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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디지몬 - 길고도 매우 짧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ㅣ 아무튼 시리즈 67
천선란 지음 / 위고 / 2024년 6월
평점 :
어릴 적 빠져들게 하는 존재들이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한 가지에 푹 빠져 헤어나오질 못할 때가 있다. 왜 그런지 모른다. 그냥 빠져든다. 그 빠져듦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 생각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빠져듦이 워낙 강렬해서 이성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 천선란에게는 디지몬이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무언인지 모를 외로움에 빠져 있던 천선란에게 다가온 디지몬. 천선란은 자신에게도 그런 디지몬이 왔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디지몬은 디지털 세상에 존재하는 것.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만날 수 없는 존재를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만날 수 없는 존재를 꿈꾸기에 이곳에서 저곳을 상상할 수 있고, 또 이곳의 힘듦을 이겨낼 수도 있다.
이곳의 힘듦을 이겨내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또한 내 삶임을 다른 세상의 존재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작가 천선란이 성장담이라고 봐도 된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된 지금까지의 일들을 디지몬과 엮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 디지몬을 꿈꾸던 때에서, 디지몬에 나오는 인물들과 자신의 삶을 연결지어 이야기하고, 그들의 문장이 '용기, 우정, 사랑, 지식, 희망, 순수, 성실, 빛'(32쪽 주)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자신이 마음에 들어했던 인물과 그 인물의 문장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작가는 디지몬의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발견했다고도 할 수 있다.
때론 슬픈 장면이 나오는데, 그 슬픈 장면이 작가 천선란이 쓴 작품과 겹치면서 아, 이래서 작가가 이런 작품을 썼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디지몬들이 지닌 문장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몬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지만 어른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작품이고, 천선란 같은 민감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과 연결지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어린 시절에 빠져들었던 그 무엇이 단지 어린 시절의 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들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책의 뒷부분에 가면 천선란은 자신에게 온 또다른 디지몬을 이야기한다. 실제 디지털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엄마를.
그런 엄마와 함께하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는 작가의 모습에 뭉클하기도 했다. 그래,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 상황 속에 있는 나는 유일한 존재고, 그것은 나의 유일한 경험이니까.
그것이 바로 나니까, 그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작가 천선란을 알고 싶으면 이 책을 읽으면 좋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왜 천선란의 작품이 따스함을 품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기도 했고.
그러면서 나에게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도 생각해 보고. 내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 내 삶을 생각해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