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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삶이 혼란스럽다고 느낄 때, 도무지 어떤 질서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틀을 원한다.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틀. 그런 틀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면 마음이 편해진다. 틀 속에서 살면 되기 때문이다.
틀을 유형이라고 해도 좋고, 습관이라고 해도 좋다. 패턴이라고 해도 좋고. 이런 패턴 속에 자신을 놓아두면 편안해진다.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삶이 일정한 방식을 따라 익숙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삶이 그런가? 삶은 혼돈이다. 정해진 길이 없다. 정해진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문득 문득 다른 것들이 튀어나온다. 같은 길이라도 늘 다른 길이 된다. 불안해진다. 무언가 확실한 변하지 않는 길을 찾고 싶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질서를 부여한다면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고, 자신이 삶을 좀더 안정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안정된 삶. 그런 삶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사람을 발견한다. 생물학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사람. 온갖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추구한 사람.
룰루 밀러는 이런 데이비드 조던을 자신의 스승으로 삶아 자기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래서 조던의 삶을 추적한다. 그가 쓴 글을 모두 찾아 읽는다. 어떻게 그런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고, 또 어려움을 이겨나갔는가를 찾고 배우려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조던의 삶을 추적한다. 마치 조던의 평전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책은 중반부를 향해 간다. 그러다 길을 달리 한다. 역시 삶에는 온갖 변수들이 작동한다. 조던이 살던 방식에서 하나하나 의문점이 생긴다. 그가 그렇게 물고기를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 활동을 했는데, 어째서 그는 우생학 쪽으로 돌아섰는가?
왜 그는 사람들조차도 분류를 하고, 존재해서는 안 될 인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는가? 아니,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그는 불임수술이라는 단종 작업에도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는가?
룰루 밀러는 이 점에서 의문을 갖는다. 사람이 사람을 분류하고, 우열을 나눌 수 있을까? 우열을 나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른 존재의 멸절을 시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밀러가 찾던 답을 조던은 제시해줄 수가 없다. 아니 조던은 잘못된 답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답을 찾아야 한다.
찾다가 룰루 밀러는 물고기는 없다는 주장을 만난다. 바닷속에 사는 생물들을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었는데, 과연 물고기는 존재하는가? 그 많은 생물을 '물고기'라는 범주에 넣어버리면 각 생물의 독립성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독립성을 잃고 그 커다란 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런 분류가 결국 우열의 사다리를 만들어내고, 우열의 사다리라는 범주 속에서 다른 생물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그 생물들의 생존까지도 우월한 종이 결정하도록 하게 하지 않나.
결국 범주가 우열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그런 기준에 의해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억압, 약탈, 죽임이 이루어진다는 결론을 나아간다. 그러니 물고기는 없어야 한다. 이 장면까지 읽으면서 [장자]와 [노자]의 글귀가 떠올랐다.
[장자]의 글귀는 다음과 같다. 장자 '내편' 끝에 실려 있는 글인데...
혼돈칠규(混沌七竅)
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이라고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이라 하였고,그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 하였습니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때마다 둘을 극진히 대접했습이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을까 의논했습니다.
"사람에겐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줍시다." 했습니다. 하루 한 구멍씩 뚫어 주었는데, 이레가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습니다.
(오강남 풀이, 장자, 현암사. 347쪽에서)
혼돈이 자연스러운데, 그것을 자신들이 판단해서 질서로 바꾸려고 한다. 즉 어떤 범주를 다른 대상에게 강제로 적용하려 한 것이다.
혼돈이 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이 결과, 분류라는 이름으로 범주를 나누고, 그 범주에 속하게 다른 개체들을 집어넣고, 또 범주들 사이의 위계를 정해버리는 일. 이는 다른 개체를 자신의 행동으로 죽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오래 된 동양의 지혜가 서양 과학자들의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고도 할 수 있는데, 룰루 밀러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 쓴 이 책에서는 이런 장자의 말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여기에 위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도덕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지구 또는 우주라고 하자. 이런 지구나 우주의 처지에서는 인간이든, 다른 동물이든, 식물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냥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일 뿐.
노자의 말을 보자.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성인도 편애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모두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오강남 풀이, 도덕경, 현암사, 35쪽)
그렇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 중에 더 낫고, 더 못함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냥 함께 존재할 뿐이다. 함께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특정 집단에 의해서 범주로 나뉘고, 그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배척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질서로, 틀로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냥 개체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개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혼돈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튼튼한 벽 안에서만 살아갈 수 없고,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길에서 삶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룰루 밀러의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삶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연결지으면서, 우생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장면까지 나아가는 책. 그리고 자신이 혼란스러운 삶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발견되었는지, 그런 발견 과정에서 '물고기는 없다'는 깨달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다른 존재들을 어떤 범주로 규정짓고, 그 속에 넣어버리는 행위들, 이런 행위들이 자칫하면 위계로 나아가고, 위계는 손쉽게 차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룰루 밀러는 말하고 있다. 흥미롭게, 그러나 우리 삶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