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시간 - 내촌목공소 김민식의 나무 인문학
김민식 지음 / 브.레드(b.read)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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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한 사람. 나무로 집을 짓는 사람. 내촌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민식의 글이다.


나무에 관한 글. 그냥 나무 종류를 이야기하고, 나무의 특성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다. 나무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엮어서 들려주는 글이다.


그래서 나무를 통해서 삶을 만나게 된다. 나무는 바로 우리의 삶과 함께 한다. 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어떤 나무가 좋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재료로 삼아 만든 집, 물건들이 좋은 물건이라고 하는 말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무엇보다 나무들을 등한시 했을 때, 그 나라 경제도 휘청거렸음을, 또한 나무들이 사라져갈 때 우리들의 삶도 황폐해졌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무, 많은 종류를 알지 못하지만 몇 종류는 구분할 수 있는데, 예전에 읽었던 글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소나무를 심고,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었다는 내나무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여기에 건축자재로 우리나라 소나무가 좋다고 소나무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는데, 김민식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목재로 사용할 만큼 자란 나무가 그리 많지 않으며, 소나무보다도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들도 많고, 가공하기 쉬운 나무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니 어떤 나무가 최고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목적에 맞는 특성을 지닌 나무를 이용하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


황무지를 나무를 심어 가꾼 기업인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도, 장기적으로 나무를 심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했으니, 나무는 이렇듯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이야기 한편 한편이 읽기에 좋다. 여러 생각을 하게도 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나무들 다시 돌아보게 한다. 언제든, 어느 부분이든 펼쳐서 읽어도 좋은 그런 글들이 모여 있다.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 이 책은 이러한 글들이 모여 책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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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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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혼란스럽다고 느낄 때, 도무지 어떤 질서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틀을 원한다.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틀. 그런 틀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면 마음이 편해진다. 틀 속에서 살면 되기 때문이다.


틀을 유형이라고 해도 좋고, 습관이라고 해도 좋다. 패턴이라고 해도 좋고. 이런 패턴 속에 자신을 놓아두면 편안해진다.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삶이 일정한 방식을 따라 익숙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삶이 그런가? 삶은 혼돈이다. 정해진 길이 없다. 정해진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문득 문득 다른 것들이 튀어나온다. 같은 길이라도 늘 다른 길이 된다. 불안해진다. 무언가 확실한 변하지 않는 길을 찾고 싶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질서를 부여한다면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고, 자신이 삶을 좀더 안정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안정된 삶. 그런 삶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사람을 발견한다. 생물학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사람. 온갖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추구한 사람.


룰루 밀러는 이런 데이비드 조던을 자신의 스승으로 삶아 자기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래서 조던의 삶을 추적한다. 그가 쓴 글을 모두 찾아 읽는다. 어떻게 그런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고, 또 어려움을 이겨나갔는가를 찾고 배우려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조던의 삶을 추적한다. 마치 조던의 평전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책은 중반부를 향해 간다. 그러다 길을 달리 한다. 역시 삶에는 온갖 변수들이 작동한다. 조던이 살던 방식에서 하나하나 의문점이 생긴다. 그가 그렇게 물고기를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 활동을 했는데, 어째서 그는 우생학 쪽으로 돌아섰는가?


왜 그는 사람들조차도 분류를 하고, 존재해서는 안 될 인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는가? 아니,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그는 불임수술이라는 단종 작업에도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는가?


룰루 밀러는 이 점에서 의문을 갖는다. 사람이 사람을 분류하고, 우열을 나눌 수 있을까? 우열을 나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른 존재의 멸절을 시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밀러가 찾던 답을 조던은 제시해줄 수가 없다. 아니 조던은 잘못된 답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답을 찾아야 한다.


찾다가 룰루 밀러는 물고기는 없다는 주장을 만난다. 바닷속에 사는 생물들을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었는데, 과연 물고기는 존재하는가? 그 많은 생물을 '물고기'라는 범주에 넣어버리면 각 생물의 독립성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독립성을 잃고 그 커다란 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런 분류가 결국 우열의 사다리를 만들어내고, 우열의 사다리라는 범주 속에서 다른 생물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그 생물들의 생존까지도 우월한 종이 결정하도록 하게 하지 않나.


결국 범주가 우열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그런 기준에 의해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억압, 약탈, 죽임이 이루어진다는 결론을 나아간다. 그러니 물고기는 없어야 한다. 이 장면까지 읽으면서 [장자]와 [노자]의 글귀가 떠올랐다. 


[장자]의 글귀는 다음과 같다. 장자 '내편' 끝에 실려 있는 글인데...


                                                혼돈칠규(混沌七竅)


  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이라고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이라 하였고,그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 하였습니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때마다 둘을 극진히 대접했습이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을까 의논했습니다.

  "사람에겐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줍시다." 했습니다. 하루 한 구멍씩 뚫어 주었는데, 이레가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습니다. 

(오강남 풀이, 장자, 현암사. 347쪽에서)


혼돈이 자연스러운데, 그것을 자신들이 판단해서 질서로 바꾸려고 한다. 즉 어떤 범주를 다른 대상에게 강제로 적용하려 한 것이다.


혼돈이 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이 결과, 분류라는 이름으로 범주를 나누고, 그 범주에 속하게 다른 개체들을 집어넣고, 또 범주들 사이의 위계를 정해버리는 일. 이는 다른 개체를 자신의 행동으로 죽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오래 된 동양의 지혜가 서양 과학자들의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고도 할 수 있는데, 룰루 밀러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 쓴 이 책에서는 이런 장자의 말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여기에 위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도덕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지구 또는 우주라고 하자. 이런 지구나 우주의 처지에서는 인간이든, 다른 동물이든, 식물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냥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일 뿐.


노자의 말을 보자.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성인도 편애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모두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오강남 풀이, 도덕경, 현암사, 35쪽)


그렇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 중에 더 낫고, 더 못함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냥 함께 존재할 뿐이다. 함께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특정 집단에 의해서 범주로 나뉘고, 그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배척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질서로, 틀로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냥 개체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개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혼돈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튼튼한 벽 안에서만 살아갈 수 없고,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길에서 삶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룰루 밀러의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삶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연결지으면서, 우생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장면까지 나아가는 책. 그리고 자신이 혼란스러운 삶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발견되었는지, 그런 발견 과정에서 '물고기는 없다'는 깨달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다른 존재들을 어떤 범주로 규정짓고, 그 속에 넣어버리는 행위들, 이런 행위들이 자칫하면 위계로 나아가고, 위계는 손쉽게 차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룰루 밀러는 말하고 있다. 흥미롭게, 그러나 우리 삶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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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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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소설이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몸 상태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소설의 구성도 흥미를 자극하고.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었다는 점에서도 성공을 했다고 한다면,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결론을 섣불리 내리지도 않는다. 결론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소설을 통해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주인공에게 공감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어린 시절 가족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캐나다로 이민 오는 과정에서 죽은 어머니. 그럼에도 가족을 돌보지 않아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하녀로 일을 시작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은 그레이스.


이 그레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찾아내려는 젊은 정신의학자 사이먼이 그레이스와 면담을 한다. 이렇게 소설은 그레이스의 이야기와 사이먼의 관점이 교차하면서 진행이 되는데, 각 부가 바뀔 때마다 사건의 기록이나 다른 구절들이 앞부분을 장식한다.


그리고 각 부는 퀼트 패턴의 이름이라는데, 이는 소설이 퀼트를 하듯이 각 조각들을 짜맞추는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으면서 과연 그레이스는 살인범일까를 찾아보지만 명확한 답은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다만, 그레이스가 처한 그 상황을 통해서 당시 여성, 그것도 하층민 여성들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지금은 흔하게 쓰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라고는 주인의 선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단지 월급만이 아니라 몸까지도 탐하는 주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겼던 당시의 상황.


그렇다고 상류층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작가는 그 점을 사이먼이 묵고 있는 집의 여주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삶 역시 남편의 삶에 종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에는 여러 죽음이 나오지만 세 여자의 죽음이 의미가 있다.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살기 위해서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나라도 오는 도중에 죽는다. 이는 어머니의 삶은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장소라도 비참한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남편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남편에 종속된 삶들이 이르게 되는 종착지. 


다음 죽음은 메리 휘트니의 죽음이다. 그레이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메리. 매사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고, 불법으로 낙태 수술을 하고 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하층민 하녀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삶에 대한 태도를 그레이스에게 가르쳐준 메리지만, 자신의 삶에는 그런 지혜를 적용하지 못했다. 적용할 수 없는 구조였으리라. 임신시킨 사람에게 청혼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애를 낳아도 자신이 키울 수밖에 없는데,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쫓겨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이를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던 메리. 당시 하녀들이 겪을 수밖에 없던 삶.


이런 메리의 죽음으로 그레이스는 큰 혼란을 겪는다. 실신도 하고. 이것이 이 소설의 복선이다. 위기 상황에서 그레이스는 정신을 잃는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 낸시와 주인인 키니어가 죽었을 때를 흐릿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죽음은 그레이스도 관련된 낸시의 죽음이다. 그레이스가 마지막으로 만난 가정부 낸시. 그레이스와 비슷한 처지지만 낸시는 집주인의 내연녀 역할을 한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오래 가지 못한다. 이를 죽음으로 표현한다. 한데, 그냥 죽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지배층들의 윤리가 무너진다. 그러니 낸시의 죽음은 질투로 인한 죽음이어야 한다. 하층민들이 벌이는 질투. 상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하층민 여성들이 통상 겪은 결과.


작가는 이렇게 세 죽음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삶을 퀼트처럼 잘 짜맞추어 간다. 여기에 상류층 여성들의 위선을 사이먼의 어머니나, 또 소령의 부인 등을 통해서. 더하여 남성들이 지닌 이중성. 위선들까지도.


읽으면서 계속 추리를 하게 만들지만, 작가는 아무래도 그레이스에게 더 많은 공감을 표하고 있나 보다. 그레이스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부분에서 독자들도 그레이스에게 공감을 하게 만들고 있으니.


누가 살인자일까는 중요하지 않다. 그레이스의 삶을 통해서 당시 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 삶이 지금은 달라졌을까 생각을 해야 한다. 어쩌면 그때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런 차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는 노동들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과 그림자 노동이 존재함을 생각해 봐야 한다.


  더이상 이런 그레이스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아니, 그래도 그레이스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지 못한 그레이스의 어머니, 메리, 낸시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소설. 역시 애트우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읽으면서 캐나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검색을 해보니, 미국에서 애트우드의 이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 평가를 몇 살펴보니 상당한 호평들이 많던데... 관심 있는 사람은 드라마를 찾아 보아도 될 듯하다. 


  소설을 먼저 읽고 드라마를 보아도 좋을 듯하고, 드라마를 본 다음에 소설을 읽어도 좋을 듯한데, 난 역시 드라마 쪽은 좀 거리가 멀어서 이렇게 소설로만 읽어도 좋은 소설이었으니...


<사진 출처> 넷플릭스/미드/그레이스(Alias Grace)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시녀 이야기],[증언들],[미친 아담 3부작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 미친 아담]에 이어 정말 애트우드 소설에 감탄을 하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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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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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살벌하다. 먹을 수 있는 여자라니... 먹는다는 행위는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행위인데, 세상에 먹을 수 없는 여자도 있나 하지만, 있다.


먹는다는 행위가 능동적인 행위 같지만, 상당히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어떤 틀에 맞춰 있을 때가 많다. 사실 우리는 장소에 따라서 먹는 음식도 다르고, 먹는 방법도 다르지 않은가. 심지어는 의상까지도 다르게 해야 하니.


그렇다면 먹을 수 있는 여자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관계들에 의해 틀지워진 삶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 주인공 메리언 이야기다. 전도 유망한 변호사 피터와 연애 중인 메리언은 어느 날 피터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이유는 없다. 그냥 몸이 움직인다. 이것은 무엇일까? 피터라는 남성으로부터 조여오는 틀을 몸이 먼저 거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도망친 메리언에게 피터는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냥 그렇게 둘이 결혼을 한다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때부터 메리언에게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생겨난다는 것은 메리언이 결혼을 했을 때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지닌 친구를 만날 때도 눈치를 봐야 한다. 애를 낳으면 애에 종속되어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다. 또한 남편의 취향에 맞게 집안을 꾸며야 한다. 남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등등.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생기고 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롭게 먹었던 음식도 이제는 남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간다.


그러니 먹을 수 없는 여자가 되어 간다. 하나 둘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늘어갈 때 메리언은 피터와 결혼을 앞둔 파티에서 또다시 도망친다.  다른 남자 덩컨에게 가지만, 덩컨 역시 메리언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덩컨은 메리언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덩컨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메리언은 결국 피터와 헤어지게 되고, 직장도 다시 구하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메리언은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만든다. 이것을 먹는 메리언. 그래서 제목이 먹을 수 있는 여자다.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먹을 수 있게 된 메리언, 또 하나는 메리언을 먹을 수 있는 여자 케이크.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여성의 몸을 한 케이크를 먹음으로써 메리언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여자임을 보여준다. 이제는 어떤 음식이든 제 뜻대로 먹을 수 있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모습이다.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려 한다는 선언이다. 


남자 또는 다른 어떤 관계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선언. 이 선언이 바로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먹는 메리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애트우드가 쓴 거의 첫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음식을 비유로 들어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천박하게 먹는다는 표현을 여성에게도 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 이 제목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자신에게 만만한 여자라고. 그러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어, 아니네, 하게 된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세상을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찾아낸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도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녀이야기]나[증언들] 또는 [미친 아담 3부작]과 같지는 않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를 돋우는 소설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애트우드의 첫소설, 그리고 다음 소설들에서 애트우드가 다루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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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평전
이광호 지음,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기획 / 사회평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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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개인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알파고와 바둑을 둔 다음 이세돌이 한 말이라고 한다.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 전체에서는 위대한 도약"

달에 첫걸음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의 말이라고 한다.


노회찬 평전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를 비롯한 진보정당 사람들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들 개인에게도 큰 일이었겠지만 (이는 결코 작은 걸음은 아니다. 다만, 개인보다는 진보주의자들을 대표했다고 할 수 있으니, 이런 말도 통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정치사에도 위대한 도약을 이룬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많은 변화도 있었지만, 기대만큼 일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고, 또 진보들이 스스로 고질병이라고 하는 분열로 인해 여러 번 이합집산도 거쳤지만 (오죽하면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을까), 그래도 진보정당이 국회에 입성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일들이 많았다고 본다.


바로 그 중심에 노회찬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슬프지만 그는 갔으니, 과거형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많은 어록을 남긴 정치인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말들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가 돌연 세상을 등졌다.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을 하나 고르라면 '교과서'라고 답을 하겠다던 노회찬.


교과서가 무엇인가? 좋은 말만 적혀 있는 책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교과서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차별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도 대체로 교과서는 옳은 말을 하는 책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미래 세대에게 전수했으면 좋은 것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과서가 지니고 있는 편향성이라든지,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지 말고, 그냥 통상 교과서적 인간이라고 할 때 쓰는 그런 비유적 표현으로 쓴다)  


노회찬은 교과서대로 행동하지 않는 정치인을 보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왜 자신들에게 가르친 대로 그들은 행동하지 않는가? 그는 그렇게 교과서적 인간이 되었다. 앎과 행동을 하나로 한 인간.


자신의 이익보다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꼭 해야만 할 일을 했던 사람.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던 사람.


사회에서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을 우리 눈 앞에 보여준 사람. 그런 정치인이 노회찬이었다. 그러니 어떤 말로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세상을 등졌으리라. 


하지만 정치인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온갖 비리를 저질러 놓고도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법망을 피해가려고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또 법망을 못 피할 것 같으면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고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교과서적 인간 노회찬은 그런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교과서에 실린 대로 옳다고 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비록 실수라고 해도, 그 실수로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노회찬.


요즘 부쩍 그가 생각났다. 정치판이 참... 그러다 노회찬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의 평전을 샀다. 56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600쪽 내외에 담는다는 일이 우습기는 하지만, 이 정도 두께면 노회찬이 한 많은 일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 교과서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노동운동가로서의 삶. 여기서 그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정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일하는 정치가로서의 삶. 진보정당원으로서 국회의원이 되어 한 활동들.


국회의원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변하는 자리, 봉사하는 자리임을 너무도 잘 알고 행했던 사람. 정치를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특히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서 할 줄 알고 또 하려고 했던 사람.


많은 일들을 겪고, 진보정당의 부침도 겪으면서 진보정당이 국민을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했던 사람.


그런 그의 삶이 이 책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읽으면서 노회찬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우리 곁에 있었던 우리가 필요로 했던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6411번 버스 연설로 알려진 그의 말. 이 책에 그 연설이 실려 있다. 그가 어떤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연설.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마치 마친 루터 킹 목사가 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습니다 보다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도 기억할 수 있는 연설을 남겨준 노회찬이 고맙기도 하다.

  

우리가 투명인간 취급했던 사람들을 우리 앞으로 불러내었던 정치인. 하지만 이 연설에서 더 큰 감동을 준 것은 바로 '투명정당'이라는 말이다. 숨어 있는 정당. 정작 자신들이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데,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는 그런 정당. 그러면서 자신들의 이익은 절대 놓치지 않는 정당. 그런 정당이 투명정당이다. 


투명인간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했을 때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약자를 의미하지만, 투명인간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해 이익을 취했던 인물 아닌가. 그러니 노회찬이 말한 투명정당은 바로 그런 투명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 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 분들의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431-432쪽)


통렬하다. 통쾌하다. 투명정당, 진보정당이 투명정당이었다면, 그간 다른 정당들은 보이지 않는 정당이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빼앗아가는 정당이었을 것이다. 한데 어떤 정당 정치인도 노회찬처럼 이렇게 반성하지 않았다.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노회찬이 비판한 투명정당보다 더한 정당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정당들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 말, 투명정당. 그래서 이 연설은 더 소중하다.


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촌철살인. 노회찬의 말하기였다. 적절한 비유. 그렇다. 비유는 길어지면 안 된다. 그러니 이쯤에서 마치자. 다만, 앞의 말들을 좀 바꾸어서 끝내고자 한다.


"노회찬의 국회의원 당선은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진보정당 전체에서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노회찬 개인은 죽었지만 진보정당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의 마지막 말도 이러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5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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