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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맞서는 과학 - 오늘의 과학 탐구 ㅣ 민음사 탐구 시리즈 8
박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재난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닥치는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자연재해를 인간과 관계없다고 말할 수 없는 요즈음인데, 인간으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재난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맞서고 있었던가.
재난에 맞서는 과학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것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밝히며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과학이 참여함을 말한다. 과학으로 인해 재난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재난이 발생하면 우리는 과학에 의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객관성을 대표하는 학문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인-과정-결과-대책을 마련하는데 과학은 커다란 역할을 한다.
커다란 역할은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피해자를 위한 역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해자를 위한 역할이다. 과학이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주관이 개입하지 않는 현상이 없다고 할 정도니, 과학자에 따라서 같은 현상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과학자가 어떤 관점을 지니느냐, 누구의 편에 서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가해자 편에 선 과학을 청부과학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때 청부과학은 결과를 위해 과정을 왜곡하기도 하니, 청부과학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으니 논외로 하자.
피해자를 중심에 놓고 재난을 분석하는 과학자들도 자신의 전문 분야에 따라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끼리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만의 결과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결과도 보고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책은 재난 중에서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다루고 있다. 2011년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는데, 대응이 늦었다고 한다. 늦게라도 대응을 제대로 했으면 좋겠지만, 주관하는 부처가 어디냐 등등으로 많이 지체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고... 여기에 전문가들이 가세해서 원인을 규명하는 노력을 했고, 어느 정도 인과관계를 밝혀냈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해자를 단계별로 나누는 일도 벌어져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시행착오를 거쳐 과학자들도 피해자 중심의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재난은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난은 사회적인 문제인데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과학과 정치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따라서 '정치-과학의 장'이 되어야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정치-과학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과학이 전문가만이 해야한다는 사고를 버리고 누구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해야 하고 (저자는 이를 누구나 손 드는 과학이라고 말한다), 피해자를 중심에 놓는 연구,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가습기 살균제로 발생한 재난을 발생 과정, 대응 과정,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까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왜냐하면 아직도 해결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가습기 살균제가 일으킨 재난의 인과관계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에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한다.
이 책이 쓰인 시점에는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던 기업관계자들이 2심을 앞두고 있다고 나와 있는데, 검색해보니 2024년 1월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2024년12월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고 하고, 최종 판결이 나왔다는 기사를 찾을 수가 없으니, 가습기 살균제 재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사회적 참사로 규정하고 국가에서 배상하기로 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법원은 기업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기업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과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때 정치를 넘어 법에 다가서는 과학은 저자의 말대로 차가운 과학, 즉 논리와 증거로만 입증되어야 한다는, 그 전까지는 결론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그러한 과학이 아니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차갑고 객관적이고 완전무결한 과학은 재난을 끝내지 못한다. 과학과 정치와 불확실성과 피해자의 곁에 서려는 마음이 뒤얽힌 과학만이 재난 이후를 내다보게 한다'(189쪽), '재난과 관계하는 과학은 재난 피해와 피해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189쪽)고...
과학도 이러할진대 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법이 과연 피해자의 편에 서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차가운 법이 아니라 따뜻한 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법은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데, 합리와 증거를 내세우면서 차갑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법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다.
과학과 법은 객관성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재난에 맞서는 과학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준 저자의 논리는 법에도 적용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 저자의 말을 살짝 바꿔 법원에, 2심 유죄판결을 파기환송한 대법원에 다시 판결을 해야 하는 법원에 돌려주고 싶다.
'재난과 관계하는 법은 재난 피해와 피해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따뜻한 법이 되고, 사람들을 좌절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래야 저자도 말했듯이 아무리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실천과 더불어 법과 제도 역시 바뀌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