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오래 걸렸던가.

 

새 책이 출판사가 바뀌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가격에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었다.

 

워낙 이름을 많이 들어서 사고는 싶었던 책이었는데...

 

몇 군데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이 책을 계속 보게 되었다. 그런데도 선뜻 집어들지 못한 이유는, 값이 책마다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오래된 판본이라 도판이 흑백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계속 헌책방에서 만지작만지작만 거리다가 최근에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그냥 집어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변할까봐 곧장 계산.

 

각권 4000원, 전체 8000원. 두 권인데 8000원이면 비싼 가격이 아니다. 지금 새책으로 사면 3만원이 훨씬 넘는 가격인데... 단지 앞부분에 몇 편의 그림만 칼라고, 중간중간에 있는 도판들은 흑백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권의 미술책들을 보았다고 많은 그림들은 이미 보아왔던 그림들이니, 그것으로 그냥 만족한다고나 할까.

 

읽으면서 왜 곰브리치 곰브리치 하는 줄 알겠다. 그는 결코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 책에서 작품을 언급할 때 자신이 본 그림만을 대상으로(거의 대부분) 한다고 한다. 그래야만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미술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 단선적인 발전 개념을 거부한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

 

미술은 앞으로도 뒤로도 충분히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거다. 과거의 미술에 비해서 현대의 미술이 발전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그의 말, 동감한다.

 

여기에 그의 설명을 읽고 있으면 그 그림에 대해서, 유파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때의 그림은 그 때까지의 그림들을 보고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노력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있던 미술에 대한 지식이 조금은 체계가 잡힌 느낌이다. 물론 내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냥 재미로 이 책을 읽어서 그렇지, 좀더 꼼꼼하게 정리하면서 읽는다면 서양미술사에 대한 개관으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더라도 내게는 적어도 그림을 어떤 식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게 해 준 책이다. 그 점만으로도 이 책은 내게 의미가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아무리 다른 책을 통해서 봤다고 하더라도, 흑백으로 도판들이 실린 점은 유감이다. 물론 이 책은 1988년 10판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의 책이고, 인쇄에 대한 비용에도 지금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새책 소개를 보니 중간중간에도 칼라도 도판이 실려 있어 그림들이 눈에 딱 들어온다. 그것이 이 책과 새책의 차이이겠거니 싶다. 물론 번역자도 다르고.

 

그럼에도 좋았다. 이틀동안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빠져 그림의 세계에서 노닌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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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5-08-07 0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흘 간, 아무 일도 안하고 밥 먹고 이 책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30여 년 전에....

kinye91 2015-08-07 10:13   좋아요 1 | URL
저도 좋았어요. 이 책을 읽는 시간들이.
 

혁명이냐 개혁이냐

 

장마라는 핑계로

땀에 절은 옷들을

통에만 담가 두니

입을 옷이 없어져 간다.

 

빨아야지

세탁기에 넣다 보니

한 번에 들어가지도 않고,

여러 번 빨더라도 널 곳이 없다.

난감하게 세탁기 앞에 서 있는데,

 

혁명이냐 개혁이냐,

해묵은 논쟁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는다.

빨래처럼 제 때 빨면

그것이 개혁인 것을,

 

할 일이 묵히고 묵혀

쌓이고 쌓여 터지면 혁명임일,

개혁을 미룬 결과가 혁명임을,

돌아가는 세탁기에도

남아 있는 빨래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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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수에 관한 책을 읽다가 집에 김춘수의 시집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교과서에서 배운 김춘수는 그야말로 난해시의 대명사였는데... 그가 주장한 '무의미시''의미'로 해석해 내는 것이 바로 학교 국어교육이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런데 이 시집을 읽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다. 꼭 '무의미시'라고 할 필요가 없다. 이상하게 '의미'가 잡힌다. 세월이 흘러서인가. 아니면 학교를 넘어서인가.

 

이 중에 '나의 하나님'이라는 시... 요즘 세태와 관련지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줄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문학세계사. 1993년 초판 1쇄. 59쪽.

 

만약 신이 있다면, 신자들에게는 이런 불경스런 질문이겠지만,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이 지금처럼 굴러갈 수 있을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는데, 지금은 음식이 냉장고에서 썩어가고, 먹다 남은 음식들을 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디에선가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

 

농사를 짓고도 남은 것이 없어 작물을 키울수록, 팔수록 더더 손해가 나 결국 눈물을 머금고 작물을 엎어버리는 농민들이 있는데, 몸에 좋은 것이라고 외국의 것을 굳이 들여와 먹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정말로 신이 있을까? 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쓰는 '하나님'이라는 말보다는 '하느님' 또는 '신'이라는 말이 더 좋은데...

 

이 시에 나오는 하나님은 '늙은 비애, 푸줏간의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이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아니다. 긍정적이다.  '늙은'이라는 얘기는 '낡은, 오래된, 쓸모없는'이라는 말을 연상시키고, 비애는 슬픔을 뜻한다. 결코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늙은'은 '오래된'이고, '비애'는 '슬픔, 연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늙은 비애'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닌 '오래된 연민'이라고 보면 긍정적이 된다.

 

모두를 긍정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오랜 연민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라는 표현을 통해, 특히 '커다란'이라는 표현을 통해, 넉넉하게 모두가 먹고 살 수 있게 음식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음식을 담아둘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한데, 신은 역시 이를 외면하지 않았으니, '놋쇠 항아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먹을 것을 준 신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세 단계의 변화'라는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어리디 어린 순결''아이'의 단계에 해당한다. 거침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거리낌이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자, 이런 신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늘 우리 곁에서 '연둣빛 바람'처럼 우리들을 싱그럽게 해주고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신은 이렇게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신은 인간이 자신의 뜻에 거스를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바로 이런 신이 지금 우리 인간들의 현실을 본다면 '바벨탑'을 무너뜨린 신처럼, 인간의 타락에 분노해서 '대홍수'를 일으킨 신처럼, 불의를 저지른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신처럼... 분노하지 않을까.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까. 정말로 신이 이 시의 '나의 하나님'처럼 존재한다면...

 

불경이라 해도 좋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니, 창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우리 인간세상을 굽어보고 있다면, 지금의 세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많은 신자들, 기독교인, 천주교인, 불교인, 이슬람인, 기타 다른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 신'은 어떤 존재인가. 한 번 생각해 보고,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을 인간 세상에서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시다.

 

'무의미시'라고 하는 김춘수의 시를 읽으며 이렇게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제대로 시를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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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금서였었지. 이름으로만 들었던 마르크스란 이름과 그가 지었다는 책, 자본론.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일본어를 공부했던 사람도 있고,직접 원어로 읽고 싶다고 독어나 영어를 공부했던 사람도 있고.

 

  이론과실천이라는 출판사에서 '자본'이란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게 80년대 후반이던가.

 

참 읽기 불편했었다. 사실, 자본론이란 책 자체가 쉽다고 할 수 없는 책인데... 경제학도 알아야 하지만 철학도 알아야 하는 책이라고 해서, 외국에서는 '자본론 읽기'에 관한 많은 책이 나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책들이 많이 번역되었는데...

 

그러다가 책도 두껍고 겉표지도 양장지인 누가 봐도 있어뵈는 "자본론"이 나왔다.

 

고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이다. 그는 서울대 최초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우리나라 경제학의 학문적 다양성이 확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가 정년 퇴임한 다음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지 못해 그런 학문의 다양성이 서울대에서는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가 제도권 교육에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참여한 공은 무시할 수 없다고 하겠다.

 

비록 지금은 사회주의권이 모두 무너졌고,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전세계적인 지배력을 지니고 있는 이 때, 자본이 어떻게 인간을 구속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런 "자본론"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좌와 우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고 김수행 교수는 그런 모습을 제도권 교육에서 보여줬던 사람이기에 우리 학문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7월 31일 세상을 떴다는 기사를 봤다. 그 기사를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부터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마르크스란 이름은 서서히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지만...

 

그가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하면서 후임이 다른 전공자가 왔을 때, 다시 한 번 시대가 기울어 감을 느꼈지만, 이제 그의 죽음으로, 제도권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이름을 드러낼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

 

한 시대가 완전히 기울었구나. 이제는 정말 다른 시대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번역본 "자본론"을 읽기 전에 그가 쓴 "자본론 연구1"(한길사)을 먼저 읽곤 했었는데...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가버린 시절이고, 그런 시대를 풍미했던 학자의 죽음으로, 어쩌면 이제는 역사 속에서나 존재할 시대가 되었나 싶은 마음이다.

 

고 김수행 교수.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는 마음껏 공부하시고, 후학도 양성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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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과 대상이(대상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자연이건 상관없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난다.

 

따라서 장소는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곳이고, 무의미가 의미가 되는 순간이다.

 

비록 그 상황을, 그 필연을 언어로 설명하지 못할지라도.

 

이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우연한 기회에 길을 걷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은 헌책방에서 만나거나 서점 또는 도서관에서 만나게 되는데, 길거리에서 그것도 다른 잡다한 물건들을 내어놓고 판매하는 벼룩시장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눈을 여러 곳으로 돌리다가 시집이 몇 권 놓여 있는 가판을 보게 되었다. 어, 시집이 있네... 모두가 '문학과지성사'판 시집들이다. 한 예닐곱 권 있었나 보다. 읽은 시집과 읽지 않은 시집을 분리하다가, 모두가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시집이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누구의 마음에도 들어가지 않고 길거리로 나앉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도 시 하면 알아주는 '문학과지성사' 시집들이.

 

어떤 시집들은 이미 내가 읽은 시집이기도 했지만, 어떤 시집들은 도대체 외면당해도 이렇게 외면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먼지를 켜켜히 쌓아놓고 있는, 퇴색의 흔적들만 남은 시집들이었다.

 

그런 시집을 제해놓고, 먼지가 덜 쌓인, 그래도 세월의 힘을 덜 묵은 시집을 두 권 골랐다. 그 중의 한 시집이 바로 하재연의 '라디오 데이즈'

 

시인의 이름도 처음 듣거니와 제목도 신선해서 골랐다. 라이오의 날들이라니... 웬지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을 것 같아서, 내 지난 날의 향수를 자극할 것 같아서 골랐는데...

 

이런, 참... 시가 어렵긴 하지만, 이토록 시의 내용이 인과성을 배반하고 의미를 삭제해 버렸을 줄이야.

 

인과성 없음. 의미 없음. 내 말은 나와 상관없음. 유체이탈 화법이 춤추는 시대를 미리 경험한 것도 아닐텐데, 그런 지금의 모습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니...

 

내가 해석 못할 내용을 이렇게 유체이탈 화법이 난무하는 시대를 먼저 전유해낸 시인의 시집이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고자 하는데...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좀 이해되게 시를 쓰면 안되나? 시가 마음 속에 들어와 그 속에 머물러,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내 마음을 울리게 하면 안 되나?

 

현대가 이렇다고 해서, 이미 너무도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써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언어의 기본 의미는 의미 전달 아닌가.

 

'무의미 시'라는 말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 시는 소수였으면 좋겠다. 시는 의미를 지니고, 읽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마음을 울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아무리 나와 세상은 상관 없다는 태도를 지닌 말들이, 말과 행동이 겉도는 그런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 시집에서 내가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시가 없다. 시집 뒤의 해설을 읽어도 그럴까 하는 생각만 들뿐,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차례 읽은 시가 있었으니, 그 시는 바로, '아마도 내일은' 이라는 시다.

 

아마도 내일은

 

아마도 내일은

오래된 눈

 

누군가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를 몰고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눈은 날리고 날리는 눈은

유리창에 부딪혀 녹아 없어지네

 

그대의 검은 머리에 내려앉고

내 검은 눈동자를 비껴 나가던

 

오래된 눈 창에 얼룩을 남기고

나는 얼룩을 지우네

 

누군가 흰 꽃을 던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네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져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아마도 내일은

그대와 나와 오래된 눈

 

하재연,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사, 2012년 초판 4쇄.  26-27쪽.

 

내용은 몰라도 같은 시구들이 반복되어, 또 행의 끝구절이 같은 음절로 끝나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각 2행으로 이루어진 연들이 서로 짝을 이뤄 자연스레 형성하고 있는 운율은 이 시를 읽기에 좋게 하고 있다.

 

그냥 입 안에서 웅얼웅얼 읽기에 좋다. 그래서인지 자꾸 눈길이 가고 읽게 된다.

 

세 대상, 눈, 그대, 나... 이들은 모두 내일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살아 있음을, 이렇게 생기없게 노래할 수도 있다니... 살아 있음이 마치 오래된 눈.... 눈은 내리면 금방 녹는다. 그런데, 오래된 눈은 깨끗한 하얌을 잃고 더러운 검음을 유지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를 순간에서 지속으로 바꾸어 놓는다. 세월의 힘이 켜켜히 쌓인 눈. 그것이 오래된 눈이다.

 

그럼 이런 오래된 눈은 누구인가? 나는 자꾸 그것이 바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대의 머리에 내리는 눈은 세월의 힘으로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로 해석을 할 수 있고, 내 검은 눈을 비껴가던이라는 눈은 내가 애써 외면하던 늙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장례식장에 가서 남의 스러짐을, 사라짐을 흰 꽃으로 애도하지만, 정작 우리는 살아 있다.

 

삶의 영욕을 모두 안은채... 그래서 젊은날 환희에 찼던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지지'만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젊음의 생기가 사라지는 '아마도 내일은' 그러나 그 내일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내일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늙음은 사라짐이 아니니, 늙음이 생기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늙음은 젊은 시절의 노래를 이어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노래를, 늙음에 맞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아마도 내일은' 젊음은 젊음답게, 늙음은 늙음답게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상태가 되어야 유체이탈의 화법이 사라지지 않을까. 자신의 세대에 맞는 언어를, 자신의 상태에 맞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런 곡해 아닌 곡해,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될 시에서 굳이 의미를 찾는 그런 나. 아직은 언어와 의미가 일치한다고 믿고 있는 나를 이 시집에서 애써 찾고 있었다.

 

이게 이 시집과 나의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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