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11년 4월 30일) 한겨레 신문 1면에 난 기사 제목이다. 

"서울 지하철노조, 민주노총 탈퇴" 

과반수(94.9%)가 투표에 참여하여 과반수(53%) 찬성으로 민주노총 탈퇴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노조는 (가칭) 국민노조를 만들어, 한국 노총- 민주노총과 더불어 노동계를 대표하는 제3노조가 되겠다고 한다. 노동절을 바로 앞둔 시점에서 노조가 또 갈라지다니.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노조의 힘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단결해도 일을 해결할까 말까 하는 때에 이래저래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왜 노조원들은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생각으로 한 조직에 들어가되,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그 속에서 논쟁과 토론으로 더 나은 방향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까.  

밖에서보면 그들이 그들일텐데... 상대의 눈에는 어짜피 노동자일뿐인데, 이들은 자꾸 자신들을 근로자와 노동자, 사무직과 생산직, 정규직과 비정규직, 전투적 노동자와 타협적 노동자로 나누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직만을 지니려고 한다. 

백년도 넘은 과거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그 선언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시작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역시 하나의 유령이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바로 경쟁만이 살길이라는 신자유주의. 

선언의 마지막은 "노동자가 혁명 속에서 잃을 것이라곤 쇠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라고 했는데, 공허하다. 지금 혁명을 운운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동키호테 소리를 들을 뿐이요, 세계를 얻기는커녕 비정규직이라는 불안만을 얻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단결은 요원하다. 오히려 분열이 되고 있으니. 

아직도 그 선언은 유효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방현석이 쓴 "아름다운 저항"이라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관한 책이 생각났다. 지금의 우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피눈물이 있는지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사"라는 조금은 오래된 책들도 생각났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치열하게 싸워왔던 과거, 이 과거는 역사 속에만 존재하지 않고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며, 우리 미래세대에게도 닥칠 현실이다. 

잊지 말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누구도 불행한 사람이 없는 사회, 그게 사람이 살만한 사회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선 약자에 대한 배려, 약자의 삶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회, 약자들은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가려고 노력하는 사회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근로자의 날이 아닌 노동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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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이나 구글에서 위치 추적을 했다는 기사가 뜬다. 

이런 폰을 들고 다니면 이미 자신의 행적을 누군가에게 계속 수집해가고 있는 현실을 각오해야 한다니... 

길거리 곳곳에서 CCTV에 자신의 모습을 찍히기도 하는데... 

위치가 수집되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났다. 

세상에 빅브라더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을 줄이야. 

그것도 빅브라더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빅브라더에게 자신을 복종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된다. 

만약에 누군가가 이런 폰들과 CCTV를 연계해 위치 뿐만이 아니라, 그 위치에 있는 CCTV로 나를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때는 진짜 빅브라더가 존재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걱정을 기우라고 할 수 있을까. 

전자기술은 어떻게 발전할지 예측할 수 없는데, 지금은 직장에서 자신의 집을 볼 수도 있는 시대인데, 좀더 무섭게 기술이 발전되고, 이 기술이 악용된다면, 우리는 유비쿼터스라고 자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우리 모습이 감지되지 않을까. 

컴퓨터, 또 스마트폰 같은 기술의 발전은 어쩌면 유토피아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이건 정말 기우일까. 

조지 오웰의 책이 요즘 인기리에 번역되고 있는데, 그의 작품은 1984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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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을 십 년 넘게 받았다. 제도권 교육 말고는 대안 교육이란 생각도 못 해보고 학교 생활을 했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안 좋았는지, 사실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학생들은 학원수강을 하지 못하게 한 정책으로 교육이란 오로지 학교에서 일어난다고만 생각하고 지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일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일탈, 부적응에 불과했고, 이는 곧 사회에서 낙오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학교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봇물처럼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대안교육에 몸담고 있거나, 관심을 지니고 있다.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공동육아부터 공부방, 그리고 비인가 초중고까지, 이제는 대안 대학까지도 모색하고 있는 등나름대로의 철학을 지니고 교육활동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제도권 교육도 바뀌고 있다. 

혁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서울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는 대안교육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대안교육과 제도권교육이 서로 배타적으로만 지내지 않고, 함께 교육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본다. 제도권 교육은 대안 교육을 엿보고, 대안교육은 제도권 교육이라해서 무조건 배제하지 않고 함께 가려고 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 책이 바로 격월간지인 민들레이다. 99년에 창간한 이 잡지는 10년이 넘도록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때는 지지를, 어떤 때는 비판을, 어떤 때는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대안교육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아도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아이가 어느 학교에 다니던 좀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읽어보자. 어느 부분을 읽어도 좋다. 생각할 거리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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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은 날들이 있다. 법의 날이락. 

법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아래를 향해 흐르고, 결국 모두 평등하게 만든다고.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감고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고. 그런데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은 눈을 뜨고 한 손에는 책을 한 손엔 저울을 들고 있다던가. 공부를 해야 법앞에 설 수 있다는 건 아닐텐데. 

눈을 감으면 상대가 보이지 않아 좀더 편견없이 판결할 수 있지 않을까. 

눈을 뜨고 있으면 아무래도 상대가 보일텐데, 인간의 눈은 간사해서 마음까지도 움직일 수 있다는데. 

한 때 유행하던 말 중에 무전유죄ㅡ유전무죄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왜 우리나라 정의의 여신상은 다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자의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오직 법전에 의지해서 판결을 하겠다는 공평무사 정신을 상징한다고 해야 하는데,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김두식의 책 "헌법의 풍경"이 생각났다. 그래도 아직은 법에 희망을 걸 수 있지 않을까.  

법이 아직은 없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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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날이란다. 꼭 이 날이면 온 나라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둥, 장애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둥 말들이 많아진다. 

사실, 장애인이라고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이 비장애인보다는 느리게 일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사회가 그런 느림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장애인 문제가 달려 있다고 본다. 

몇 년 전에 정말로 인기가 있었던 책이다.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쓴  "오체 불만족 "

그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비장애인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장애를 인식하되, 그 인식을 뛰어넘어 자신의 몸을 인정하고 사회에서 살아가려고 노력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사람이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한 환경이, 주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차별과 차이를 구분해야 하듯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분명 다르다. 이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인정한 상태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의무가 아닐까. 

이 사람은 이렇게 잘 살아가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하니 하는 생각은 이미 장애인에게 폭력일 뿐이다. 그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차별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뿐이다. 즉 장애인의 의지에 맡겨서는 안되고,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을 지녀야 한다.

장애인의 날에만 반짝하지 말고,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자. 장애인들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얼마나 불편한지. 장애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고, 또 비장애인들도 스스로 다시 한 번 자신들 위주로 되어 있는 이 환경을 낯설게 바라보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오체 불만족의 저자가 사는 삶이 특정한 장애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장애인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도 차이를 인정하고 그 다름과 함께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 때서야 나는 장애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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