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시작이다.

 

그러나 시작은 언제나 힘들다.

 

자신의 온몸을 던져 새로운 발걸음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새싹들이 얼어붙어 있던 땅을 뚫고 나오듯이, 죽은 듯이 숨어 있던 순들이 단단한 가지에서 솟아나오듯이, 그렇게...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익숙한 것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시기, 그것이 바로 봄이고, 이러한 여행이 바로 삶이다.

 

우리의 봄은 이래야 한다. 낡은 것조차도 새로운 출발을 꿈꾸게.

 

정철훈의 시집을 읽다. 이제는 봄도 여름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 새출발을 한 것들이 어느덧 자리를 잡아 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마냥 뒤에 놓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면서, 함께 갈 수 있는 봄. 그런 오월이었으면...

 

정철훈의 시집은 해설에서 '북방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고, 그러한 시들이 2부에 실려 있는데, 그럼에도 마음에 와 닿은 시는 바로 '봄날'이다.

 

   봄날

 

봄날 녹슨 함석지붕이 운다

봄바람에 어깻죽지를

들썩이며 운다

겨우 붙들어맨 못대가리가 빠져

함석도 날개가 있다고 덜덜덜 운다

한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렀음인가

양계장에서는 장닭이 암탉을 올라타다 말고

흙먼지를 날리며 홰를 친다

먼산엔 질달래 개나리 매화가 불붙고

바람은 모래를 날려 삶을 재촉하는데

봄은 근질거리는 날갯죽지로 오는가

봄날 함석지붕이 운다

봄바람에 어깻죽지를

들썩이며 운다

 

정철훈,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민음사. 2002년 1판 1쇄. 11쪽.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또 새롭게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봄은.

 

봄은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는 현재다. 그러므로 생동감이 있다. 살아 움직여야 한다. 낡은 것조차도, 이 시에서처럼 녹슨 함석지붕조차도 들썩이게 해야 한다. 그렇게 새로움을 찾아 가는 날, 그것이 바로 봄이다.

 

과거로 붙들어맨 못이 빠져 이제는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한다는 봄. 계절로서의 봄만이 아닌, 우리네 삶으로서의 봄이어야 한다.

 

그렇게 이 오월은 새로움의 달이어야 한다. 오월의 시작, 정철훈의 '봄날'을 읽으며 삶의 생동감을 생각한다.

 

출발은 어렵더라도,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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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되 남은 못 보게 하는 정치는

 

독재다.

정치인이 국민과 멀어질 때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고 하지만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스스로 장막을 만들고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장막을 위해

스스로 선글라스를 쓴다.

나는 볼 수 있지만

상대는 내 눈을 볼 수 없는

그 장막 속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선글라스를 이어받은 장막이

바로 전화,

마주보고 이야기 하면 미세한 표정에서

감정을 들킬 수 있으니

전화로 정책을 의논한다.

의논이 아니라 통보다.

 

보이지 않고 보는 정치

얼마나 무서운 정치냐.

벤담이 이런 정치를 알았으면

-옵티콘을 설계하지는 않았을텐데

독재가 이렇게

선글라스나 전화를 통해서도

올 수 있음을 알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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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석의 시집을 읽다. 그의 시집을 다 갖고 있지는 않지만, 예전에 그가 쓴 시에 반해 몇 권을 사둔 적이 있다. 그때는 사자마자 한 번에 주욱 통독을 했는데, 시집의 좋은 점은 두고두고 또 읽을 수 있다는 점.

 

읽을수록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 읽을 때마다 마음에 다가오는 시가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더 많은 울림들을 내 가슴 속에 간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집에 이상하리만큼 "꽃"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데, 다른 책에서 이에 대해서 시인 자신이 이야기한 적도 있으니, 그와 꽃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 제목도 "성에꽃"이다. 사실 이 시집에는 꽃보다는 사람에 대한, 우리나라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읽어가면서 마음이 울리기도 하지만 머리 속에 시에 나타난 상황이 그림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한 편의 이야기. 그는 한 때 "이야기시"를 주장하기도 했었다.

 

시가 운율로, 압축으로, 상징으로 마음을 울리기도 하지만, 시에도 분명한 이야기가 있음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야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시들은 대부분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시임을, 그의 '이야기시론'을 통해 알 수 있었고, 또 그의 시를 통해서도 체험할 수가 있다.

 

시에 수록된 시들과 제목의 시가 어떻게 어울릴까? 사실 우리는 "사람꽃"이라는 말도 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말도 쓰고 "꽃보다 00"라는 말도 쓴다.

 

이렇듯 꽃과 사람은 함께 한다. 꽃이 화사한 꽃도 있고,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꽃도 있고, 어디엔가 숨어 있는 꽃도 있고, 대우받지 못하는 꽃도 있듯이 사람도 그렇다.

 

최두석이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앞에 나서서 남에게 인정받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 사회의 한 켠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 역사의 격랑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바로 우리 사회를 지탱해가는 "꽃"임을 그는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고은의 "만인보"와는 또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시'가 바로 이 시집에 잘 나와 있다.

 

소외되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 인해 사회는 지속되고 발전되고 있음을, 고단한 삶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이 시집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제목이 된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성에꽃"

 

식물로서의 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도 아닌, 자연과 사람이 어려운 환경에서 만나 피워낸 꽃. 그는 이 꽃에서 민중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려던 친구를 만난다.

 

성에꽃. 차가운 계절에 피는 꽃. 그러나 그 꽃은 우리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시를 보자

성에꽃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최두석, 성에꽃, 문학과지성사, 1991년 3쇄.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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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2

 

밖을 향해 쏘아올린 수많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 자리를 잃고,

 

빠져나간 공허함에 넋을 잃어버리는데

아직도 더 나갈 것들이 있는지

언제 어디서든 따

 

밖이 아니라, 안으로!

안으로!

내 안으로!

 

허공 중에 흩날리고 있는

말들을 잡아,

내 영혼의 샘에 집어넣어야

 

삶은 말들로 충만하다.

 

밖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아닌

내 안에 차고, 차서

자연히 넘쳐나는 말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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걍팍한 세상, 동종요법이라고 하나, 비슷한 상황을 경험함으로써 치유를 한다. 그렇게라도 치유가 된다면 좋겠지만, 어쨌든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

 

시집을 읽는다. 도피로써, 또는 현실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갖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 읽는데, 그게 제대로 안 될 때가 있다. 시가 현실보다 더 슬플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를 통해 현실을 보는 일, 어쩌면 동종요법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조은 시집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를 읽었다.

 

좀 우울하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밝지 않다.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집의 끝에 오규원 시인의 해설이 실려 있는데, 그 해설에 물과 벼랑이라고 이 시집의 전체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시집만큼이나 해설도 좋았다.

 

그리고 시인의 말에서 시인이 이 시집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있다면, 정녕 있기만 하다면, 이곳의 몸과 마음이 이보다는 편하리라' 고 자서에서 말하고 있다.

 

시인이 원하는 세계는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이고, 그러므로 지금 이 세계에 대해서 시인은 비판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그런 비판적 시선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가 '전원일기'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전원일기가 예전에 드라마로 방영했던 전원일기가 아니라 전원에 들어가 산 시기를 나타낸다. 한자어를 잘 보면 알 수 있다.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시기에서 절망과 좌절로 넘어가는 그런 시기. 그것이 바로 전원 생활인데, 이 때 전원생활은 오규원이 해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전원이 아니라, 삶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농촌을 말한다.

 

농촌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가를 이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1과 4을 보면 극명하게 그 모습이 대조된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전원일기(田園一期) 1

 

  그곳으로 옮기는 이삿짐을 꾸리며 가족들은 평화로운 날들이 주렁주렁 열리리라 믿었다. 즐비한 돼지우리와 뒷간 악취도 신비롭던 그 봄 잡목 숲을 일궈 과실나무를 심었다. 어린 과실나무가 빗물을 걸러 먹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낮잠은 달고 깊었다. 빗물에는 삭정이들만 떠내려 갔다. 야산을 감싼 꽃잎은 넓었고 인근 비행장을 이륙하는 비행기 소리에 비탈의 도라지 밭이 세상을 희끗희끗 열었다. 아버지는 포클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며 저수지에서 발을 씻었다. 아버지의 물살이 저수지에 가득 찼다. 멀리서 보는 아버지는 잔잔히 굽이쳐 산 하나를 넘어갔다.

 

조은,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민음사, 2007년 개정판 1쇄. 16쪽.

 

전원일기(田園一期) 4

 

  새들이 돌아와 집을 지었다 밤 깊어도 새들은 잠들지 못하고 끄으윽 끄으윽 가족들을 쪼아 댔다 새가 쪼아 대는 곳에 고름이 차올라도 아무도 그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괭이를 휘두르며 울부짖으며 세상을 찍었다 그곳에서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허술했던가 괭이에 찍힌 비료 포대와 그곳을 이탈하던 독한 안개, 논밭의 잡초들은 넉넉한 그늘 아래 곡식들을 다스렸다 끄으윽 끄으으윽 마음껏 우리를 넘나들던 산천이며 초목이며 어린 새들이 마당 여기저기 빨갛게 주둥이를 말리며 머물렀다 그 새들의 날갯짓에 어둠은 두텁게 일어 햇빛이 우리 집에 닿기까지는 한나절도 부족했다 떠나온 그날까지

 

조은,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민음사, 2007년 개정판 1쇄. 19쪽

 

그렇다고 도시의 삶이 행복할까. 아니다. 도시 역시 사람들이 살기는 힘들다. 그것을 역설적으로 '유토피아'라고 했다. 아니, 역설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유토피아처럼 갈구만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시를 보자.

 

   유토피아처럼

 

유토피아처럼 과일 가게는 철거반에게 헐리고

새로 지은 상가의 층계는 말쑥하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차량들과 삶이

즐거운 부인들이 구경하는 데서 냄비와 물통과 문짝과

딸아이의 속옷까지

맥없이 끌려 나와 널브러지는데

대단하다 정말 수차례 당해 본 사람처럼

 

담담하게

두 딸과 남편의 도시락을 오늘 아침에도

꾸려 주는 저 아주머니

 

조은,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민음사, 2007년 개정판 1쇄. 76쪽.

 

그럼에도 현실은 지속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은 지속되어야 하기에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하던 일을 계속한다. 계속해야만 한다. 그것을 이 시가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정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농촌이나 도시나 다 살기 힘든데... 어떡해야 하나? 여기서 그냥 포기하고 머물면 안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당해도 제 할 일을 묵묵히 담담하게 하는 시 속의 아주머니처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담담하게 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어느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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