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구한 시집이다. 저자의 서명도 들어 있고, 또한 곳곳에 줄도 그어져 있는. 읽은 사람의 흔적이 오롯이 들어나 있는 시집이라고나 할까.

 

김기택이 시집 중에서 [사무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발한 상상력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세상을 이렇게도 자세하게 들여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인데...

 

세상을 관찰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어서 좋은 시집이다.

 

그런 기대를 이번 시집에서도 저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관찰할 수도 있구나. 이런 관찰을 토대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상상력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시란 어디선가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세상을 잘 바라보는데 있음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을 읽다가 요즘 뉴스에서 많이 나오는 미세먼지가 함께 떠올랐는데...

 

예전에는 봄이면 며칠 동안 황사로 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오죽했으면 미세먼지로 인한 폐질환 환자가 30%나 늘어났다고 하겠는가. 먼지에서 가끔은 흙냄새도 나는데... 이 먼지들은 생명의 먼지가 아니라 죽음의 먼지일 뿐이다.

 

세상이 점점 이러한 먼지로 쌓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이 먼지들을 털어내고 생명이 넘치는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야 하는데...

 

김기택이 이번 시집에서 이 미세먼지와 정반대되는 내용을 지닌 시가 있다. 그 시의 제목은 '맑은 공기에는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맑은 공기에는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겨울 아침, 창문을 여니 찬 산바람이 들어온다

맑은 공기에는 언제나 조금씩 비린내가 난다

맑은 공기가 더 맑아지는 비린내

아침 냄새가 더 어침 냄새 같은 비린내

그 비린내를 마시니

폭포를 먹은 듯 머리가 세차기 헹구어진다

 

플 속에 사이좋게 섞여 썩고 있는

무수한 눈과 귀, 손과 발의 냄새들

마른 풀과 낙엽에서 녹아나오는 푸른 냄새들

아직도 공기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투명한 심장과 미세한 허파와 안개 같은 핏줄들

희미한 냄새만 남은 웃음소리들 흐느낌들

 

덜 깬 잠을 때리는이 냄새에는 귀신 냄새가 서려 있다

깊이 들이마시면 허파가 시리다

귀신들도 비린내처럼 맑은 곳에서만 산다

이 냄새들이 산 속으로 계곡으로 더 깊이

절과 굿당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른 아침이면 비린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있다

 

김기택, 소. 문학과지성사. 2005년 초판 4쇄. 35쪽

 

이런 냄새... 맑은 공기. 살아 있는 것들을 포함한 그런 냄새. 이 겨울. 창문을 열지 못하고,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맑은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비린내. 그것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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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의 첫 시가 마음에 팍 꽂혔다. 사실 다른 책에서 본 시인데.. 어디엔가 적어 놓았던 시이기도 하고. 이 시가 이 시집에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됐다. 이 시집은.

 

자연친화적인 시를 쓰는 시인.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두는 시인. 그러나 시를 결코 어렵게 쓰지는 않는 시인.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한 사람. 한 때 국어교과서에 나희덕 시인의 '배추의 마음'이라는 시가 실리기도 했었지.

 

그의 시는 쉽다. 읽기에 편하다. 그리고 무언가 의미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참 단정한 시들을 쓴다.

 

그런데 이런 단정함 속에서도 어떤 강함이 느껴진다. 유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데...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지니게 한다.

 

어쩌면 이게 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지금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소통단절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말들은 넘쳐나는데, 이 말들이 각자 따로 놀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어쩌면 우리는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말들을 서로 튕겨내고만 있지는 않은지... 오로지 자기의 말만 뱉어내고 남의 말을 품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더 크고 강한 존재들이 더 넓은 존재들이 마음을 열고 작고 연약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 굳건하게 자신들을 걸어 잠그고 있어 더 이상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1997년. 민음사. 11쪽

 

호수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받아들이고, 그리고 '단단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자신에게 기대는 모든 것들을 '비추어' 준다.

 

어느 것이 오더라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감싸안는다. 그것이 호수다. 호수의 그 부드러움으로 모든 것들은 호수에 안겨 고요함을, 풍요로움을, 평화로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드러움을 잃은 호수. 꽝꽝 얼어버린 호수는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인 호수가 된다. 오로지 자신만 안다. 다른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품지 않는다. 그냥 되받아칠 뿐이다.

 

이런 호수의 차가움. 소통의 단절. 제 안에 갇혀 제 스스로만 존재하는 호수.

 

이것은 강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약한 사람들을 품지 않는. 관용과 용서. 이것은 먼저 강한 자들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호수가 제 스스로를 얼려 놓고, 다른 것들을 튕겨낼 때 여기에 어떻게 관용과 용서가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소통이 단절된 모습은 바로 얼어붙은 호수와 다름이 없다. 그런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진다. 제발 응답하라고, 받아들이라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라고.

 

그러나 이미 제 스스로 문을 닫아건 호수는 이 돌멩에 마저도 튕겨 낸다. 그리고 함께 있어야 할 존재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메아리만 남아서, 헛된 울림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 시를 읽고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이것이다.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으로 해석해도 되지만(맨 마지막 행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기도 하다) 시의 좋은 점은 해석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자들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나는 이 시에서 읽는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더 큰 돌들이, 더 많은 돌멩이들이 호수의 얼음을 향해 날아가, 부딪혀 얼음을 깨고 호수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켜 그의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꿈을 꾸기도 한다.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호수. 그래서 그 잔잔함으로 평화와 행복을 전해주는 호수. 그런 호수를 바라고 있기에... 이 시의 울림이 지금, 내 마음에도 울리고 있다.  

 

이 울림과 비슷하게 또 하나의 시. 도무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시. '천장호에서'는 호수의 얼음과 돌멩이라면, 이 시에서는 항아리와 간장이다. 돌멩이는 얼음을 깨지 못하고, 새떼도 부르지 못하고, 그냥 메아리만 울리게 했다면, 간장은 항아리 밖으로 나온다. 항아리를 깬다.

 

     어떤 항아리

 

이건 금이 간 항아리면서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손가락으로 퉁겨 보면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물을 담아 보아도 괜찮다

 

그런데 간장을 담으면 어디선가 샌다

간장만 통과시키는 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너무나 짜서 맑아진,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그의 감식안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시라는 항아리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1997년. 민음사. 49-50쪽

 

항아리가 시가 아니라, 간장이었으면, 항아리는 시를 가두는 틀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시는 항아리가 된다. 보통의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우리가 소통을 하는데는 어떤 지장도 주지 않는, 더욱이 아름다움까지도 주는 그런 항아리(시).

 

그러나 그 아름다움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삶의 진한 고통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만 존재하게 된다. 틀을 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다. 간장과 같은 삶이 들어가야 한다. 시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그런 시.

 

시가 시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그런 이야기 아닐까... 우리가 지녀야 할 또다른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드는데... 마음을 크게 울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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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해설자의 말에도 나와 있듯이 주로 수평을 다루고 있다. 그는 수평에 대해서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평 중에서도 내 마음에 와 닿은 것은 바로 늙음이다.

 

늙음이야 말로 우리네 삶에서 가장 수평이 되는 순간이 아니던가. 인간은 수평에서 시작하여 수직을 꿈꾸다가 다시 수평으로 돌아오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네 삶에서 두 순간(요즘은 그렇지도 않은가보다마는), 즉 수평이 되는 어린 시절과 늙음의 순간은 모두가 평등하게 겪지 않는가. 그렇게 늙음은 우리를 평등으로 이끌게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결국 어떻게 늙었느냐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무슨 변증법도 아니지만, 처음의 수평과 나중의 수평은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을테고...

 

나중의 수평, 그 늙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달해 줄텐데...

 

그런데 요즘은 잘 늙는다는 것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늙음이란 삶의 신산함을 거쳐 이제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젊음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히려 늙음을 무슨 특권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늙음을 그냥 내놓아버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잘 늙음은 바로 '선배'가 된다는 말이고, '원로'가 된다는 말인데... 그런 선배, 원로가 그리운 요즘이다. 이런 시대를 견뎌나갈 지혜를 주는 그런 늙음 말이다. 

 

세상의 신산함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가재미'란 시란 생각이 든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무게에 눌려 더 납작해진 몸으로, 아래위가 아니라 좌우로 자신의 삶을, 수평으로 자신의 삶을, 다른 말로 하면 무거운 짐에 눌려 낮은 곳에서만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삶.

 

그러나 그러한 삶 속에서도 세상 모든 삶이 녹아 있었으며, 우리는 그런 낮은 삶에 함께 할 때 그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시를 인용한다. 늙음에 대하여, 그러나 그 늙음의 다름에 대하여. 낮은 곳에서 수평으로 살다가 늙음에 다다랐지만, 그러나 그 늙음은 그냥 연민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삶이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삶 속에는 세상이 들어 있다.

 

그 세상이 들어 있는 늙음은 우리에게 '선배'가 되고 '원로'가 된다. 그래서 이 두 시는 마음에 와 닿는다. 콕 박힌다. 나는 어떻게 늙을까? 내 늙음으로 남을 위로해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내잡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느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년 2쇄. 40-41쪽

 

 

 

 

노모(老母)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근느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문태준,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년 2쇄.18쪽.

늙음.

 

이 시 '노모'처럼 아름다운 골짜기를 지닌 사람. 그런 선배를 만나고 싶다. 나도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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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뉴스에서 사랑의 온도탑이 100도를 넘었다고 했다.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기부금을 모았다는 얘기다. 참 훈훈한 얘기다. 이런 훈훈함이 사람들이 겨울을 견디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씁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 모두가, 아니 사회가 책임져야 할 일들을 자꾸만 개인에게 미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IMF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사고는 있는 자들이 다 쳐놓고, 그 뒷수습은 없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회복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분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자꾸만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사랑의 온도탑. 좋다. 이거 100도를 늘 넘겼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온도탑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려운 사람이 꼭 연말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사람들이 지내기 힘든 것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아니 계절을 가리지 않고 힘들텐데...

 

연말에 이런 행사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행사 자체가 필요없게 사회기반 시설을, 사회복지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바우만의 말처럼 내 형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왜 내 형제를 내게 묻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순간, 그 사회는 윤리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버린다는 그런 말... 그런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삶이보이는 창'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사랑의 온도탑을 데우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온기를 내보내고 있다. 이게 삶창이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친절'시리즈다.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나치게 친절을 강요하는 사회는 친절하지 않음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친절을 강요하는 사회, 그런 친절은 자신에게만 해당이 된다. 남에게는 오히려 막 대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회. 그것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친절을 가장하고 사는 모습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대면하고 서로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이번 삶창에서 말하는 '친절 금지'일 것이다.

 

사람들의 따스한 이야기.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그럼에도 아직도 힘들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이번 호에도 실려 있다. 그래서 삶창은 나를 깨어있게 한다.

 

적어도 눈 뜨고 있으라고 한다. 그것도 강하게가 아니라 나직하게 나에게 속삭인다. 깨어 있는 삶이 아름답다고.

 

삶창은 이렇게 계속 따스하게 깨어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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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희망으로...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절망은 우리의 현실에서, 희망은 우리와 비슷한 나라들, 라틴아메리카에서... 아니, 바로 우리의 이 현실에서...

 

'밀양 송전탑의 어떤 하루'와 '일상 속에 감춰진 방사능'에서 절망을 보았는데...

 

이 둘은 핵과 관련이 되고, 그것은 우리의 파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도시의 전력을 위해서 위험천만한, 송전선이 지나는 근처의 삶을 파괴하는 그런 발전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밀양의 외침을 공영방송이라는 데서, 전국방송이라는 데서 제대로 다루어주지도 않고, 오로지 지역이기주의로 몰아부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조차도 제대로 이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절망을 본다.

 

또한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방사능, 그러나 전문가들에게도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는 방사능에 대해서, 이렇게 알려주는 글을 읽으며, 이것 참... 알려주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지...

 

국민의 건강이 국민의 행복을 이루는 기본 조건이고, 방사능은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제일 요소라는 사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겠는가... 송전탑이든 방사능이든 모두 핵과 관련이 있는 문제인데...

 

이렇게 녹색평론에서는 끊임없이 방사능에 대해서, 핵에 대해서 우리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조화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세상은 그저 조용하기만 할 뿐인 모습에서 절망을 본다.

 

그러나 이 책의 중후반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이야기에서 희망을 본다. 아니 희망은 이런 절망 속에 있음을 본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인간이 가장 나중까지 지닌 것이 바로 희망이듯이...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상황을 겪었던, 어쩌면 우리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라틴아메리카가 지금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가끔 들려오는 소식은 참 고무적이다. 이런 고무적인 현상에 더해서 이번 호에서는 '시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이란 글과 '부엔 비비르-좋은 삶과 자연의 권리'라는 글을 실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오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인데... 두 번째 연재되고 있는 '농사꾼이 본 쿠바(2)'와 더불어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글이다.

 

시가 꼭 혁명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꼭 선동시일 필요는 없다.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잘 드러낸 시라면 그 시는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길게 본다. 그들은 인간의 삶에서 겪는 고통을, 그 기다림을 혁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치환할 줄 알았다.

 

그래서 서정을 노래한 시와 노래들이 그들의 혁명을 유지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마치 일제시대 임화의 단편서사시가 서정성을 획득했을 때 더한 울림을 주었듯이... 이용악의 시들이 우리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노래했지만, 그 시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오히려 더 일깨웠듯이...이육사의 시들이 상당한 울림을 가지고 지금도 읽히고 있듯이... 개인적인 서정이 담뿍 담긴 윤동주의 시들을 우리가 저항시라고 부르듯이...

 

혁명을 노래하는 시들은 꼭 피의 냄새를 풍길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표현하는 그런 시들이면 된다.

 

그래서 파블로 네루다의 혁명시만큼 그의 연애시가 혁명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을 헌법에 채택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는 진정한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혁명을 계속 진행중인 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의 활동에서 우리가 나아갈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시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이라는 글을 읽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 파블로 네루다. 그들 나라에서는 돈 파블로라고 알려졌다는 그 사람. 그 사람의 시집이 떠올랐고...

 

단순한 혁명시인이 아닌, 삶을 노래한, 그래서 혁명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시집이 예전에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제목을 보라.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다. 이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사랑은 희망으로, 절망은 희망을 예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절망 속에 좌절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희망을 꽃피운, 사랑을 노래한 그들은 지금... 희망을 시대를 만들었고, 이끌어가고 있다.

 

밀양에서, 강정에서, 또 어디어디에서 우리는 숱한 절망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 절망들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찾고 있다. 희망을 보고 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여 희망이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님을... 희망은 언제가 되던 오게 되어 있음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 희망을, 지금 절망의 시대... 다시 한 번 찾고 있다. 녹색평론 134호를 읽으며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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