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과 대상이(대상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자연이건 상관없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난다.
따라서 장소는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곳이고, 무의미가 의미가 되는 순간이다.
비록 그 상황을, 그 필연을 언어로 설명하지 못할지라도.
이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우연한 기회에 길을 걷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은 헌책방에서 만나거나 서점 또는 도서관에서 만나게 되는데, 길거리에서 그것도 다른 잡다한 물건들을 내어놓고 판매하는 벼룩시장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눈을 여러 곳으로 돌리다가 시집이 몇 권 놓여 있는 가판을 보게 되었다. 어, 시집이 있네... 모두가 '문학과지성사'판 시집들이다. 한 예닐곱 권 있었나 보다. 읽은 시집과 읽지 않은 시집을 분리하다가, 모두가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시집이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누구의 마음에도 들어가지 않고 길거리로 나앉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도 시 하면 알아주는 '문학과지성사' 시집들이.
어떤 시집들은 이미 내가 읽은 시집이기도 했지만, 어떤 시집들은 도대체 외면당해도 이렇게 외면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먼지를 켜켜히 쌓아놓고 있는, 퇴색의 흔적들만 남은 시집들이었다.
그런 시집을 제해놓고, 먼지가 덜 쌓인, 그래도 세월의 힘을 덜 묵은 시집을 두 권 골랐다. 그 중의 한 시집이 바로 하재연의 '라디오 데이즈'
시인의 이름도 처음 듣거니와 제목도 신선해서 골랐다. 라이오의 날들이라니... 웬지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을 것 같아서, 내 지난 날의 향수를 자극할 것 같아서 골랐는데...
이런, 참... 시가 어렵긴 하지만, 이토록 시의 내용이 인과성을 배반하고 의미를 삭제해 버렸을 줄이야.
인과성 없음. 의미 없음. 내 말은 나와 상관없음. 유체이탈 화법이 춤추는 시대를 미리 경험한 것도 아닐텐데, 그런 지금의 모습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니...
내가 해석 못할 내용을 이렇게 유체이탈 화법이 난무하는 시대를 먼저 전유해낸 시인의 시집이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고자 하는데...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좀 이해되게 시를 쓰면 안되나? 시가 마음 속에 들어와 그 속에 머물러,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내 마음을 울리게 하면 안 되나?
현대가 이렇다고 해서, 이미 너무도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써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언어의 기본 의미는 의미 전달 아닌가.
'무의미 시'라는 말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 시는 소수였으면 좋겠다. 시는 의미를 지니고, 읽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마음을 울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아무리 나와 세상은 상관 없다는 태도를 지닌 말들이, 말과 행동이 겉도는 그런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 시집에서 내가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시가 없다. 시집 뒤의 해설을 읽어도 그럴까 하는 생각만 들뿐,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차례 읽은 시가 있었으니, 그 시는 바로, '아마도 내일은' 이라는 시다.
아마도 내일은
아마도 내일은
오래된 눈
누군가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를 몰고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눈은 날리고 날리는 눈은
유리창에 부딪혀 녹아 없어지네
그대의 검은 머리에 내려앉고
내 검은 눈동자를 비껴 나가던
오래된 눈 창에 얼룩을 남기고
나는 얼룩을 지우네
누군가 흰 꽃을 던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네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져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아마도 내일은
그대와 나와 오래된 눈
하재연,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사, 2012년 초판 4쇄. 26-27쪽.
내용은 몰라도 같은 시구들이 반복되어, 또 행의 끝구절이 같은 음절로 끝나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각 2행으로 이루어진 연들이 서로 짝을 이뤄 자연스레 형성하고 있는 운율은 이 시를 읽기에 좋게 하고 있다.
그냥 입 안에서 웅얼웅얼 읽기에 좋다. 그래서인지 자꾸 눈길이 가고 읽게 된다.
세 대상, 눈, 그대, 나... 이들은 모두 내일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살아 있음을, 이렇게 생기없게 노래할 수도 있다니... 살아 있음이 마치 오래된 눈.... 눈은 내리면 금방 녹는다. 그런데, 오래된 눈은 깨끗한 하얌을 잃고 더러운 검음을 유지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를 순간에서 지속으로 바꾸어 놓는다. 세월의 힘이 켜켜히 쌓인 눈. 그것이 오래된 눈이다.
그럼 이런 오래된 눈은 누구인가? 나는 자꾸 그것이 바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대의 머리에 내리는 눈은 세월의 힘으로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로 해석을 할 수 있고, 내 검은 눈을 비껴가던이라는 눈은 내가 애써 외면하던 늙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장례식장에 가서 남의 스러짐을, 사라짐을 흰 꽃으로 애도하지만, 정작 우리는 살아 있다.
삶의 영욕을 모두 안은채... 그래서 젊은날 환희에 찼던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지지'만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젊음의 생기가 사라지는 '아마도 내일은' 그러나 그 내일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내일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늙음은 사라짐이 아니니, 늙음이 생기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늙음은 젊은 시절의 노래를 이어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노래를, 늙음에 맞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아마도 내일은' 젊음은 젊음답게, 늙음은 늙음답게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상태가 되어야 유체이탈의 화법이 사라지지 않을까. 자신의 세대에 맞는 언어를, 자신의 상태에 맞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런 곡해 아닌 곡해,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될 시에서 굳이 의미를 찾는 그런 나. 아직은 언어와 의미가 일치한다고 믿고 있는 나를 이 시집에서 애써 찾고 있었다.
이게 이 시집과 나의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