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98호를 읽다.

 

한 때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에서 우리는 베짱이를 게으름뱅이의 전형으로, 그러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상으로 배워왔다. 놀이는 게으름과 통하고, 그것은 곧 인생을 잘못 산 것으로 치환되는 그런 시대.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베짱이 다시 보기가 이루어졌고, 베짱이는 그냥 논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조명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오히려 일만 하는 개미가 골병이 들어서 힘들어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베짱이는 예술가라고 해도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그는 논 것이 아니라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공유한다면 베짱이나 개미나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놀이가 들어설 틈은 없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라 말이 있듯이 인간은 놀이적 인간이다. 놀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놀이는 인간의 본질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아이들을 놓아두면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도 놀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즐겁게 논다.

 

이런 내용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인 "모모"에서도 나온다. 그 소설에서 모모는 가진 것 없는 누더기를 입은 소녀지만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는,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로 나오는데.. 이 소녀와 함께 있으면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모모와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아이들은 온갖 놀이를 만들어낸다. 아주 즐겁게...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시간을 잊고 즐긴다.

 

이것이 진정한 놀이다. 이런 놀이가 우리 삶에서 낭비라고 생각되고, 놀이를 부정적인 대상으로 치부하여 거부하는 문화를 만들어간 것이 요즘 우리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회 상황도 상황이리만큼 놀이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슨 죄를 짓는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으니...

 

삶창 저번 호는 '잠 좀 자자'가 기획이었다. 우리는 밤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를 피곤에 절게 했다는 것을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이번 호의 기획이 이것과 연결된다. 즉, '놂'을 찬양한다.  '놂'...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다. 놀지 못한다는 것은 삶에서 유머가 없다는 얘기와 같다. 이는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긴장 상태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긴장을 이완시켜 주지 않으면 긴장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소모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하여 이 '놂'은 우리에게 명사로 다가와서는 안된다. 이 '놂'은 우리가 연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실행하고 즐겨야 할 동사다. '놂'은 곧 '놀다'다. 잘 놀아야 한다.

 

아이들도 잘 놀게 해야 한다. 하여 잘 논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니 생각을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 결국 논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 아이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전자기기에 매달려 보낼 시간이 아닌, 학원이나 학교에서 공부에 찌들어 보내야 할 시간이 아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낼 시간... 너무도 무료해서 도저히 무언가를 하지 않음면 안되게 할 시간.. 그래서 무언가를 자신들이 만들어갈 시간. 그 시간이 바로 '놂'의 시간이 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에게도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지 말고, 놀 시간이 많게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휴일도 지금 많은 것이 아니다. 더 늘려야 한다. 실질적인 휴일을.

 

그래서 국민들이 놀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놂'은 우리의 문화가 된다. 이제 '놂'은 '놀이'라는 명사에서 '놀다'라는 동사가 된다.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있다. 즐겁게 놀아야 한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은 웃음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놀이는 필요하다. 잘 노는 사람... 그 사람은 삶이 풍요로운 사람이다. 그런 풍요로운 삶들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사회... 좋은 사회다.

 

'놂'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번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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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이 약동하는 오월임에도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겨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즐기기 시작할 때, 아직도 어두운 심연에서 차갑게 드러누운 채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이 있고...

 

까르르 까르르 밝은 웃음으로 세상을 더욱 환하게 밝혀줄 존재들이 그 웃음을 미처 다 웃지도 못하고 우리와 다른 곳으로 가버린 이 시절.

 

구구한 변명은 필요없다. 우리의 잘못이다. 오월을 오월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만이 남았다. 황금연휴라고 하는 이 때 전국민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우울하여 여행은 포기하고... 헌책방 나들이로 대체하였다.

 

헌책방은 자신의 첫주인에게서 떠난 책들이 다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곳. 자신의 생명이 아직도 다하지 않았음을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 이처럼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삶이 계속 이어진다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려나...

 

강은교의 "풀잎"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사랑법' 아니던가. 또 '우리가 물이 되어'인데...

 

지금 이 때는 '우리가 물이 되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강은교의 '물은' 긍정의 물이자 생성의 물, 생명의 물인데... 올 4-5월 우리게에 다가온 물은 부정의 물이자 소멸의 물, 죽음의 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는 어느 정도 위안을 준다.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준다고 할까? 마음 속에 꽉 차 있던 어떤 울분, 억울함 등을 시를 통해 달래보려 한다. 그래서 강은교의 시집을 서슴없이 고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는 죽은이를 관장한다는 '비리데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자신의 부모를 살릴 물건을 가져와 살렸다는.

 

이 시집에도 '비리데기의 여행' 5곡(曲)이 실려 있다. 그에 대한 시를 읽으며 마음을 조금 달래보고... 그러다가 이미 하늘로 간 혼들에 대한 마음에 김소월의 시를 읽으며 달래본다.

 

초혼(招魂)

 - 김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이렇게 애타게 혼을 부르는 일이 없기를...

 

강은교의 이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는 '사랑법'을 보자.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위에 있다.

 

강은교, 풀잎. 민음사. 1994년 초판 20쇄. 90-91쪽.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이들을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우리 사회를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그러한 사랑법.

 

가장 큰 하늘은 바로 우리의 등 뒤에 있다는데.. 바로 우리들 자신이 하늘을 엎고 있는 그런 존재들인데... 하나하나 소중한 하늘같은, 아니 하늘인 우리들이 잘 살 수 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사회.

 

우리 어른들이 그런 사회를 이제 약속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법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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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너무도 무거워서, 너무도 어두워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정말로 화병에 걸려 쓰러질 것만 같아서... 전국민이 모두 울화병에 걸릴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보면서... 화사해야 할 봄날을 지옥으로만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시집을 찾아보았다. 시라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고른 시집이 안찬수의 "아름다운 지옥"

 

아름답다는 말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지옥에서도 희망을 보고 싶으니, 그래서 지옥에 가서 뭇중생들을 다 구하고 싶다는 지장보살도 있었으니... 제발 이 지옥에서도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서. 자신의 죄를 알고 인정하면 지옥 속에서도 최소한 아름다움은 만들어질테니. 조금은 지옥이 훈훈해질테니.

 

아름다운 지옥

 

나는 지옥으로 가련다

 

철로 둘러싼 산이 동쪽에 있는데

그 산은 깊고도 어두워

해와 달의 빛이 없다 한다

거기에 큰 지옥이 있으니

한 칸도 아니고 두 칸도 아니고

끝이 없는 지옥이다

 

지옥은 또 있으니

사각의 외로운 방이 자꾸만 작아지는 지옥

마음을 찌르는 반성의 화살이 쏟아지는 지옥

밑에서는 불을 때고 위에서는 용광로를 쏟아붓는 철판 위에서

하루도 잠들 날 없이 그리워해야 하는 지옥

지옥은 또 있으니

불을 뿜어대는 분화구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지옥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쟁론해야 하는 지옥

피를 닦아내면서 다시 피를 흘려야 하는 지옥

아침부터 외쳐서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계속 외쳐야 하는 지옥

지옥은 또 있으니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너풀거리는 마음의 누더기가 채찍질하는 지옥

자기가 누어놓은 똥을 먹어야 하는 지옥

썩어들어가는 손을 잘라내면 다시 자라나는 손을 잘라내야만 하는 지옥

지옥은 또 있으니

혀를 뽑아내는 지옥

혀에 바늘을 꽂고 말을 해야 하는 지옥

혀로 땅을 갈아엎어야만 하는 지옥

혀로 갈아엎은 땅에 묻혀야만 하는 지옥

 

이런 지옥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으니

지옥문을 다 통과해도 다시 처음 문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장이여, 지장이여

나는 이미 내 죄근을 알고 있으니

나는 지옥으로 가련다

 

안찬수, 아름다운 지옥, 문학동네. 1996년. 49-51쪽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엘리어트가 말했다고 했지.

 

사월은, 꽃 피는 사월은 우리에게는 진달래와 같은 피가 생각나는 달이었지.

 

4·19로 대변되는 사월은 우리에게 피를 연상시켰던, 희생을 연상시켰던 달이었는데, 그럼에도 사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우리에게 희망을 준 달, 새롭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게 해준 달이었는데...

 

이제 사월은 정말로 잔인한 달이 되었구나!

 

생떼같은 목숨들이 바닷속에서 아직도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5일을 보내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배 안에 있는데, 있는 줄을 알면서도 배 안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만 뱅뱅 돌던 5일. 그 모습을 온 국민이 지켜보아야 했던 5일은 그야말로 지옥에 다름 아니었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큰 잘못이 되어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에 한창 봄을 누려야 할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 속에서 생사도 모르는 채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이 현실.

 

마치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는 양, 자신만은 도덕적인 양, 자신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양, 저 높은 곳에서 우월한 도덕심을 지니고 있은 채 그냥 이런 아비규환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높은 자리일수록 책임은 무거워야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높은 자리일수록 책임이 가벼워질까? 마치 자신은 책임이 없는데, 밑에서 다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할까?

 

이래저래 위에서부터 아래에서까지 총체적인 무능을 드러내고 있는 이 현실은 차라리 지옥이다. 지옥이라고, 이건 지옥이라고 생각을 하면 조금 인정이 되려나.

 

이 지옥에서,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 지옥에서 아이들만은, 제발 아이들만은 탈출하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는데...

 

정말로 지옥에 가야 할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이제서야 봄에 도달한 그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겨울을 살고 있는 우리 어른들인데...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그런 사람들인데...

 

잔인한 사월... 정말로 잔인한 사월로 기억될 올 사월.

 

조금이라도 기적이 있다면... 정말로 기적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다시 이 아이들이 봄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지옥은 아이들의 몫이 아니다. 지옥이 있다면 그건 어른들의 몫이다. 아이들은 절대로 지옥을 경험해서는 안된다.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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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교육 잡지라고 할 수 있다.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계간지인데, 나올 때가 되면 많이 기다려진다. 어떤 인연인지 첫호부터 읽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읽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에서 배우는 점이 아직도 많다고 할 수 있고, 또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호를 읽어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번 호는 저번 호에서 연령 대가 더 내려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주제다. 정확히 이 책에 있는 제목으로 한다면 특집 기획이 "육아, 시장의 유혹을 넘다"이다.

 

저번 호는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는 육아로 내려갔으니.. 어쩌면 정부에서 야심차게 시도하고 있는 "돌봄교실"이라는 육아(?) 방식에 비판의 칼날을 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부에서는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그럼 집에서 애를 키우면? 안 준다. 그래서 어린이집에 보낸다. 이러면 아이는 누가 키우지?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했던 유행어처럼, 소는 누가 키워? 가 아니라 아이는 누가 키우냐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차적인 사람은 바로 부모 아니던가. 오히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면 보조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이를 집에서 부모가 키우면 보조금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를 집에서 부모가 키울 수 있게, (키운다는 말이 좀 이상한데, 이 말 대신 함께 지낼 수 있게로 쓰자), 함께 지낼 수 있게 부모가 일에 매달려 가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을 고쳐야 하고, 또 돈이 없어서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없는 가정을 위해서 보조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찬가지로 돌봄교실도, 아이를 학교에 늦게까지 남기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일찍 퇴근하여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게 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런 정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과 더불어 이번 호는 잘못된 육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휩쓸리고 있나를 살피고 있다.

 

특히 병원에서부터 여러 협찬하는 회사까지 얽혀 있는 육아시장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큰 시장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제 육아시장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기업들이 어른을 대상으로 하다가, 청소년으로 내려갔다가, 이제는 유아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한다고 한다. 유아에 대한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해서 병원을 이용하는 회사들이 많으며, 또 이들은 광고를 통해서 부모들의 불안을 조성해 자신들의 상품을 판다고 한다.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다 알 것이고...

 

한 번 유이기때 이렇게 회사들의 상품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 관계를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유지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 유추되어 더 모골이 송연해졌다.

 

우리는 아이들을 잘 키운다고 하지만, 그 때 잘 키운다는 말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이들이 커줄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본성대로 크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숱하게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또 불안에 떨기도 하고.

 

그러나 옛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세 딸에게 누구 복으로 이렇게 잘 사느냐라는 부모의 질문에 두 딸은 부모님 복이라고 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았지만, 내 복으로 산다고 말한 딸은 부모의 미움을 받아 내침을 당한다는 옛이야기. 부모 복으로 산다는 두 딸은 참으로 못나게 되었지만, 자신의 복으로 산다고 말한 딸은 잘 살게 되었다는 결말을 갖고 있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정말로 잘 사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세상을 열어가는 아이이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아이가 지금 어떻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복이 있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이의 인생이 있다. 그 인생에 자신의 인생을 대입해서는 안된다. 이게 이번 호에서 하는 얘기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아이는 늦든 빠르든,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다. 그런 소중한 존재가 부모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 잠시 동안 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가족의 행복이 된다. 가족의 행복, 그것은 곧 사회의 행복이 된다. 이런 가족이 된다면 아이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면서 공부만이 살 길인양 강요하지는 않을터다.

 

이런 가족이 많다면 우리나라 사교육에서 대표적으로 행해지는 선행학습은 굳이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협약을 맺어(이번 호에 나온다 ) 하지 말자고 결의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없어진다.  무엇이 아이의 행복인지 아는 부모들이 선행학습을 강요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해준 이번 호. 여러 가지 글들이 있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글이다. 그럼에도 늘 특집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맞물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땅의 사람들, 현재 부모이거나 부모였거나, 부모일 사람들이다. 정말 자신이 원하는 아이의 행복은 무엇인지,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번 호를 통해서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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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목련꽃이 환하게 피었다.

순백의 아름다움.

그 옆에 산수유가 노랗게 피었다.

조금 옆 길에는 개나리가 피어 있고,

며칠 더운 날씨에 벚꽃이 피기 시작했고...

 

비가 내렸다.

꽃비가 되었다.

하얀 목련이 땅에 누워 있다.

이제 자신의 시대는 끝난 듯.

순백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맞이한 듯

목련은 그렇게 서 있다.

목련꽃으로 차를 달여 마시면 그 향기가 온 몸으로 퍼지는데...

 

다시 봄.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자연의 이치는 이렇듯 어김이 없다.

우리네 삶도 이래야 하는데.

아니지, 우리네 삶은 우리의 자연처럼 이렇게 순환되어서는 안되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겨울을 또 겪어야 하니.

겨울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봄이 오기 전에 사라질 약한 존재들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인데.

누구는 시련을 겪어야만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삶 앎. 이것이 사람이라고.

세상에 겨울이 없는 봄은 그냥 봄이고 말듯이

시련이 없는 삶은 그냥 삶일 뿐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봄인가?

우리에게 봄은 왔는가?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물었지만

우리는 들을 빼앗기지도 않았는데

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지. 우리가 자연에게서 봄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며칠, 이상 고온이 지속되어 도대체 봄이 그냥 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는데.

 

이응인의 시집을 읽으며, 봄은 그렇게 가지 않음을 느꼈다.

이 시집에 담겨 있는 자연과의 어울림

자연에 공연히 사람자국을 남김의 허무함.

자연을 닮은 아이들의 모습.

그런 삶의 모습이 담담히 담겨 있는 시집

이 시집과 더불어 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자연은 이렇듯 무리 없이 다가오는데

왜 사람의 삶은 이렇듯 턱이 있고 멈춤이 있는지.

이 봄. 자연의 봄과 나의 봄이 하나로 만나게 하고 싶다.

시집을 읽으며 봄을 느낀다.

적어도 나는 어린 꽃다지가 나에게 다가오는데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

 

어린 꽃다지를 위하여

 

  보름 전에 보낸 편지 이적지 못 받았는가. 구들장만 지고 누워 있지 말고 좀 일어나봐 이 사람아. 그 어린 것들이 벌써 고개 넘어 자네 밭두렁쯤 가고 있을 거구만. 인자 동구에나 갔을지도 몰라. 볼에 솜털 보송보송한 그 어린 것들이 보고 싶지도 않은가. 자네도 참 해도 너무하이. 세상에 그 어린 것들이, 아직 털도 덜 마른 것들이 자네 찾아간다고 그 먼길을 나섰는데 이 무정한 사람아.

 

이응인, 어린 꽃다지를 위하여. 신생. 2006년. 78쪽

 

힘들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구들장을 지고 누워 있지는 않겠다. 그 어린 꽃다지들도 이렇게 봄을 이야기하러 다가오고 있는데... 땅을 내려다보면 지금 제비꽃도 수줍게 꽃을 피우고,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는데...

 

세상이 힘들어도, 봄은 있음을... 그래, 꽃다지를 마중나가야지. 봄을 마중나가야지. 이제 구들장을 박차고 땅에 발을 디뎌야지. 이응인이 시 '발바닥이 하는 말'처럼 발로 걸어서 마중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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