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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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 어쩌면 지금 기후위기라는 세계적인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들 모습일 수도 있다. 무엇으로 이 위기를 타개할까? 과학기술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추진한다.


기후위기를 줄일 수 있는 기술, 탄소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대체제를 개발하는 등등, 이런 과학기술 방향에 집중하게 된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3년이 되는 올해에도 강타하고 있는데, 여전히 우리는 백신과 치료제라는(물론 이는 당연히 우리가 중시해야 할 방법이고,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다른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왜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이 발생하고 확산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의학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해결책일까? 전세계를 먼지가(더스트 폴) 뒤덮으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된다. 지구에서 인류는 멸망 직전까지 간다. 대응책이 여럿 있다. 돔을 만들어 돔 내부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 지하로 대피하는 사람들, 밖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람들, 자신들만 잘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 등등.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식물들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을 때 인간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재난 상황이 인류의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소설을 통해 보게 된다. 그렇다고 모두가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적응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내성이 강해지는 사람들. 그런 사람의 피를 얻으려는 사람들... 내성이 강해지는 사람들을 통해 연구하려는 사람들... 계속되는 혼란이다. 이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은 세 개의 회상 장면이 주를 이룬다. 위기가 사라진 다음에 식물학자로 활동하는 아영의 어린 시절,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은 두 자매 나오미와 아마라가 들려주는 그 시대 이야기, 그리고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수의 레이철에 얽힌 기록.


이 기록은 하나로 맞물리면서 위기의 본질과 위기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꿰어맞출 수 있게 한다. 과학기술로 해결되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지구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그 끝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빛을 주는 존재가 있었음을, 그 존재를 소설 제목인 '지구 끝의 온실'로 정했다. 온실... 따뜻한 곳. 그러나 외부와 차단된 곳. 하지만 온실은 가두기만 하지 않는다. 온실 밖으로 식물들을 내보내기도 한다. 온실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계속 모든 식물을 온실 속에만 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이 되면 온실은 이제 식물들을 내보내고 자신의 역할을 줄여야 한다.


소설 속에서 프림 빌리지가 해체되는 과정이 바로 이렇다. 이 공동체가 마냥 유지된다면 그것은 온실 속의 삶만 유지되게 된다. 즉 지구 끝의 온실이 그냥 지구 끝의 온실로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고 지구 끝의 온실이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온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온실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개발한 레이철이 나누어준 모스바나란 식물이 그런 역할을 한다.


공동체가 해체된 이후에 그것을 가지고 세계 각지로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 전세계 심어지고, 번식하게 되는 식물. 그 식물로 인해서 더스트 폴은 격감하는 추세로 돌아서게 되고, 여기에 세계 과학자들의 협력으로 먼지를 제거할 수 있는 물질이 개발되어 인류는 그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문명세계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식물이 한 역할은 까맣게 잊혀진다. 인간이 초래한 위기를 인간이 극복했다는 과학적 사실(?)만 남는다. 과연 그럴까? 그 너머에 진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소설은 말한다. 그래서 다시 모스바나가 등장한다. 그 등장으로 진실의 세계로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 과학기술 이전에 식물이 있었음을. 자연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런 자연과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모스바나에서 볼 수 있는 푸른 빛. 이 푸른 빛이 바로 소설 속 존재들을 이끌고 연결해주는 존재가 된다. 그것은 실생활에 유용하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로 희망을 준다. 


이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푸른 빛은 지구 끝의 온실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라져 남들 눈에 띠지 않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던 존재. 그리고 그런 존재에 대한 망각은 실용에 매몰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필요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 필요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사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도 존재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이렇게 소설은 극한 상황을 통해서, 그 상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모스바나라는 식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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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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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


천상천하 유아독존. 김초엽이 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말이 생각났다. 왜? 세상에 자신이 유일한 존재라고? 그렇다. 우리 모두는 유일한 존재다. 완전한 존재다. 겉모습이 어떻든, 생각이 어떻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다.


그런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임을 선언한 말이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니겠는가. 개개인이 유일하고 완전하다면, '나'가 완전한 만큼 다른 존재도 완전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우리는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가 된다.


총 7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이 소설집에서 공통으로 바로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로 서로를 인정하는 것. 비록 단점도 있고 받아들이기 힘든 점도 있지만, 그 점 때문에라도 함께 해야 함을. '나'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체를 인정하고 서로를 조금씩 내어놓고 함께 어울리려고 하는 모습.


김초엽의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다른 완전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인지 공간'을 떠나는 제나는 그 사회에서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 이브를 받아들이고, 결국 이브의 뒤를 이어 그곳을 떠난다. 제나가 떠난 세계가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방금 떠나온 세계"다.


"오래된 협약"에서는 그래서 자신들의 시간을 나눠주는 생명체들이 나온다. 그 생명체들과 맺은 협약을 기억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겠지만, 그것을 금기의 형태로 지켜나가려는 모습, 지구에서 온 인간들이 짧은 생명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렇게 하라고 하지만,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 모든 존재는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 그렇지만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이 소설집에서는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무언가 결핍된 존재들이 나온다. "최후의 라이오니"에서도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게 느끼는 그 사회에서는 좀 부족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결핍된 존재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고 도와주게 된다.


"마리의 춤"에 나오는 '마리', "로라"에 나오는 '로라', "숨그림자"에 나오는 조안, "캐빈 방정식"에 나오는 유현화 역시 그 사회에서는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 나온다. 당시 사회적인 관점에서 정상이라고 하는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들.


그렇지만 이런 존재들 역시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이고,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정상적'이라고 하는 존재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이들은 결핍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가 있다. 그러니 모든 존재는 유일하고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창문이 있는 단자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들이지만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창문이 없는 단자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다. 그래서 이 창문을 통해 교류를 한다. 다른 존재를 보고 받아들인다. 완전히 합쳐지지는 않지만 스쳐지나가기만 하지 않고 서로 교류를 하게 된다. 만나고 헤어짐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발전시키는 관계가 된다.


인간은 이렇게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함께 함을, 이때 함께 함이 같아짐을 뜻하지 않고 함께 하지만 다름을, 다르지만 함께 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치 우리 고전에서 말하는 사자성어, 화이부동과 대동소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게 7편의 소설에서는 창문이 있는 단자들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서로 만났다 떨어지더라도 이들이 주고받은 영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런 모습을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숨그림자"에서 더 잘 만날 수 있다. 단희와 조안의 만남과 헤어짐에서...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장면, 단희 세상의 언어로 바꾸면 엉뚱한 문장이 되는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는 말. 


이는 조안이 지구에 살 때 집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친숙하고 편안한 냄새를 단희에게 선물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이다. 조안이 집에서 느꼈던 냄새가 단희의 세계에서 언어로 바꾸면 양말이 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희나 조안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 문장은 이 소설에서 두 번 나오는데, 조안이 떠나기 전에 단희에게 선물했을 때와 단희의 행성을 떠나서 다른 행성에 정착해서 다시 단희에게 보내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는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 어떻게 교류를 하게 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캐빈의 방정식"에서 사고 방식의 시간이 달라진 언니 현화와 대화하는 현지의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시간의 지체가 엄청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대화하는 장면. 이것이 바로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 교류하는 모습이다. 


이는 서로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들이 교류할 때도 지녀야 할 자세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다른 행성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간섭하려 했다가 생길 수 있는 일들. 창문이 있는 단자는 상대를 자신에게 융합시키려 하지 않는다. 창문을 통해서 서로 보고 교류할 뿐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는 상처받고 파괴되는 단자들이 남을 뿐이다.


"오래된 협약"에서 지구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벨라타에 살고 있는 인물들에게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사실 이들도 알고 있지만 - 그것을 따라하지 않으려는 벨라타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바로 '창문이 있는 단자'에서 더 나아가 단자들끼리 합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초엽은 우리나라의 어슐러 K. 르 귄


김초엽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어슐러 K. 르 귄을 연상했다. 그만큼 충격이었고 감동이었다. 르 귄 작품을 읽으면서 시공간이 다른 우주공간 또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배경이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사실에 감명받았는데, 김초엽 소설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우리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여기에 SF소설이라는 이름을 굳이 붙일 필요는 없다. 그냥 소설이다. 우리의 상상을 현실로 보여주는 소설. 그래서 다른 행성의 다른 우주인들 이야기를 통해서 바로 우리 삶을 살펴보게 된다.


지구가 배경일 때도 마찬가지고. 소설 "로라"를 보면 신체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로라는 팔이 하나 더 있다는 느낌을 지니고 산다. 느낌이 아니라 분명 하나가 더 있다고 여긴다. 그런 팔을 인위적으로 단다.


자, 우리 세계에 팔이 셋인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김초엽은 그것이 뭐 어때?라고 그냥 다를 뿐이잖아라고 여기게 만든다.


현실에서 만나는 수많은 다름들을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팔이 셋 달린 인물을 창조해내서 그 인물이 어떻게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한다.


별것 아니라고, 그냥 다를 뿐이라고. 소설 속에서 그런 로라를 받아들여주는 인물을 통해 김초엽은 말한다. 이런 점이 바로 어슐러 K. 르 귄을 생각나게 했다.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 그럼에도 이들이 어떻게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그 역시 소설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슐러 K. 르 귄과 비교되는 것이 김초엽 작가에게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이 유일무이하다고 여길테니... 그렇지만 나는 김초엽 소설을 읽으며 어슐러 K. 르 귄 소설을 떠올렸고, 그의 소설에 비견될 수 있는 소설이 김초엽 소설이라고 생각했으니,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 작가에게 누가 될 말이라도 용서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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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참 자극적이다. '오'라는 감탄사부터... 무엇에 대한 감탄인가? 이때 감탄이 좋은 쪽의 감정일 수도 있지만, 안 좋은 쪽의 감정일 수도 있다. 마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소리. '오'


  '그자'라는 말에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이 아닌 '그자'다.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다. 그러니 '그자'라고 한다. 


  '입을 벌리면' 문장이 끝나지 않았는데 끝났다. 앞의 주어인 '그자'와 연결지으면 결코 긍정이 될 수가 없다. '그자가 입을 벌리면' 내게는 해로운 감정, 좋지 않은 일만 생긴다. 그러니 제발 그자의 입을 다물게 하라.


  이렇게 외치고 싶지만 그자는 입을 다물지 않는다. 그자는 끊임없이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토해낸다. 뱉어낸다. 입은 언어를 제외하고는 안으로, 밑으로 내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반대 역할을 할 때 우리는 무척 부정적이 된다. 싫어하는 마음을 지닌다.


생각해 보라. 입에서 안으로, 또 내려가지 않고 밖으로 위로 나오는 물체들을... 이럴 때 쓰는 말, 내뱉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자는 누구일까? 왜 그자가 입을 벌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기나. 그만큼 그자는 입을 벌리고 수많은 것들을 뱉어내지 않았던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보자.


어떤 고백


  고백컨대 나는 그를 저버릴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뼈마디 앙상한 손으로 내 심장을 숙주 삼아 동맥과 정맥의 뒤바뀐 운명을 노래하는 그를 저주해본 적이 있다 듬성듬성 이 빠진 폐허를 과부 가랑이마냥 벌리고 헤벌쭉 웃는 그를 오, 심장 따위를 헐값에 넘겨버린 적이 있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안개도 아니고 권태도 아닌 것들이 쥐 썩는 냄새처럼 속절없이 부풀어올라 내 망루 끝을 새나갔다 그때면 세계의 바깥이 암담하여 미래의 애인마저 저주스러웠다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케르베로스가 지키는 문 저편에서 죽은 자들이 죽지 못해 구더기처럼 기어올라왔다


  썩은 내장을 거슬러 위장을 지나 식도를 타고 사력을 다해 터져 나오는 독거미 독거미들, 기어코 존재의 망루 밖에 게워지는 천 년 전의 어떤 고백, 만 년 전의 어떤 비명이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김지혜,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열림원. 2006년. 41쪽.


해석은 포기다. 이해도 포기다. 그런데 마음에 남아 있다. 마음 속에 담아두기로 한다. 언젠가 이 시가 마음에서 머리로 올라올 때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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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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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SF작가'라고, 내 소설은 당연히 SF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내가 좋은 이야기를 썼는지 아닌지만 판단받기를 원하는."


소설 표지를 넘기면 표지 안쪽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틀을 정하고 그 틀에 맞춰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그런 틀을 벗어나 작품을 작품으로만 읽고 판단하기를 바라는 말.


소설을 어느 틀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해도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SF소설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는데, 소설을 통해 상상의 세계로ㅡ우리가 현실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로 들어가고 또 그 경험이 자신에게 좋았다면 그런 소설을 어떤 종류라고 규정하기보다는 좋은 소설이었어, 좋은 작가였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굳이 틀을 만들 필요가 없다. 옥타비아 버틀러 역시 그런 틀을 거부하고 있고.


타임슬립이라는 말을 한다.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시공간을 초월해 다른 시간대의 세상을 들어가는 일. 우리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지 않나, 시간 여행을 하는. 과거로도, 미래로도 여행을 하고 있는.


소설은 1976년이라는 현실과 - 이 현실이 지금은 2022년이니 엄청나게 과거라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나온 시기가 그때니, 1970년대는 이 소설의 현시대이다 - 1800년대 초반이라는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다나는 1970년대에서 1800년대로 이동을 한다.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다나에게 그 시대가 황당하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나가 황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다나이기 때문이다.


노예제가 살아 있던 미국 남부. 여기에 떨어진 흑인 여성. 그것도 청바지를 입고, 당시 흑인들과는 다른, 백인들과 비슷한 말투를 지닌 여성.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성. 


이런 다나가 루퍼스라는 백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다나는 목숨이 위태로운 루퍼스를 구하기 위해 1800년대로 가고,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1970년대로 돌아온다.


그렇게 루퍼스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나는 시간 이동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노예제의 참상을, 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게 된다.


그런 차별을 통해 미국 사회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펴보지만, 1970년대가 되어도 흑인은 노예가 아닐지 몰라도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기는 힘든 사회다. 다나가 백인인 케빈과 결혼할 때 일어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노예제는 폐지했지만, 1960년데 흑인민권운동을 통해 법률적인 평등은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평등으로는, 융합으로는 가지 못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과거 미국 노예제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지만, 1970년대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로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사랑의 방식에 대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를 루퍼스가 앨리스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맹목적으로 앨리스를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과연 사랑일까? 앨리스의 처지에서 루퍼스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오로지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 아니었을까? 즉 그는 강자로서 앨리스를 취할 수는 있지만, 앨리스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는 행동을 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행위일 뿐이다. 앨리스가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퍼스가 다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소설은 노예제에 대한 생각과 사랑에 대한 생각을 중첩시키면서 읽을 수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하는 설정은 중요하지 않다. 다나를 통해서 노예제와 노예제 이후의 미국 사회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좋고, 1800년대를 통해서는 사랑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된다. 


루퍼스의 사랑은 노예제에 기반한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런 사랑은 파탄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사랑은 상호 교감을 동반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음을  루퍼스-앨리스 쌍과 다나-케빈 쌍을 통해서 생각하게 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결말까지 나아가고, 결말을 통해서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끝까지 읽고 난 뒤,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은 좋은 작품을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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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22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러블리땡 2022-02-1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2-02-11 07: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2-11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2-02-11 07: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2-11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축하드려요^^

kinye91 2022-02-11 07: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Home Sweet Home - 가장 사적인 공간, 집에서 모든 이야기가 출발한다
빅이슈코리아 편집부 지음 / 빅이슈코리아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빅이슈에서 펴낸 책이다. 여성들이 살고 있는 집에 관한 이야기.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밥 먹듯이 다녀서 정착이 되지 못했던 집 이야기부터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미고 사는 집 이야기까지.

가끔 일러스터도 있어서, 집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를 '의식주'라고 하니, 집은 우리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문제다.


그러니 부동산정책, 특히 주택 문제에 실패한 정부는 급격하게 지지를 잃고 정권 재창출에 위기를 겪는다. 부동산으로 터무니 없이 돈을 번 사람들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누군가는 퇴직금으로 50억원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부동산, 특히 주택과 연결이 되어 있다.


지금 개발이라고 하면 대단지 아파트를 많이 생각하고, 우리나라 주거 형태는 기본적으로 아파트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몇몇 돈 많은 사람들이 넓직한 땅에 주택을 짓고 마당 있는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이름으로 된 아파트 한 채 소유하기 위해서 평생을 아등거리며 살아가게 된다.


이보다 더한 사람들은 집을 마련하지 못해 몇 해 간격으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고, 또 더한 사람들은 쪽방촌으로 밀려오거나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노숙을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집이 우리 삶에서 필수라고 하면서, 국가가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적어도 집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고,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불안정한 주거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자본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얼마 안 되는 땅마저도 개발로 수용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좋지 않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런 집이 아니다. 큰집도, 비싼집도 아니다. 자신들이 생활하기에 적절하게 꾸민, 자신들의 또다른 일부가 된 집이다.


그렇게 자기만의 집을 얻고(소유가 아니라 점유인 경우가 더 많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결코 부자가 아니다. 또한 어린 시절 이사를 많이 한 경험이 있어서 집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더 잘 깨우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작은 공간이라도 자신만의 삶을 투영할 수 있게 하고, 그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다) 자신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집을 여기고 생활하는 모습이 잘 나와 있다.


이 책에 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이 있다. 새겨둘 만하다.


나를 위한 배경이자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알려주는 공간(정혜윤. 49쪽)

내가 드러나는 내 내면의 일부(33쪽. 박문치)


그렇게 집은 내 내면의 일부이고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알려주는 공간이 된다. 그런 공간을 누구나 마련해서 살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결코 화려하지 않아도, 넓지 않아도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해서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그것이 '빅이슈'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원하는 세상이지 않을까 한다.


다양한 집, 집에 대한 다양한 태도, 생각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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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20 1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파트 외벽붕괴 사고로 일고 있는 건설회사에 대한 비난과 불매운동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명품 브랜드로 포장했지만 속내는 그렇지못했다는 사실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자본주의에 매몰된 시선을 봅니다.

kinye91 2022-01-20 12:45   좋아요 1 | URL
집을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이기도 해요. 이 책은 그런 돈벌이 수단이 아닌 내 삶을 보듬어 주는 장소로서의 집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따뜻한 감정을 가질 수 있었는데요. 때때로 일어나는 건설현장의 사고, 또 노동현장의 사고들이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인 그런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