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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규모의 의학 - 루돌프 비르효, 자유주의, 공중보건학
이안 F. 맥니리 지음, 신영전 외 옮김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 2019년 9월
평점 :
아직도 의료 대란이다. 누구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겪어본 사람은 안다. 지금 우리나라 의료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음을. 그것도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 소위 골든타임이라고 하는 시간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응급실 뺑뺑이! 이런 말이 통용되는 현실이라니. 이렇게 환자를 거부하는 의료진들이 있다니... 거부가 아니라 할 수 없으니,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과연 그들이 지금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살펴보면 답답한 마음만 든다.
공공의료라는 말은 말로만 존재하나 보다. 의료가 이익과 결부되었을 때 의료의 공공성은 사라진다. 공공의료보다는 민간의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는다고 단체 행동을 할 때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그들의 선의에 맡겨야만 한다.
상대의 선의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누가 말했던가. 말만 번지르하게 하고 정작 필요한 분야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부작위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때 독일에서 공공의료(사회의료?)에 대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던 비르효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했다는 이 말.
"의학은 하나의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거대한 규모의 의학과 다르지 않다." (17쪽)
정치가와 의사는, 동일한 사람도, 같은 분야도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적 상처에 대한 정치적 처방을 위해 협력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18쪽)
이 말을 빌리면 의사들을 비난하기 전에 정치가들을 비난해야 한다. 정치가들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그들은 의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의료 대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한마디로 사회적 상처에 대한 정치적 처방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치적 처방을 아예 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그러니 그들이 '거대한 규모의 의학'은커녕 작은 의료 행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의사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의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정치의 책임이니, 우선 책임을 정치에 물어야 한다.
계속 비르효의 말을 보자.
의료개혁 운동은 언제나 사상과 이상주의의 하나였으며, 단순히 특수 이익을 위한 정치는 아니었다. (61쪽)
의료개혁은 사상과 이상주의의 하나라는 말. 우리 사회의 의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서 의료 개혁을 시도했으나, 개혁이라는 말이 의대 정원 증원이라는 문제로 국한되어 버린 지금. 아니다. 의사 수가 늘든 줄든 의사들은 우선 사람을 중심에 놓고, 그것도 치료를 받기 힘든 사람을 우선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비르효는 '의사들은 빈자들의 천부적 옹호자이며 사회 문제는 상당 부분 그들의 관할권 내에 있다.' (64쪽)고 하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의학적 개입이 진정한 사회의학의 가장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적용이며, 따라서 의료정치의 버팀대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선 의료 분야의 부적절한 제도로 인해, 전염병과 일반적인 가난이 증가했다고 하면서, 의료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비정상적 상황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9쪽.)고 한다.
이러면서 비르효는 의사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한다. 당시 의사들의 수입은 다른 직종에 비해 많이 낮았다고 하는데, 처우를 개선하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상했다.
그렇다면 이미 의사들의 처우가 최상층에 해당하는 우리 사회는 어떤가? 그들의 임금은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근무 환경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사들은 환자들을 더 잘 돌보기 위해서 자신들의 근무 환경을 좋게 바꾸어 달라고 주장해야 한다. 장시간 근무시간이라면 의사 수를 증원해서 교대 근무를 해야 하고, 시설이 열악하다면 시설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단지 의사 수 증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나라 의료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공공의료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도 적은 지금, 공공의료를 확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당시 비르효는 상수도, 하수도 시설에 대해서 이런 주장도 했다. 즉 공공시설은 민간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르효는 시 상수도 시설에 대한 그들의 서투른 관리와 재정을 민간 기업에 넘기려는 열망을 지적하면서, 이 새로운 운하와 연결하도록 하는 권한은 반드시 지역사회 자체에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15쪽.)
여기서 의료는 '공공'에 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의료가 공공에 해당한다면 민간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지자체가 담당해야 한다. 민간의료보다는 공공의료를 더욱 확충해야 한다.
공공의료 시설을 개선하고, 근무 여건을 좋게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응급실 뺑뺑이라는 말이 사라질 수 있다.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시설, 의사들도 확보해야 한다. 그들의 희생에, 선의에 기대지 말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의료의 공공성이고, 의사뿐만 아니라 환자들도 함께 좋아질 수 있는 길이다. 이러한 논의를 해야 할 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비르효에 관한 이 책을 읽으면서. 물론 지금은 그의 생각이나 또 이 책을 쓴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의료는 정치라는, 정치 역시 의료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가 '거대한 규모의 의학'이라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치가 정신차리게 해야 한다. 예전에 미국에서 나온 말을 비틀자.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