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의 첫 시가 마음에 팍 꽂혔다. 사실 다른 책에서 본 시인데.. 어디엔가 적어 놓았던 시이기도 하고. 이 시가 이 시집에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됐다. 이 시집은.
자연친화적인 시를 쓰는 시인.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두는 시인. 그러나 시를 결코 어렵게 쓰지는 않는 시인.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한 사람. 한 때 국어교과서에 나희덕 시인의 '배추의 마음'이라는 시가 실리기도 했었지.
그의 시는 쉽다. 읽기에 편하다. 그리고 무언가 의미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참 단정한 시들을 쓴다.
그런데 이런 단정함 속에서도 어떤 강함이 느껴진다. 유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데...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지니게 한다.
어쩌면 이게 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지금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소통단절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말들은 넘쳐나는데, 이 말들이 각자 따로 놀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어쩌면 우리는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말들을 서로 튕겨내고만 있지는 않은지... 오로지 자기의 말만 뱉어내고 남의 말을 품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더 크고 강한 존재들이 더 넓은 존재들이 마음을 열고 작고 연약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 굳건하게 자신들을 걸어 잠그고 있어 더 이상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1997년. 민음사. 11쪽
호수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받아들이고, 그리고 '단단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자신에게 기대는 모든 것들을 '비추어' 준다.
어느 것이 오더라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감싸안는다. 그것이 호수다. 호수의 그 부드러움으로 모든 것들은 호수에 안겨 고요함을, 풍요로움을, 평화로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드러움을 잃은 호수. 꽝꽝 얼어버린 호수는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인 호수가 된다. 오로지 자신만 안다. 다른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품지 않는다. 그냥 되받아칠 뿐이다.
이런 호수의 차가움. 소통의 단절. 제 안에 갇혀 제 스스로만 존재하는 호수.
이것은 강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약한 사람들을 품지 않는. 관용과 용서. 이것은 먼저 강한 자들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호수가 제 스스로를 얼려 놓고, 다른 것들을 튕겨낼 때 여기에 어떻게 관용과 용서가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소통이 단절된 모습은 바로 얼어붙은 호수와 다름이 없다. 그런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진다. 제발 응답하라고, 받아들이라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라고.
그러나 이미 제 스스로 문을 닫아건 호수는 이 돌멩에 마저도 튕겨 낸다. 그리고 함께 있어야 할 존재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메아리만 남아서, 헛된 울림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 시를 읽고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이것이다.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으로 해석해도 되지만(맨 마지막 행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기도 하다) 시의 좋은 점은 해석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자들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나는 이 시에서 읽는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더 큰 돌들이, 더 많은 돌멩이들이 호수의 얼음을 향해 날아가, 부딪혀 얼음을 깨고 호수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켜 그의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꿈을 꾸기도 한다.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호수. 그래서 그 잔잔함으로 평화와 행복을 전해주는 호수. 그런 호수를 바라고 있기에... 이 시의 울림이 지금, 내 마음에도 울리고 있다.
이 울림과 비슷하게 또 하나의 시. 도무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시. '천장호에서'는 호수의 얼음과 돌멩이라면, 이 시에서는 항아리와 간장이다. 돌멩이는 얼음을 깨지 못하고, 새떼도 부르지 못하고, 그냥 메아리만 울리게 했다면, 간장은 항아리 밖으로 나온다. 항아리를 깬다.
어떤 항아리
이건 금이 간 항아리면서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손가락으로 퉁겨 보면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물을 담아 보아도 괜찮다
그런데 간장을 담으면 어디선가 샌다
간장만 통과시키는 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너무나 짜서 맑아진,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그의 감식안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시라는 항아리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1997년. 민음사. 49-50쪽
항아리가 시가 아니라, 간장이었으면, 항아리는 시를 가두는 틀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시는 항아리가 된다. 보통의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우리가 소통을 하는데는 어떤 지장도 주지 않는, 더욱이 아름다움까지도 주는 그런 항아리(시).
그러나 그 아름다움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삶의 진한 고통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만 존재하게 된다. 틀을 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다. 간장과 같은 삶이 들어가야 한다. 시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그런 시.
시가 시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그런 이야기 아닐까... 우리가 지녀야 할 또다른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드는데... 마음을 크게 울리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