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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평점 :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지만, 그러한 평탄 속에는 수많은 주름이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춰진 주름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그런 주름들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주름을 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틈들을 가리려고만 해서는 진실을 볼 수 없다. 삶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틈들을 인식하고, 그 틈들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온전한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틈, 주름들을 가리려는 세력들이 있다. 기득권을 지닌 세력, 그들은 주름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들의 허위가 밝혀지고, 허위로 누리고 있던 권력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주름이 드러나지 않게, 틈이 나타나지 않게 가리고 메우려 한다.
권력자의 말은 권력 없는 사람들의 말을 억압하고, 말이 발화되지 못하게 한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권력을 지닌 자다. 그렇게 권력을 지닌 자들은 약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그렇다고 약자들이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그들이 겪은 주름들을 펼 수 있어야 한다. 주름들을 펴서 그들 역시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연대가 필요하다.
침묵이 아닌 말하기는 연대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 그런 연대는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공감의 언어, 진실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소설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첫작품에서 '나의 언어 나의 이름'(42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언어,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사회적 제약이 만만치 않다. 권력의 힘은 이들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길 원하지 않는다. 단지 원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억압하고 배제한다. 철저하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그래서 약자들은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거나 한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다. 어떤 사건을 언급할 때 이름이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한정현은 이것을 거부한다. 한정현은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틈, 주름에서 그들을 나오게 한다. 주름으로 감춰져 있던 사람들, 삶들을 펼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이 더욱 다양함을, 더 많은 삶들이 감춰져 있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단지 보여줌을 넘어 연대를 통해 그들이 주체로 서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집의 끝에 실린 에필로그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떠나올 때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떠나올 때와 다른 모습으로.
소설집 제목이 된 '쿄코와 쿄지'만 봐도 그렇다. 두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다. 한 인물이다. 쿄코와 쿄지는 모두 경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글로는 같은 경자지만 한자어로 쓰면 다르다. 남녀 차별이 있던 시대에 동등한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네 명의 친구는 모두 이름에 '자'를 넣기로 한다. 아들이 아닌 스스로 자(自). 이는 남의 눈에 비친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자'로 살기는 힘든 세상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신부'들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수녀'들에 대한 언급은 없듯이, 운동권에서도 앞에 나섰던 많은 남성 운동권 지도자들은 언급이 자주 되지만, 뒤에서 그들을 받쳐준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은 잘 언급되지 않듯이, 또 삼풍백화점에서 묵묵히 일해야 했던 많은 여성노동자들, 용산 참사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 부마항쟁도 마찬가지로 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자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건너가 경자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행정을 담당한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경자의 자를 아들 자(子)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쓴다. 이 이름이 일본어로 쿄코다. 하지만 경자는 스스로 '자(自)'자를 쓰고 싶어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아직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자(自) 자를 쓰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이 다른 소설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각기 다른 단편들이지만 읽다보면 인물들이 서로 얽히게 된다. 관계를 맺는다. 즉 약자들의 연대, 감춰진 사람들의 연대가 소설 속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의 삶을 주름으로부터, 틈으로부터 꺼내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하나로 엮여 나타나는데, 명확히 서술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삶에서 접힌 주름들을 펴면서 우리에게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직면하게 한다. 그 펴진 주름도 다 펴진 것이 아님을,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들이 실려 있다.
한정현의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낙관하자!'를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언어를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소설집의 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그들이 기억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 테고 그것으로 충분할 것도 같았다. 나 또한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버엔 그들에게 내가 공부했던 부산에 대해, 부산에서 바라봤던 광주에 대해 말해볼까 싶었다.' (451쪽)
이렇게 자신의 언어를 찾은 사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 바로 그들이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약자들의 연대가 있었음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현을 꼽을 수 있게 만드는 작품집이기도 하고... 기존의 작품들과 연결이 되기도 하니, 읽으면서 한정현 작품들을 곱씹게 되기도 하는 소설집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경자(京子)가 아닌 경자(京自)들이 있음을, 우리는 그러한 경자들을 주름과 틈에서 나오게 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