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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1부 : 삼체문제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평점 :
하늘을 보면서 광활한 우주를 상상한다. 138억 년 정도가 되었다는 우주의 역사. 그 넓이는 지금 인간의 능력으로는 예측은 할 수 있지만 가볼 수는 없는 크기이다. 빛의 속도로 가도 138억 년이 걸릴 우주의 끝.
그런 우주에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 있을까?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오만 아닌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상상했고, 그를 작품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화성이 멀고 먼 행성이었을 때 사람들은 화성인을 우주인으로 설정하고, 화성인이 지구에 오는 상상을 했었는데, 이제 화성보다도 더 먼 우주를 볼 수 있게 된 인간은 수많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상상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외계 행성을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외계 행성이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는 환경. 이는 우리 인간이 패턴을 인식하려는 경향을 생각하게 한다. 왜 우리는 패턴을 인식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예측가능성, 즉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삶은 예측이 가능한 상태에서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적어도 몇 년 정도는 예측할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꾸려갈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그런데 앞을 예측할 수 없다면? 잘 알지 못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했다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 삶은 불확정성이 맞다. 예측을 하지만 수많은 우연들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우연들이 겹치더라도 어느 정도 방향성은 예측할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삼체 행성에는 그러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정도 없다. 어떻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체에 수많은 문명이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성이 어떻게 될지 예측을 할 수 없다.
과학, 수학, 철학, 예언 등을 통해 삼체 행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한 그들이 선택한 마지막 해결책은? 바로 이주다.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 어떤 행성으로? 자신들과 비슷한 환경을 지닌 행성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소설에서 이 장면을 마주하면서 지금 인간들이 화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것이 생각났는데, 물론 화성은 인간들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행성은 아니니 다르기는 하지만. 그리고 현재까지 화성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도 좀 다르다.
삼체 문명은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그런데 어디로 갈까? 그들이 살 만한 행성이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소설이 이렇게 삼체 문명으로부터 시작했으면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삼체 문명이 주인공이 아니다. 바로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삼체 문명이 이주하기로 결정한 지구 생명체인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들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부의 비밀 조직에 끌려간 왕먀오 박사. 그의 눈에 보이는 이상한 카운트 다운 숫자. 그리고 형사 스창. 과학자들의 의문의 죽음.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왕먀오는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온몸으로 겪은, 천재 수학자인 딸을 잃은 천문학자 예원제를 만나게 된다. 예원제를 만나 과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러한 외계 생명체에게 지구의 존재를 알린 이가 바로 예원제임을 알게 된다. 그들이 삼체 문명을 지구로 오게 해, 지구를 개혁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도.
여기에 소설은 지구의 환경 파괴, 인간중심주의 등도 다루고 있다. 자신의 종만을 위해서 다른 종들을 멸종시키는 인간들. 그런 인간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외계 문명을 통해서라도 지구를 개조하겠다는 생각을 지닌 지식인들.
아마 예원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지구 생명체를 멸종시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지구를 생명체들은 좀더 조화롭게 살게 하겠다는 목표로 그러한 행동을 했으리라. 하지만 의도와 결과가 늘 일치하지는 않는 법.
삼체 문명은 지구를 정복하고, 지구에서 자신들이 살아가려 하지만, 결코 지구인과 함께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자손을 낳지 않게 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설의 말미에 그들이 보내온 말은 "너희는 벌레다!"(433쪽)다.
벌레. 다른 종을 벌레로 지칭한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박멸해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벌레라는 말을 없애야 하는 존재로 사용하고 있듯이.
여기에 그들의 문명은 지구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나다. 그들이 보내온 양성자만 봐도 그렇다. 과학자들을 절망에 빠뜨리기 쉽다. 하지만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형사 스창이 그렇다. 그는 좌절에 빠진 왕먀오와 다른 과학자를 밭으로 데려간다. 밭에서 왕성하게 보리를 뜯어먹고 있는 메뚜기 떼들.
이 메뚜기 떼들을 보면서 왕먀오는 깨닫는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벌레라고 했지만, 그들이 인간을 정복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벌레는 어떤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것이기에. 단순히 기술력의 차이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소설은 막을 내리는데...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밭에 있는 보리를 보고 느낀 왕먀오의 생각이.
'보라, 이것이 바로 벌레다. 벌레의 기술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와 삼체 문명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인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것들을 박멸하려고 했다. 각종 살충제를 비행기로 분사하기도 하고 천적을 키워 뿌리기도 하고 알을 찾아 없애고 유전자 변형으로 번식을 근절하기도 했다. 태워도 보고 수몰시키기도 하고 각 가정에 살충제를 비치해놓고 사무실 책상에는 파리채같이 그들을 없앨 무기도 준비해놓았다. 이 긴 전쟁은 인류 문명과 늘 함께했고 아직까지도 승패가 결정 나지 않았다. 벌레는 멸종되지 않았을뿐더러 예전처럼 여기저기에서 횡행한다. 그 수도 인간이 나타나기 전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인류를 벌레로 보는 삼체인은 벌레는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439-440쪽)
이런 삼체 문명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은 통보를 받은 시점으로부터 450년 뒤다. 인류의 세대가 30년을 한 세대로 하면 15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도착한다. 그때까지 이미 외계 문명의 침략을 예고 받은 상태에서 지구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손을 놓고 있을 것인가?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지배에 놓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해 스스로 인간 종의 멸망을 추진할 것인가?
소설에서는 이러한 세 부류의 집단과 더불어 대책을 마련하려는 집단이 나온다. 어쩌면 내부의 갈등을 외부의 갈등으로 해소하려 할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세계 각 나라가 협력하는 모습으로 나오니 말이다.
이렇게 소설은 외계 생명체인 삼체 문명을 통해 지구에서 인류가 추진해온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끼친 부작용과 우리 지구가 앞으로도 계속 존속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갈수록 예측불가능해지는 기후 재앙 앞에서 지구를 떠나려는 계획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사람들도 있는 이 상황은, 삼체 문명이 처한 상황에 빗댈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삼체 문명처럼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꾸어야 할까?
아니면 지구가 더 살기 힘든 행성으로 변해가지 않도록 손을 맞잡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기후 재앙이라는 삼체 문명의 침입을 우리는 받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삼체 문명은 450년 뒤에 도착하겠지만, 기후 재앙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테니.
'잘 쓴 과학소설이란 제일 변화무쌍하고 제일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하게 쓴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447쪽)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 우리에게 닥칠 삼체 문명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2부와 3부도 기대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