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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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소,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 경주'


다 다른 내용이지만, 공통점을 굳이 찾으라면, 주인공들이 잘사는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투철한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하층민, 우리가 서민이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과연 그런 세상이 왔을까, 이들은 혁명 전후를 비교하지만, 혁명 이후에 무엇이 나아졌는지 묻고 있다.


아니, 혁명을 통해서 과연 사람들이 지닌 기본적인 감정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점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겪게 되는 여러 일들이 체제를 막론하고 일어날 수 있음을 모옌은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공산주의가 한창 자리를 잡아가야 할 때를 배경으로 그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사회의 허구성, 폐쇄성,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소설도 아니다. 어느 체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경직된 관료들, 그런 사회에서도 나름대로 융통성을 발휘해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 잘 나와 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읽다보면 그 체제에서도 참 많은 문제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체제의 우월성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피고, 그들이 잘살아가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함을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평생 모범 노동자로 살던 사람이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정리해고 되는 모습, 그런 사회가 어찌 공산주의 사회겠는가? 체제와 상관없이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공장은 사라지고, 노동자들은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는 처지. 그들을 도와줄 체제는 없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에 나오는 주인공은 살 길을 찾다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눌 장소를 만들어 돈을 버는 라오 딩, 이 소설에서 딩 사부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가 겪는 일은 우리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각자도생. 이것을 이 소설은 유머러스한 문체로 풀어가고 있다.


'소'는 더 해학적이다. 우리나라 김유정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소설인데, 불까기한 소를 살리기 위해 밤새도록 끌고다녀야 하는 순박한? 시골 소년과 노인. 이들의 노력에도 소는 죽고, 그 다음이 풍자적이다. 그 소를 키우는 생산대에 주지 않고 자신들이 요리해 먹은 간부들이 식중독에 걸려 죽을 고비를 겪는 내용.


그렇다. 어떤 사회에서도 윗사람들은 잘먹고 잘산다. 그들은 없는 사람들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특출난 재주가 있다. 그런 재주를 이 소설에서 잘 볼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우파'로 몰리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지만, 우파들이 어떻게 우파가 되었는지를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냥 우파가 필요했을 뿐이다. 세상에 행진할 때 오른발이 먼저 나갔다고 우파라니?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어느 마을이든 우파가 꼭 필요했기에 이런 이유로도 우파가 될 수 있었음을, 마을의 장거리 경주를 배경으로, 과거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소년의 눈으로 본 그 우파나 또 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인데...


오래 전 마오쩌뚱이 중국을 공산주의 사회로 만들려고 했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음을 모옌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이 소설들을 통해서 경직된 사회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런 것이 바로 삶임을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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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세계
션 B. 캐럴 지음, 장호연 옮김 / 코쿤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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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이냐 우연이냐를 많이 따진다.눈먼 시계공이라는 말도 있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우리 삶이 과연 정해진 대로 살아질까? 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만 하면 될까?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의 삶에는 우연이 없다는 말일까?


과연 그럴까? 인간 숫자가 70억 정도 되는 이 지구에서 과연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까? 그렇다면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멸종들도 필연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의문들이 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 그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서 한계를 이겨내는 방법으로 필연을 생각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기 위해서도 그런데, 그 상상이 인간의 한계를 짓는다고도 해야 한다.


신의 뜻대로라면 인간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자유의지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자유의지라고 해도 과연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뜻대로 한다는 의미의 자유의지라면 내 뜻대로에는 수많은 우연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는 우연으로 이루어진 세계, 우연이 만든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된다.


왜 하필 그때, 또 똑같은 일을 당하고도 대처하는 방식이 다른 경우, 그리고 인간의 유전자가 거의 비슷하지만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는 이유 등등.. 결국은 우연이 작동한 결과라고 한다.


우연히 어떤 것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살아남아 다시 퍼뜨리고, 강화되고, 거기에 다시 우연이 발동하여 돌연변이가 생기고, 돌연변이가 널리 퍼져 우세종이 되는 현상. 이러한 현상들에 어떤 필연성을 찾기보다는 우연으로 인해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몇억 분의 일이라는 확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우연이 작동한다. 그 점은 우리도 안다. 하지만 단지 모든 것을 우연에 기대지는 않는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노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여기에 또다른 우연이 개입해서 다른 변화가 일어난다.


이 말을 저자의 말을 빌리면 '우연은 창조하고, 자연선택은 발명품을 퍼뜨린다'(156쪽)고 할 수 있다.


왜 저자는 이렇게 우연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이것은 바로 인간의 자율성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신에게 인간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아닌, 수많은 우연으로 인류가 지구상의 지배종이 되었고, 또 수많은 우연으로 인간 유전자에 많은 변이들이 생기며, 그런 우연들이 살아남음으로써 지구상에서 생명들이 살아가게 했다는.


책은 처음에 지질 발견부터 시작한다. 단층이 생겼고, 거기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는. 멸종이 이루어졌는데, 멸종을 무엇이 일으켰느냐는 추적으로 부터. 추적의 결과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했고, 그 충돌로 인해서 많은 생물들이 멸종했다고 한다.


많은 생물들의 멸종을 일으킨 소행성 충돌은 필연일까? 아주 적은 확률로 일어난 우연이다. 이 우연이 생명체들의 존속을 갈랐으니... 그렇다면 이런 우연에서도 살아남은 종들은 어떤 종들일까?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신을 창조한 생명체들이다.


결국 우연이 생명체들의 몸에 무언가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고, 이래서 우연이 창조하고, 자연선택이 퍼뜨린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 인간은 과거를 학습하는 능력이 있으니, 그러한 우연으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되었을 터. 우리는 우연으로부터 창조와 지속을 학습했고, 이런 학습이 바로 인간의 자율성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우연은 자리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신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 이 책6장에서 오순절 교회 목사들이 독사를 들고 설교하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우연을 강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우리 세상은 우연이 우리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일이 많다. 


그러니 신의 뜻대로가 아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니, 살아 있는 동안 삶을 즐겨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우연에 대처하는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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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불러보았다 - 짱깨부터 똥남아까지, 근현대 한국인의 인종차별과 멸칭의 역사
정회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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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다. 읽으면서. 의식하지 않고 쓰는 말 중에 혐오 표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 여기던 일이 당연하지 않음도, 또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읽었던 작품들에서도 인종차별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알려고 하지 않음, 의식하지 않음. 우리나라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인종차별을 우리가 한다고? 이런 반문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일을 인종차별로만 인식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인종차별의 역사는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함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인종차별... 피부색만이 아니다. 우선은 피부색에 따라서 차별을 하지만, 경제적 차이가 나는 나라에 따라서 차별을 하고, 또한 종교로 차별을 하는 것도 인종차별이라 할 수 있다.


개화기 때 신문이 처음 우리나라에서 발간될 때, 그 신문 내용에는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백인을 우위에 두고, 흑인을 미개한 종족으로, 인디언 역시 미개한 종족으로 이야기한 내용들.


근대화라고 해서 그런 신문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무장한 개화기 지식인들의 머리에는 은연중에 인종차별이 박혔으리라.


김옥균도 흑인들을 보고 멸시하는 발언을 했다고 하니, 근대화가 곧 백인화를 뜻하는 것이었는지,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본이 그렇게 따라가고자 했던 서구화는 곧 백인화였을 테고, 자신들은 백인에 버금가는 종족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을 서열화했던 시기.


유사과학이라고 해야 하나? 혈액형을 가지고 인종계수라는 용어를 사용해 인종차별을 합리화했다고 하니, 참... 


'1919년 독일인 학자 루드비크 히르슈펠트와 한카 히르슈펠트는 혈액형 B형보다 A형이 진화한 형태이므로, 백인일수록 A형의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유색인일수록 B형의 출현 빈도가 높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그들은 A형인 사람의 수를 B형인 사람의 수로 나눈 '인종계수'라는 수치를 개발했는데, 분석 결과 그들이 세운 가설대로 백인이 비백인보다 인종계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경성의과전문학교 외과교실 교수 기리하라 신이치와 그의 연구팀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인종계수는 1.78인 반면, 한국인은 1.07로 나타났다. ...열등한 한국인은 우월한 일본인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식민사관으로 이어졌다.' (56쪽)


어처구니 없는 연구지만, 인종차별을 합리화 하는 데는 이런 과학 아닌 과학이 유용하게 쓰였으리라. 게다가 이런 연구들이 우생학을 뒷받침하고 있었을 테니...


해방이 되고 나서 미국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더 강화된다. 경제개발이 되면서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우리나라의 인종차별 역사는 오래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구체적인 인종차별의 사례로 흑인, 화교, 혼혈인, 동남아시아 사람들, 무슬림에 대한 이야기를 2부에서 하고 있다.


이래도 인종차별이 없다고 할테냐라는 듯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보여준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있었는지를...


나는 그런 적 없다고? 과연 그럴까? 이 책 제목을 생각해 보자. '한 번은 불러보았다'는 말. 우리는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한번쯤은 해봤을 테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신이 인종차별을 한다는 의식도 없이.


그 점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감추는 게 많은 나라, 우리가 타자화한 집단들의 역사를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 나라, 이것이 한국을 인종차별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216쪽)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 이 책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대구에서 무슬림 사원을 건축을 반대하는 시위가 지금도 진행 중이다. 2년이 넘게... 반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증명되지 않았다. 전형적인 혐오, 인종차별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은 아예 돼지고기 파티를 하고 있다고 하니...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에서. 그들은 내가 내 집 앞에서 돼지고기를 먹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고 있으니...


무슬림들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 또 결혼한 동남아시아 사람들, 여기에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있으니.


그래 '한 번은 불러보았'을 그런 차별을 하는 말들을 두 번, 세 번 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인식하고 반성하고, 고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오랜 세월 몸 속에 박힌 인식하지 못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나를 객관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남을 살피듯이 나를 살펴야 한다. 외국인들이 우리를 차별하면 분노하듯이, 우리가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나 성찰해야 한다. 더불어 한국 국적을 갖고 있음에도 한국인으로 대우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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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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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연수 소설에는 어떤 특징이 있다.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도 개인을 놓치지 않고, 또한 사랑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랑이 서로를 파멸로 이끌기도 하고, 구원으로 이끌기도 한다. 어쨌든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그의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사랑이 나온다. 그런데 이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다. 서로 소통이 안 되는 사랑이다. 사랑이 개인을 넘어서야 하는데, 개인에 갇힌 사랑이 이 소설에서 사람들을 파국으로 이끌게 된다.


하지만, 그런 개인에 갇힌 사랑도 개인의 소멸로 끝나지 않음을, 결코 감출 수 없음을, 어떻게든 살아남아 개인에 갇힌 사랑이 어떤 일을 불러일으켰는지를 보여주게 된다.


소설은 현재로부터 시작한다. 입양된 아이. 엄마를 모르는 아이. 여기까지는 상투적이다. 친부모를 찾아 한국에 온다는 설정. 우리가 많이 본 상황 아닌가.


그런데 한국에 와서 상황이 복잡해진다. 진실이 안개 속에 갇힌다.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처럼 짙은 안개가 친엄마를 찾는 여정을 가린다.


그 안개는 세월이 만든 안개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든 안개다. 사람들이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그러니 그들은 가린다. 소설 속에서는 이를 매생이국에 빗대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겉으로는 별로 뜨거워 보이지 않으나 속은 엄청 뜨거운 매생이국.


엄마를 찾아 온 이야기가 지나면 엄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번째 장의 주인공은 이제 '너'로 나온다. 그리고 엄마의 과거이야기. 다음은 엄마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마지막 부부분에서는 양관의 주인이 된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통해 소설은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그러나 안개는 완전히 걷히지 않는다. 그 안개 속에서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독자의 몫이라는 듯이.


소설 속에 나온 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겪었던 문제다. 이 파업을 둘러싸고 깊은 심연이 생긴다. 서로 건너갈 수 없는 심연.


파업 중에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그 사망원인을 한 사람에게 전가한다. 그 역시 견디지 못하고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둔 아이들의 개인에 갇힌 사랑이 서로를 더 견디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 또다른 소통 불능의 집. 양관이 등장하고. 하지만 양관은 소통불능의 집에서 소통의 집으로, 서로 건널 수 없게 된 심연을 건널 수 있게 하는 날개 역할을 하게 된다. 심연 속에 갇힌 외로움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양관이다. 


말들을 모아 들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 즉 말을 가두지 않고 날아다니게 하는 것. 양관은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된다. 이렇게 엄마를 찾아온 카밀라는 결국 엄마를 만난다. 거기까지다. 그 이후는 읽는 사람들이 상상해야 한다.


입양과 파업과 죽음. 그리고 아버지를 찾는 과정이 교차하면서 소설은 점점 흥미를 더해간다.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장면. 


제목과 연결지어 생각해 본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다음에는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고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나온다.


소설을 읽다 보면 죽은 엄마의 말로도 이 구절이 나오는데 (228쪽) 세월이 흘러도 사라질 수 없는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결국은 심연을 건너게 한다.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심연을 건널 수 있게 날개를 만들어준다.


양관이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흥미진진하게, 부모찾기라는 서사로 읽을 수 있지만(엄마는 찾았지만, 아빠가 누구인지는 읽는 사람이 추측해야 한다), 그보다는 무언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 심연에 빠질 수도 있지만, 다시 사랑으로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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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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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경이로운 소년이다. 초능력이다. 남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남의 생각을 읽을 줄 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감하면서 공명할 수 있는 능력. 이 공명의 능력은 혼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공명은 퍼져나가야 한다.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듯이, 공감은 공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퍼져나간다. 이런 공감의 능력, 공명이 바로 우리들을 좀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이 소설은 사고로 아빠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를 잃는 순간,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냥 그렇게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이 소설의 배경인 1980년대를 빼놓은 것이 된다.


전두환 독재시대... 많은 사람들이 제 할 말을 못하고 살던 시대. 자기 마음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공감하는 능력, 사람들과 공명하는 능력은 초능력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아이를 통해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낸다.


아빠, 결코 애국자와는 거리가 먼 아빠가 간첩을 잡기 위해 희생한 사람으로 둔갑한다. 정보부에 의해서. 이는 자신이 권력을 쥐기 위해서 사건을 조작하던 당시 권력을 추구하던 인간들의 모습을 권대령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나타낸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인간들까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등장해야 한다. 고문당하는 사람들, 그 마음을 읽었기에 견딜 수 없었던 주인공. 그가 탈출해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의 아픔. 그 아픔을 알아가면서 그도 조금씩 성장해 간다.


물론 그 아픔을 알게 되면서,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점점 사라진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 이외의 사람들 마음을 자연스레 읽을 수는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마음 읽는 능력을 온전히 잃게 되지는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닌,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있는 정답을 찾는 행위가 아닌, 질문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사람들 마음을 읽게 된다.


이런 전개 방식으로 인해서, 소설은 주인공의 엄마를 통해서 분단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강토로 살아가려고 하는 희선을 통해서 1970년대 박정희 시대를 소환하기도 한다.


1987년이 되기 전까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기를 거쳤던 우리나라. 그 시기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다른 사람 마음을 읽는, 고아가 된 주인공 김정훈을 통해서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1986년을 거치면서, 1987년... 소설은 그 87년에서 끝난다. 우리 시대의 겨울도 그렇게 끝났으면 좋으련만, 지금 우리는 그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소설 이후의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다.


여전히 우주는 젊고, 우리는 할 일이 있다. 소설의 끝에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 뭐라도 할 것이라고 /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319쪽)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당도하지 못한 밝고 따스한 별빛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 빛들은 언젠가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은 잃지 않는다.


답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답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그 답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해야 함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가지만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질문을 하게 되는, 이제는 주변을 볼 수 있게 되는 주인공처럼, 그렇게 우리는 지내왔기에.


그럼에도 역사는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세상은 단선적이지 않다. 복잡하게 나아간다. 앞으로도 옆으로도 때로는 뒤로도.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듯이 이미 겪은 일들은 우리에게 답을 찾는 능력을 주었다. 소설에 바보와 모범생과 천재의 읽기가 나오는데, 적어도 우리는 바보의 읽기는 끝냈으므로.


처음에는 상황이 비극적이지만 밝고 경쾌하게 진행되던 소설이 조금씩 무거워지더니, 우리나라가 거쳐온 독재 정치를 정면으로 다루고, 1987년으로 나아간다. 


고립된 개인,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한 개인들의 사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공명하는 사회로 나아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사고로 초능력을 얻은 주인공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가볍지만 무겁다고 할 수 있고, 무겁지만 경쾌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 행갈이를 한 그 문장들... 왜 2023년인 지금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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