목이 이럴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데... 등장인물은 넷이다. 할머니 영실, 엄마 윤미, 딸 현진, 그리고 요양보호사 수경. 


사건이 벌어진다. 영실이 꼭꼭 감추고 있었던 돈 오천만 원이 사라진 것. 이제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넷에 범인으로 의심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 요양보호사. 문제는 증거.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판정을 받은 영실. 확실하지 않는 CCTV. 물증은 없다. 심증은 있는데...


이 사건이 중심이 되지만, 사실 소설의 중심은 이것이 아니다. 바로 비틀어진 관계. 즉 서로의 마음을 열지 않은 관계를 지속한 가족의 이야기다. 모든 것을 다 터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이들은 무엇을 공유했을까?


가족이 공유하고자 하는 것 중에서 가장 먼저 꼽으라면 그것은 사랑 아닐까? 이 사랑이 맹목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 행동, 마음가짐 등등이 상대에게 가 닿으면 된다.


어쩌면 상대를 가장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공동체가 가족일지도 모른다. 그냥 알아서 하겠지, 엄마니까, 아빠니까, 할머니니까, 자식이니까, 손녀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데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가족의 바람직한 형태 아닐까.


따라서 가족은 똑같지는 않지만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관계일 수 있다. 서로를 다독거려줄 수 있는 관계. 하지만 이 소설 속 가족은 그렇지 않다. 영실-윤미의 관계는 데면데면하고, 영실-현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보내왔을 뿐 이들에게는 끈끈한 무엇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아니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에 보탬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양보호사 수경은 그렇지 않다.


인생 말년에 수경의 태도에 마음을 여는 영실인데, 어쩌면 영실이 기대한 가족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엄마인 윤미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고, 손녀인 현진도 그랬을 텐데, 이들의 관계는 이상하게도 조금씩 비틀어져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돈의 행방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영실에게는. 영실은 인생 말년에 자신을 보듬어준 수경이 고마울 뿐이니... 물론 돈을 수경이 가져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함께하지만 무언가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비틀어져 어긋나는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관계를 인식한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아마 윤미나 현진이 수경의 반의반의 반만큼만 했어도, 또 영실이 그렇게 했어도 이들의 관계는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비틀어진 관계를 성해나의 '길티 클럽:호랑이 만지기'에서도 만날 수 있고, 성혜령의 '원경'에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성혜령의 '원경'을 읽으면서는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을 떠올리기도 했으니..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관계가 비틀어질 수 있음을... 그것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아이를 학대하는 감독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서로 딱 맞는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다. 세상에 만들어진 퍼즐 조각처럼 제 자리를 찾기만 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관계를 원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딱 맞지 않기 때문에 맞추려고 자신과 상대가 조금씩 자신을 내어놓고 함께 맞춰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한다면 정확히 맞지는 않더라도 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맞춤은 된다. 2025 제16회 절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관계, 그러한 관계를 비틀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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