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1부 : 삼체문제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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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보면서 광활한 우주를 상상한다. 138억 년 정도가 되었다는 우주의 역사. 그 넓이는 지금 인간의 능력으로는 예측은 할 수 있지만 가볼 수는 없는 크기이다. 빛의 속도로 가도 138억 년이 걸릴 우주의 끝.


그런 우주에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 있을까?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오만 아닌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상상했고, 그를 작품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화성이 멀고 먼 행성이었을 때 사람들은 화성인을 우주인으로 설정하고, 화성인이 지구에 오는 상상을 했었는데, 이제 화성보다도 더 먼 우주를 볼 수 있게 된 인간은 수많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상상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외계 행성을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외계 행성이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는 환경. 이는 우리 인간이 패턴을 인식하려는 경향을 생각하게 한다. 왜 우리는 패턴을 인식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예측가능성, 즉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삶은 예측이 가능한 상태에서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적어도 몇 년 정도는 예측할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꾸려갈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그런데 앞을 예측할 수 없다면? 잘 알지 못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했다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 삶은 불확정성이 맞다. 예측을 하지만 수많은 우연들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우연들이 겹치더라도 어느 정도 방향성은 예측할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삼체 행성에는 그러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정도 없다. 어떻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체에 수많은 문명이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성이 어떻게 될지 예측을 할 수 없다.


과학, 수학, 철학, 예언 등을 통해 삼체 행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한 그들이 선택한 마지막 해결책은? 바로 이주다.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 어떤 행성으로? 자신들과 비슷한 환경을 지닌 행성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소설에서 이 장면을 마주하면서 지금 인간들이 화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것이 생각났는데, 물론 화성은 인간들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행성은 아니니 다르기는 하지만. 그리고 현재까지 화성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도 좀 다르다.


삼체 문명은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그런데 어디로 갈까? 그들이 살 만한 행성이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소설이 이렇게 삼체 문명으로부터 시작했으면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삼체 문명이 주인공이 아니다. 바로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삼체 문명이 이주하기로 결정한 지구 생명체인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들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부의 비밀 조직에 끌려간 왕먀오 박사. 그의 눈에 보이는 이상한 카운트 다운 숫자. 그리고 형사 스창. 과학자들의 의문의 죽음.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왕먀오는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온몸으로 겪은, 천재 수학자인 딸을 잃은 천문학자 예원제를 만나게 된다. 예원제를 만나 과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러한 외계 생명체에게 지구의 존재를 알린 이가 바로 예원제임을 알게 된다. 그들이 삼체 문명을 지구로 오게 해, 지구를 개혁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도.


여기에 소설은 지구의 환경 파괴, 인간중심주의 등도 다루고 있다. 자신의 종만을 위해서 다른 종들을 멸종시키는 인간들. 그런 인간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외계 문명을 통해서라도 지구를 개조하겠다는 생각을 지닌 지식인들.


아마 예원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지구 생명체를 멸종시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지구를 생명체들은 좀더 조화롭게 살게 하겠다는 목표로 그러한 행동을 했으리라. 하지만 의도와 결과가 늘 일치하지는 않는 법.


삼체 문명은 지구를 정복하고, 지구에서 자신들이 살아가려 하지만, 결코 지구인과 함께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자손을 낳지 않게 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설의 말미에 그들이 보내온 말은 "너희는 벌레다!"(433쪽)다.


벌레. 다른 종을 벌레로 지칭한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박멸해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벌레라는 말을 없애야 하는 존재로 사용하고 있듯이.


여기에 그들의 문명은 지구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나다. 그들이 보내온 양성자만 봐도 그렇다. 과학자들을 절망에 빠뜨리기 쉽다. 하지만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형사 스창이 그렇다. 그는 좌절에 빠진 왕먀오와 다른 과학자를 밭으로 데려간다. 밭에서 왕성하게 보리를 뜯어먹고 있는 메뚜기 떼들.


이 메뚜기 떼들을 보면서 왕먀오는 깨닫는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벌레라고 했지만, 그들이 인간을 정복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벌레는 어떤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것이기에. 단순히 기술력의 차이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소설은 막을 내리는데...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밭에 있는 보리를 보고 느낀 왕먀오의 생각이.


'보라, 이것이 바로 벌레다. 벌레의 기술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와 삼체 문명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인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것들을 박멸하려고 했다. 각종 살충제를 비행기로 분사하기도 하고 천적을 키워 뿌리기도 하고 알을 찾아 없애고 유전자 변형으로 번식을 근절하기도 했다. 태워도 보고 수몰시키기도 하고 각 가정에 살충제를 비치해놓고 사무실 책상에는 파리채같이 그들을 없앨 무기도 준비해놓았다. 이 긴 전쟁은 인류 문명과 늘 함께했고 아직까지도 승패가 결정 나지 않았다. 벌레는 멸종되지 않았을뿐더러 예전처럼 여기저기에서 횡행한다. 그 수도 인간이 나타나기 전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인류를 벌레로 보는 삼체인은 벌레는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439-440쪽)


이런 삼체 문명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은 통보를 받은 시점으로부터 450년 뒤다. 인류의 세대가 30년을 한 세대로 하면 15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도착한다. 그때까지 이미 외계 문명의 침략을 예고 받은 상태에서 지구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손을 놓고 있을 것인가?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지배에 놓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해 스스로 인간 종의 멸망을 추진할 것인가? 


소설에서는 이러한 세 부류의 집단과 더불어 대책을 마련하려는 집단이 나온다. 어쩌면 내부의 갈등을 외부의 갈등으로 해소하려 할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세계 각 나라가 협력하는 모습으로 나오니 말이다.


이렇게 소설은 외계 생명체인 삼체 문명을 통해 지구에서 인류가 추진해온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끼친 부작용과 우리 지구가 앞으로도 계속 존속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갈수록 예측불가능해지는 기후 재앙 앞에서 지구를 떠나려는 계획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사람들도 있는 이 상황은, 삼체 문명이 처한 상황에 빗댈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삼체 문명처럼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꾸어야 할까?


아니면 지구가 더 살기 힘든 행성으로 변해가지 않도록 손을 맞잡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기후 재앙이라는 삼체 문명의 침입을 우리는 받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삼체 문명은 450년 뒤에 도착하겠지만, 기후 재앙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테니. 


'잘 쓴 과학소설이란 제일 변화무쌍하고 제일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하게 쓴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447쪽)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 우리에게 닥칠 삼체 문명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2부와 3부도 기대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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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7-22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딸이 재밌다고 읽어보라는데 여유가 없네요 ㅠ

kinye91 2024-07-22 11:39   좋아요 2 | URL
재미 있어요. 참 방대한 내용이지만, 읽을수록 흥미진진해져요. 여유가 있을 때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헌책방에서 구한 시집. 예전에 '한산시'라는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우연히 헌책방에 누워 있던 이 책을 발견했다. 물론 내가 발견한 책은 최근에 (2002년을?) 나온 이 책이 아니다. 


  1970년에 출간된, 불교 홍법원에서 출간한 책이다. 물론 번역자는 김달진이다. 시인이었기에 선시를 잘 번역했겠다 싶은 마음도 들었는데...


  깊은 산 속에 살며 시를 지은 한산, 그리고 풍간과 습득의 시를 모아놓은 책이다.


  예전 책이라 글자가 세로로 쓰여 있다. 하지만 위에 한자 원문이 있어서 좋다. 원문의 한자를 다 읽지는 못하지만 간혹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으니.



이렇게 되어 있다. 한 번에 주욱 읽을 수가 없다.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니...


읽으면서 나도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지기를 바라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있으니...


곁에 두고 계속 읽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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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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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평탄해 보이지만, 그러한 평탄 속에는 수많은 주름이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춰진 주름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그런 주름들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주름을 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틈들을 가리려고만 해서는 진실을 볼 수 없다. 삶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틈들을 인식하고, 그 틈들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온전한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틈, 주름들을 가리려는 세력들이 있다. 기득권을 지닌 세력, 그들은 주름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들의 허위가 밝혀지고, 허위로 누리고 있던 권력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주름이 드러나지 않게, 틈이 나타나지 않게 가리고 메우려 한다.


권력자의 말은 권력 없는 사람들의 말을 억압하고, 말이 발화되지 못하게 한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권력을 지닌 자다. 그렇게 권력을 지닌 자들은 약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그렇다고 약자들이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그들이 겪은 주름들을 펼 수 있어야 한다. 주름들을 펴서 그들 역시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연대가 필요하다.


침묵이 아닌 말하기는 연대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 그런 연대는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공감의 언어, 진실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소설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첫작품에서 '나의 언어 나의 이름'(42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언어,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사회적 제약이 만만치 않다. 권력의 힘은 이들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길 원하지 않는다. 단지 원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억압하고 배제한다. 철저하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그래서 약자들은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거나 한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다. 어떤 사건을 언급할 때 이름이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한정현은 이것을 거부한다. 한정현은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틈, 주름에서 그들을 나오게 한다. 주름으로 감춰져 있던 사람들, 삶들을 펼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이 더욱 다양함을, 더 많은 삶들이 감춰져 있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단지 보여줌을 넘어 연대를 통해 그들이 주체로 서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집의 끝에 실린 에필로그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떠나올 때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떠나올 때와 다른 모습으로.


소설집 제목이 된 '쿄코와 쿄지'만 봐도 그렇다. 두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다. 한 인물이다. 쿄코와 쿄지는 모두 경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글로는 같은 경자지만 한자어로 쓰면 다르다. 남녀 차별이 있던 시대에 동등한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네 명의 친구는 모두 이름에 '자'를 넣기로 한다. 아들이 아닌 스스로 자(自). 이는 남의 눈에 비친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자'로 살기는 힘든 세상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신부'들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수녀'들에 대한 언급은 없듯이, 운동권에서도 앞에 나섰던 많은 남성 운동권 지도자들은 언급이 자주 되지만, 뒤에서 그들을 받쳐준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은 잘 언급되지 않듯이, 또 삼풍백화점에서 묵묵히 일해야 했던 많은 여성노동자들, 용산 참사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 부마항쟁도 마찬가지로 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자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건너가 경자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행정을 담당한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경자의 자를 아들 자(子)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쓴다. 이 이름이 일본어로 쿄코다. 하지만 경자는 스스로 '자(自)'자를 쓰고 싶어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아직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자(自) 자를 쓰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이 다른 소설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각기 다른 단편들이지만 읽다보면 인물들이 서로 얽히게 된다. 관계를 맺는다. 즉 약자들의 연대, 감춰진 사람들의 연대가 소설 속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의 삶을 주름으로부터, 틈으로부터 꺼내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하나로 엮여 나타나는데, 명확히 서술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삶에서 접힌 주름들을 펴면서 우리에게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직면하게 한다. 그 펴진 주름도 다 펴진 것이 아님을,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들이 실려 있다.


한정현의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낙관하자!'를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언어를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소설집의 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그들이 기억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 테고 그것으로 충분할 것도 같았다. 나 또한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버엔 그들에게 내가 공부했던 부산에 대해, 부산에서 바라봤던 광주에 대해 말해볼까 싶었다.' (451쪽) 


이렇게 자신의 언어를 찾은 사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 바로 그들이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약자들의 연대가 있었음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현을 꼽을 수 있게 만드는 작품집이기도 하고... 기존의 작품들과 연결이 되기도 하니, 읽으면서 한정현 작품들을 곱씹게 되기도 하는 소설집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경자(京子)가 아닌 경자(京自)들이 있음을, 우리는 그러한 경자들을 주름과 틈에서 나오게 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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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의 '만인보'


  한때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시인인 고은이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을 시로 표현했다. 역사적 인물부터 동네 사람들까지. 그리고 제목을 '만인보'로 붙였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던 시였다. 고은이 추문으로 배척당하기 전까지는.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러한 추문에 휩싸였다는 사실 자체로도 고은에게는 치명상이었다. 그래서 '만인보'도 만 사람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 이 시집을 만났다. '입국자들' 


제목에서 벌써 이주민임을 알게 된다. 입국이라는 말이 나라에 들어온다는 뜻이고, 이는 해외여행을 갔다고 왔다는 말이 아니라, 국적이 다른 사람이 그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1부 '국경 너머'에서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두 나라가 된 북한. 한 민족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갈등이 심한 지경에 처해 있으나, 여전히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그들에 대한 이야기


2부 '사막 대륙'은 몽고에서 온 사람들 이야기. 우리와 외모가 비슷하지만 점점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살기 힘들어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 이야기.


3부 '이주민들'은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입국한 사람들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농촌으로 시집온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4부 '귀환자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 사람들 이야기다. 그들이 금의환향을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기서 부상을 당해 돌아간 사람들, 기껏 송금했으나 그 돈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렇게 이 시집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내용이 밝지가 않다. 우리가 이주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이주민들을 같은 사람으로 대우했는가? 그렇지 않음이, 그들을 이윤을 생산하는 도구로, 또는 가족을 잇는 존재에 더 우선을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이주민들을 막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다문화 사회로 전환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주민이라고 하기 전에 우리나라에 사는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역시 더 풍요로워지고.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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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 생명의 씨앗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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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발표된 연대 순으로 묶었기에, 이번 권에서는 1962년부터 1985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영화 '듄'을 보지 않았고, 소설 '듄'도 읽지 않았기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서, 듄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단편들이 있다는데, 그것이 내게는 큰 의미를 주지 않았다.


그냥 SF소설이라고, 그런 소설들이 시대와 배경만 다르지 우리 인간들의 삶을, 인간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고 여기고 읽을 뿐이다. 이 소설집도 다양한 배경,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인간이 만약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두 편이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생명의 씨앗'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피아노 수송 작전'이다. 둘 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주를 주제로 삼고 있다.


만약 우리가 낯선 우주의 다른 행성에 정착해 살아야 한다면 과연 지구와 똑같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 행성을 지구와 똑같이 만들어야 할까? 오히려 그 행성에 인간이 맞춰야 하는 것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생명의 씨앗'이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행성을 발견하고 인간들이 이주해 살아가도록 한다. 초기에 정착하기 위해서 지구에서 씨앗들을 가지고 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행성에서는 지구의 씨앗들이 살아남지 못한다.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왜 그럴까 고민한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게 살아남은 생명체인 '매'에게서 답을 찾는다. 그렇다. 정착한 행성을 지구와 똑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성에 인간들이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다. 이것이 진화 아니겠는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려 할 때 지구와 똑같은 조건, 똑같은 생물들로, 지구에서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하면 과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구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 그 행성은 그 행성대로 수억 년 또는 수백 억년 동안 자신의 환경을 구축해왔다. (현재 우주의 역사를 약 138억 년이라고 하니, 그에 맞추면)


그렇다면 그 행성은 그 행성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 있다는 말이다. 지구에서 씨앗을 가져갔다고 해서 지구에서와 같은 성장을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행성에 맞는 성장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그 행성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지구에서와 다른 선택을 한 호니다와 크로다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 중심주의를 고수하는 과학자들은 그걸 인정 안 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처럼.


'과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문제였다. 그들은 이곳을 또 다른 지구로 만들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행성은 지구가 아니었고, 지구가 될 수도 없었다. 들여온 생물들 가운데 매가 가장 먼저 이 사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크로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429쪽)


과학자라면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진화의 경로를 인간들이, 다른 생물들이 밟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틀에 갇힌 과학자들은 다른 행성을 지구에 맞추려 할 것이다. 바로 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과학자들처럼.


하지만 생활에 밀착한 사람들은 과학자와 다른 것을 발견한다. 소설의 크로다가 발견한 것처럼, 그들은 지구가 아닌 행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신들이 바뀌어야 함을, 지구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다른 행성에 이주한 인간들이 마주칠 일들이다.


'피아노 수송 작전'은 이주하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우주선에 실을 짐의 무게가 정해져 있다면... 


전혀 낯선 곳으로 가는 인간들이 꼭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과연 여기에 예술이 포함될까? 작가는 당연히 필요하다고 본다. 예술은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행성으로 가더라도 예술도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는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 물론 그곳에서 조립을 하면 된다. 그러나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온 예술품과 같은 피아노라면? 완전히 다 가져가지 못한다면? 일부라도, 아니 과거를 인식시키는 부분이라고 가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피아노의 무게 때문에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하지만 자식이 이 피아노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느낀 부모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숨겨서 가져갈 수 없기에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도 조금 양보해야 하고.


이런 과정이 이 짧은 소설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아직까지 화성도 가보지 못한 인간이 낯선 은하로 가서 살아야 한다면, 정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갈까? 그런 이주에는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밖에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소설들이 꽤 있다. 타임머신을 생각하는 소설도 있고, 과거에서 사람을 데려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도 있고. 


무엇보다도 앞에서 언급한 두 소설처럼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 있어서 좋다. 그것이 소설이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듄]을 읽어봐야겠다. 적어도 그의 세계관을 잘 드러낸 소설이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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