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희망으로...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절망은 우리의 현실에서, 희망은 우리와 비슷한 나라들, 라틴아메리카에서... 아니, 바로 우리의 이 현실에서...

 

'밀양 송전탑의 어떤 하루'와 '일상 속에 감춰진 방사능'에서 절망을 보았는데...

 

이 둘은 핵과 관련이 되고, 그것은 우리의 파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도시의 전력을 위해서 위험천만한, 송전선이 지나는 근처의 삶을 파괴하는 그런 발전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밀양의 외침을 공영방송이라는 데서, 전국방송이라는 데서 제대로 다루어주지도 않고, 오로지 지역이기주의로 몰아부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조차도 제대로 이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절망을 본다.

 

또한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방사능, 그러나 전문가들에게도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는 방사능에 대해서, 이렇게 알려주는 글을 읽으며, 이것 참... 알려주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지...

 

국민의 건강이 국민의 행복을 이루는 기본 조건이고, 방사능은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제일 요소라는 사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겠는가... 송전탑이든 방사능이든 모두 핵과 관련이 있는 문제인데...

 

이렇게 녹색평론에서는 끊임없이 방사능에 대해서, 핵에 대해서 우리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조화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세상은 그저 조용하기만 할 뿐인 모습에서 절망을 본다.

 

그러나 이 책의 중후반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이야기에서 희망을 본다. 아니 희망은 이런 절망 속에 있음을 본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인간이 가장 나중까지 지닌 것이 바로 희망이듯이...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상황을 겪었던, 어쩌면 우리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라틴아메리카가 지금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가끔 들려오는 소식은 참 고무적이다. 이런 고무적인 현상에 더해서 이번 호에서는 '시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이란 글과 '부엔 비비르-좋은 삶과 자연의 권리'라는 글을 실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오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인데... 두 번째 연재되고 있는 '농사꾼이 본 쿠바(2)'와 더불어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글이다.

 

시가 꼭 혁명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꼭 선동시일 필요는 없다.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잘 드러낸 시라면 그 시는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길게 본다. 그들은 인간의 삶에서 겪는 고통을, 그 기다림을 혁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치환할 줄 알았다.

 

그래서 서정을 노래한 시와 노래들이 그들의 혁명을 유지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마치 일제시대 임화의 단편서사시가 서정성을 획득했을 때 더한 울림을 주었듯이... 이용악의 시들이 우리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노래했지만, 그 시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오히려 더 일깨웠듯이...이육사의 시들이 상당한 울림을 가지고 지금도 읽히고 있듯이... 개인적인 서정이 담뿍 담긴 윤동주의 시들을 우리가 저항시라고 부르듯이...

 

혁명을 노래하는 시들은 꼭 피의 냄새를 풍길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표현하는 그런 시들이면 된다.

 

그래서 파블로 네루다의 혁명시만큼 그의 연애시가 혁명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을 헌법에 채택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는 진정한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혁명을 계속 진행중인 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의 활동에서 우리가 나아갈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시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이라는 글을 읽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 파블로 네루다. 그들 나라에서는 돈 파블로라고 알려졌다는 그 사람. 그 사람의 시집이 떠올랐고...

 

단순한 혁명시인이 아닌, 삶을 노래한, 그래서 혁명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시집이 예전에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제목을 보라.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다. 이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사랑은 희망으로, 절망은 희망을 예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절망 속에 좌절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희망을 꽃피운, 사랑을 노래한 그들은 지금... 희망을 시대를 만들었고, 이끌어가고 있다.

 

밀양에서, 강정에서, 또 어디어디에서 우리는 숱한 절망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 절망들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찾고 있다. 희망을 보고 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여 희망이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님을... 희망은 언제가 되던 오게 되어 있음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 희망을, 지금 절망의 시대... 다시 한 번 찾고 있다. 녹색평론 134호를 읽으며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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