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어둡다. 암흑향이라니... 암흑이라면 캄캄함이고, 향이라는 한자어는 마을, 고향이라는 한자어니까, 제목을 풀어쓰면 캄캄한 마을 정도가 되겠다.


  표지 디자인 역시 검은 테두리에 하얀 바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암흑이라고 해서 전부 까맣지는 않으니... 암흑은 빛을 예비하고, 빛은 다시 암흑을 예비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빛들은 어둠 없이는 우리에게 올 수 없지 않은가. 빛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어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 제목인 암흑향은 어두운 마을이라는 의미보다는, 이 어두움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하나같이 어려워서, 또 한자도 많아서, 그리고 고대신화(우리나라나 서양의)들이 맥락없이 (시인에게는 맥락이 있을지 몰라도 내게는 맥락이 없다. 단지 그러한 사건들, 사람들, 존재들, 이야기들을 뒤섞어놓은 듯한 느낌만 있을 뿐) 섞여 있어서, 시집 자체가 암흑향이다. 내겐 조연호 이 시집이 아주 어두운 마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더듬더듬 나아가야 하는, 한 줄기 빛을 애원하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한다.


이 암흑향인 시집에서 어떤 빛을 찾을까? 찾으려고 노력하면 찾을 수 있을까? 이 시집에 유난히 적()이라는 한자어 제목을 단 시가 네 번 나오는데, 이 '적()'이라는 한자어는 부적이라는 뜻이다.


부적, 귀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니고 있거나 집에 붙이거나 하는 물건 아닌가. 즉 부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귀신과 재앙을 늘 의식하고 산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런 세상에서는 귀신과 사람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시집 첫 시인 '적()'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 (9쪽) 

그렇게 시는 귀신과 함께 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둠이 빛과 함께 할 수밖에 없음을 같은 시에서 '더러운 얼굴로만 깨끗한 얼굴을 닦을 수 있다는 걸 거기서 배웠다'(9쪽)고 하고 있다.


조연호의 시는 독자에게 어떤 애교도 없다. '시'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는 /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12쪽)


이렇게 조연호 시는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 애교가 없는 시를 다른 말로 하면 독자들의 마음에 드는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를 위해서 쓴 시가 아니라 시인이 쓸 수밖에 없는 시를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시인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또는 무의식 저변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잡아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 시를 읽는 우리는 그 시에서 또다른 암흑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디 암흑향인 곳이 이 시집만이랴. 더 많은 암흑향들이 있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암흑향에서도 아주 작은 빛을 찾아 삶을 꾸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떠올랐다. 특히 검은색 계열로 칠해진 그림들. 그 그림들에서 암흑향을 보는데, 마냥 암흑만은 아니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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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15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스코!
그의 그림에서도 향기가 날까요?
세계가 거기에 담겨있다고 하니!
오랜 응시는 감동을 자아낸다던데 여행자는 그럴 시간이 없죠 ㅠ

kinye91 2022-02-15 11:0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림은 잘 몰라서요. 다만 오랜 응시를 통해 감동을 받을 순 있을텐데...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네요.

초란공 2022-02-15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와 함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2-02-15 14: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충격, 경악, 두려움.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을 세 단어로 표현하면 이렇다.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와야 하는데, 제목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라 '눈뜬 자들의 도시' 아닌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치로 따지면 민주주의를 이룩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부패에 저항하며, 독재 정권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가 바로 '눈뜬 자들의 도시' 아닌가.


그런 기대를 하고 읽게 되고, 소설 전반부에서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럼 그렇지. 부패한 정권,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방법. 도시 사람들은 백지 투표를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선거에서 처음에는 70% 정도가 백지 투표를 했다면(투표를 하러 나왔지만 어느 정당에도 기표를 하지 않고 투표 용지를 제출하는 상태) 두 번째 선거에서는 이보다 더 나아가 80%이상이 백지 투표를 한다.


정권을 잡고 있는 우익 정당에게도, 그를 뒤쫓고 있는 중도 정당에게도, 그렇다고 변화를 주장하는 좌익 정당에게도 유의미한 표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기성 정치를 불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고 우리가 촛불을 들었듯이 소설에서는 선거에서 백지를 냄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한다. 누구랄 것도 없도 선동자도 없이 그렇게 백지를 내자 정부는 당황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까? 민주적인 정부라면 이는 시민들의 불신이라고 생각하고 내각 총사퇴를 할 것이다. 정치 개혁을 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정권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다. 시민들 가운데 약 500명 정도를 잡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백지 투표를 했냐고 묻는다.


이 물음 자체가 이미 독재 정권임을 암시하고 있다. 현대 투표는 비밀 투표이기 때문에 누가 어느 정당에 투표를 했는지 물을 권리가 없다. 시민들은 그렇게 헌법에 기초해서 또 상식에 기초해서 대답한다.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자 정권이 시도하는 일은 우리가 잘 알고 이는 고문이다. 말로는 고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격리시킨 다음에 나오는 행동은 뻔하다.


 (우리나라 엄혹했던 시절, 고문이 일상이던 시절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 소설에서 암시하고 있는 방법들, 그 장면들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답이 나오지 않자 정부는 수도를 이전한다. 백지 투표가 수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를 봉쇄한다. 누구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도록.


(기시감이 느껴질 대목이다.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했던 행동이 떠오르는데, 설마 사라마구가 우리나라 사례를 알고 소설에 도입하지는 않았겠지)


이때 수도의 시장이 한 행동이 민주주의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린다. 수도 전철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한다. 정부가 수도를 이전하고, 정부 관료, 경찰관들을 모두 철수시켰을 때 치안 걱정을 했지만, 도시는 예상 밖으로 잘 돌아간다. 여기에 당황한 정부에서 할 수 있는 방법. 혼란을 일으키는 일. 이를 간파한 시장은 시장직을 사임한다. 그에게는 시민들이 더 중요했던 것.


이때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사실 세 통의 편지다. 대통령, 총리, 내무부 장관에게 온 같은 내용의 편지) 모두가 눈 멀었을 때 눈 뜬 여자가 있었다고, 이번 백지 투표 사태와 그 여자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잡았다고 정부는 판단한다.


이에 내무부 장관은 경찰 세 명을 파견한다. 진상을 조사하고 여자를 체포하라고. 하지만 도시에 들어온 경찰 중 지도자인 경정은 여자가 무죄임을 알게 된다. 확신한다. 그리고 정부가 그 여자를 백지 투표의 주범으로 몰아가 자신들 정권을 안정을 꾀하려 함을 간파한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냥 자신의 양심을 묻어두고 명령대로 할지, 아니면 양심에 따라 행동할지. 사라마구는 여기에서 낙관적으로 보이는 서술을 한다. 경정은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 언론에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폭록한다. 물론 여자에게도 자신의 임무를 알리고.


언론에서는 이 일을 검열을 피해 교묘하게 발표하고 (꼭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다. 보도지침이라는 언론통제 제도가 있던 나라가 우리나라 아니던가) 사람들은 그 신문이 발행정지가 되어도 기사를 복사해서 서로 알린다.


이제는 경정이 남았다. 진실을 폭로한 사람. 어떻게 될까? 제목이 '눈 뜬 자들의 도시'라서 희망을 보여주는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안심하고 있는 순간, 경정은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 정권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김형욱을 생각해 보라. 그의 죽음을) 이렇게 하고 소설이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눈먼 자들의 도시'와 연결되는 장면들이 이 소설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었던 시기에서 4년 뒤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눈을 떴던 사람이 나오고... 그때에 유일하게 눈을 뜰 수 있었던 사람, 그 사람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자, 4년 뒤 정권은 진실을 감추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진실을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 경정의 말에서 결말을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바로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하오. (377쪽-2009년 초판 10쇄)


결말은 이야기 하지 않겠다. 다만, 정권 내에서도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들은 권력을 나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상대를 걸어서 넘어뜨리려 한다. 그리고 넘어뜨린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게 권력의 속성이다. 이런 권력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소설 속 총리다. 그 총리는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니라 독재 정권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칭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


(총리가 장관들을 해임하고 법무부와 내무부 장관을 겸임하는 과정이 이 소설 속에 나오는데, 와 이거 완전 전두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함께 맡아 군과 민간의 정보권력을 장악했던 그를. 사라마구 소설이 우리나라 현실을 빗대어 썼나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런 일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사라마구는 우리에게 근거없는 희망을 지니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민주주의는 그냥 유지되지 않는다고. 권력집단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들을 제대로 감시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다시 '눈먼 자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소설 결말에 다시 눈 먼 사람들이 등장하여 말을 하면서 소설을 끝맺는다. 권력을 제대로 감시, 통제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우리는 눈 먼 자들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경각심을 주는 존재를 잃으면서도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게 된다고 하는 듯하다.


누가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했나. 이 소설은 리얼리즘이다. 그냥 우리 현실에서 너무도 잘 볼 수 있는 면들이다. 그것을 사라마구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 눈 앞에 들이밀 뿐이다. 이래도 보지 않겠냐고, 이래도 눈 감고 있겠냐고. 계속 눈 감고 있으면 이렇게 된다고. 눈을 뜨고 있어도 권력은 이토록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집요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괴롭히고 있다고.


우리도 곧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에 참여하기 전에 이 소설을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 모두가. 정말로 '눈먼 자들'이 되지 않고 '눈뜬 자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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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02-14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먼자들의도시는 재밌게 읽었는데 속편은 이상하게 손이 안가 안읽었어요. 근데 리뷰보니까 전편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 같네요. 이 책도 속편이 더 있는 거 같던데 다 읽는게 나으려나요?^^

kinye91 2022-02-14 16:59   좋아요 1 | URL
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이렇게 세 편을 읽었는데, 제 생각으로는 눈뜬 자들의 도시는 재미있었는데,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는 좀 그랬어요.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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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한자어로 적혀 있으면 어느 나라 말인지 알기 힘들다. 사실 한자로 나라 이름을 적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이었으니...


독일을 덕국으로, 프랑스를 법국으로 불렀던 시대, 희랍은 그리스다. 그러므로 희랍어는 그리스어다.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 언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희랍어를 조금씩 만나게 된다. 변이 바이러스들의 이름을 그리스어 알파벳의 순서대로 붙이고 있다고 하니.


이런 것을 떠나서 희랍어는 우리와 상관없는 언어다. 우리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희랍어로 읽으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스 문학을 전공하거나, 그리스에 관심을 가져 그 나라와 교류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 또는 특별한 학문적(언어적) 호기심으로 배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설 제목이 희랍어 시간이다. 생소한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 소설 제목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생소한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와는 결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


두 축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한강 소설이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술자가 교차되어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인 남자와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인 여자가 서술자가 된다.


남자는 점차 시력을 잃어간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시력이 나빠지고, 안경을 쓰고도 잘 보지 못할 정도의 시력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시력을 잃을 수 있는 상태.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즉 외부의 세계와 어느 정도는 단절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닫혀간다는 의미가 된다.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의식적이 아니라 어느 순간 말이 자신에게서 사라진다. 눈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면, 말은 내면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표출하는 역할을 하는데,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는 자신의 내면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물론 글을 쓰면 되지만,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대화의 장에서 글로 의사소통하기는 힘드니, 소통의 창구가 어느 정도 닫혔다고 보면 된다.


이렇듯 남자와 여자 모두 관계가 단절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이 소설 속에서는 여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55쪽)


이 표현을 보면 남자도 여자도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잃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둘은 모두 사회에서 접촉을 잃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들이 희랍어라는 낯선 언어로 만나게 된다.


접촉을 잃어간다는 공통점.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낯섬을 통해서 익숙함의 세계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여자와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아들과의 만남 장면에서 추측할 수가 있다.


'그녀가 붙들려고, 팔을 붙들려고, 손을 잡으려고 하자 물고기처럼 재빨리 빠져나간, 지느러미처럼 부드러운 살갗을 모른다.' (183쪽)


아들마저도 이렇게 그녀를 떠나가는데, 남자가 알 수는 없겠다. 이는 보거나 말로 듣거나 해야 하는데 여자는 남자에게 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묘하게 한강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제목이 희랍어 시간 아닌가. 낯선 언어를 배우는 시간. 왜 낯선 언어를 배우는가? 바로 낯섬을 통해서 자신이 겪는 일들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 아닌가. 그리고 남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한강이 다른 소설들에서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다고 하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듯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듯이 이 소설 역시 절망으로 어둠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191쪽)


이렇게 쓰인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렇게 되겠다는 진한 여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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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2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시집.


  한때 테트리스라는 게임이 유행했었다. 레고 블록 같은 여러 모양의 막대들을 빈 자리에 맞추는 게임.


  그 막대들을 여러 방향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카멜레온은 보호색으로 유명한 동물이니... 둘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 했더니, 변화다. 아니 이 시에서는 변신이다.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변화나 변신이나 자신이 지녔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라진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변신이라고 하니까 왠지 안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보면 그런 생각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테트리스와 카멜레온


컴퓨터 오락인 테트리스를 할 때마다

변하는 세상의 모습 한눈으로 보지

키를 누를 때마다 자유자재로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하는 블록들

변신, 변신을 거듭하며

벽돌담 쌓듯이 척척 아귀가 맞는 블록들

나도 그들 닮을 수는 없을까

푸른 빛 보호색으로 감싸

내 자신 위장시킬 수는 없을까

완전무결하게

플러그 뽑힌 채로 마음의 버튼 누르기만 하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세상의 모습과 우울한 생각들도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

내 마음은 기쁨

내 마음은 사랑

내 마음은 평화

철철 넘치는 내 마음은 자유

한때 우리들 세계의 전부였던 신념과 철학도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

자본주의꽃처럼 피어나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을까

테트리스 테트리스 테트리스

카멜레온 카멜레온 카멜레온


차정미, 테트리스와 카멜레온. 푸른숲. 1994년. 28-19쪽



세상이 변함에 따라 변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의 변화에 빠르게 발 맞추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적응하면서 잘산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도 변신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는 반어다. 그런 변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세상의 모습과 우울한 생각들'에서 시인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변신은 그런 생각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데에 있다. 신영복 선생이 한 말처럼 시인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때문에 세상은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변신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


신영복 선생의 말을 다시 빌리면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은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부귀와 영달만을 추구할 뿐이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들은 변신의 귀재다. 그리고 변신의 귀재들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힘없는 사람들은 더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은 변신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형식적인 민주화를 실질적인 민주화로 착각하고, 이제는 그런 민주화 운동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정치계를 좌우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정치계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모여 있으므로... 그 지혜로 시류에 맞게 변신들을 잘해왔으므로. 변신의 귀재들만 모였으므로, 그들은 자본주의꽃처럼 피어났고,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세상은 얼마나 변했는지.. 그들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렇게 변신의 귀재들이 모여서 세상을 바꾸었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나? 시인은 그런 질문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그 점을 알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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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 어쩌다 자본주의가 여기까지 온 걸까?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윤혜 옮김 / 선순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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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다. 이제는 한물 간 사상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만큼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책들도 많이 줄었고.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마르크스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을 강의하는 교수도 많이 줄었다. 한때 서울대 김수행 교수의 후임을 놓고 설왕설래한 경우가 있었다. 김수행 교수는 우리나라에 자본론을 번역하기도 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였는데, 그 후임으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뽑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는 없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한다. 한물간 사상가가 아니라 지금 꼭 필요한 사상가라고, 우리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 때 그 열쇠를 제공하는 사람이 마르크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여러 곳에서 마르크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우선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정확히는 사회주의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제 사회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주변부가 아닌 핵심 과제로 두고 싶어하는 운동'(90쪽)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사람들이 부유하게 사는 사회인데, 그때 말하는 '부란 잉여노동시간을 좌지우지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과 사회 전체가 직접적인 생산에 필요한 시간 외에 이용할 수 있는 시간에서 생기는 것이다'(324쪽)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사회에서는 노동시간은 하루 6시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삶의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는 주거지에서 보내는 일상생활과 일터에서 보내는 일상적인 노동의 리듬' (274쪽)이라고 하는데, 이런 리듬이 깨진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일상적인 노동의 리듬이 깨지면서 주거지에서 보내는 일상생활도 흔들리고 있는 상태인 사회가 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분노에 차 있게 된다. 이들에게는 어떤 계기가 있으면 폭발하게 되는데, 그 폭발이 자본가나 권력자들에게 향하지 않고 약자들에게 향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팬데믹에 빠져 있을 때 소수자들을 향한 분노들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이를 이용하는 정치가들이 있음도 알고 있고.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인 문제라고 한다. '자본의 관점에서 보는 노동이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즉 노동은 사용가치에 불과하며, 생산에 필요한 한 가지 요소일 뿐입니다. 따라서 일회용이며, 일정한 환경과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취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노동은 가족의 생활이며, 사회관계이며,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인 동시에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일이며, 노조의 일원으로 수행하는 일입니다.' (289쪽)라는 말로 저자는 정리하고 있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이다.


상황이 이런 데도 사회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과 같이 소외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사회를 바꾸는 일은 단번에 되지 않는다. 저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알리는 일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 삶을 자유롭게 하자고, 부유한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하자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의 과제는 현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서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보다 사회주의적인 시대로 평화롭게 전환될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나긴 여정입니다.'(28쪽)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과정이 쉽지 않음을 저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으로 더 힘들어진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온몸으로 겪고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도 알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틀에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한다. 지금은 폭력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그리고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이니...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그가 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지, 그리고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알아야 할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를 떠나서 저자는 '개인의 자유와 해방의 진정한 뿌리는 하루에 6시간 노동을 통한 집단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고 나머지 시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상활 속에 있습니다'(331쪽)고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 역시 6시간 노동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이 책은 기존 체제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른 상상력을 동원해 해결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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