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블과 함께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마농지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점을 확 바꿔주는 책이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다른 생물체들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는 시기라서, 이를 인류세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 환경 파괴, 지구 파괴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일이라서 자본세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다. 역시 타당하다.


그런데, 인류세나 자본세에는 현상을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한다. 너무도 거대한 체제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류는 성장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늘 언론에서 접하는 성장률에 관한 기사들을 보라. 성장이 안 되는 인류가 망하는 것처럼 서술된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 인구 감소가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구도 계속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 발상은 성장주의 발상이고, 인류중심주의 발상이다. 이런 관점이 바뀌지 않는 한, 인류세, 자본세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들이 말하는 인류세, 자본세의 틀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끝부분에 실린 카밀 이야기를 읽어보라. 해러웨이는 인류가 계속 늘면 그것은 공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카밀 5세에 가서 인류 인구를 30억으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때 해러웨이는 '쏠루세'를 주장한다.


'사람들이 그것의 일부이고, 그 속에서 지속성이 위기에 처한,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공-지하적symchthonic 힘과 권력을 위한 이름. 어쩌면, 단지 어쩌면, 다른 지구인들과 함께하는 진지한 헌신과 협동적인 일과 놀이가 동반돼야만, 사람들을 포함한 풍부한 복수종 무리를 위한 번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과거, 현재, 그리고 다가올 것으로서) 쏠루세 Chthulucene라고 부르겠다.' (173-174쪽)


즉 시 쏠루세에는 일방이 없다. 무조건적인 조화도 없다. 트러블이 있다.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생성과 파괴도 함께해야 한다. 생성을 위해서 파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쏠루세라는 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비유가 바로 퇴비다. 퇴비는 죽은 것들과 산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다. 이 공존을 통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간다. 바로 쏠루세가 그렇다.


이런 쏠루세를 받아들이면 지금 원인 분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려움과 함께하기 때문에, 실천이 늘 동반된다. 그것도 어느 한 종의 우세로서의 실천이 아니라 여러 종들이 함께하는 실천.


해러웨이의 이 책을 읽다보면 인구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솔닛이 [야만의 꿈들]에서 말했던 원주민들이 불을 질러 나무들을 불태우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본다. 즉, 얽히고 얽혀서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 내는 실뜨기처럼 우리들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과 어울려 살다보면 자연스레 자식이 아닌 친척을 만들게 된다. 즉,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생물학적 자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종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쏠루세'라는 개념에 들어있는 실천이고, 해러웨이가 말하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다. 바로 퇴비의 삶이기도 하고.


다양한 종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터무니 없는가? 아니다. 우리는 예전에 다양한 종들과 함께 살아왔다. 하다못해 귀신, 정령들과도 함께 살아오지 않았던가. 즉, 삶과 죽음이 함께하고, 다양한 종들이 함께 했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봐도 말하는 동물들이 나오고, 나니아에서는 모든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또 [샬롯의 거미줄]을 보라. 어린 시절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던 시절이 있다. 그것을 스스로 삭제하고 살아온 것이 현대인들의 삶, 즉 인류세와 자본세를 살아온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라는 장소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살기 힘든 장소가 될 테니... 해러웨이의 글들 읽을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만의 꿈들 - 장소,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양미래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닛의 글들은 여러 생각할거리를 준다. 단지 생각할거리가 아니라 실천해야만 하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는 걷는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 걸으면서 문제를 만나고, 문제에 대응을 한다.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네바다 사막과 요세미티 공원을 장소로 하고 있다. 물론 솔닛은 이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장소들을 걷는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


솔닛에게 걷기는 '문제를 향해 걷는 행위는 책임을 지는 행위, 되돌리는 행위, 기억하는 행위다. 걷기 운동가들은 과거의 짐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채 핵폭탄 수백 개의 낙진이 있는 고국으로 걸어간다.(492쪽)'고 하듯이, 문제를 알고 해결하려는 행위다.


네바다 사막을 장소로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네바다 사막은 미국이 핵실험을 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핵실험을 하기 전에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을까? 아니다. 단지 모래만이 펼쳐진 자연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던 장소였다.


하지만 정부는 네바다에서 사람들을 소거했다. 그곳은 사막이어야 했다.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없는 그런 사막. 그래야만 핵실험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방사성의 위험을 알릴 필요도 없이. 하지만 아무리 넓은 사막이라도 방사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방사능이 한 곳에만 머무를까?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솔닛은 네바다로 간다. 네바다를 자유롭게 걷고자 한다.


핵실험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게 울타리 처놓은 곳으로 솔닛은 간다. 울타리를 넘는다. 체포된다. 또다시 걷는다. 체포된다. 그곳은 사람들이 걸을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던 곳이 아니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던 장소였다. 그런 장소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솔닛은 걷는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요세미티 공원도 마찬가지다.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는 오래 전부터 살아오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원주민이라고 불러도 좋다. 미국 정부가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해도 존재했던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또 솔닛은 걷는다. 이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한 장소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한 곳은 자연이 살아 있는 공원이기는 하지만, 솔닛은 이 두 장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니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없는 것처럼 두 공간을 인식하도록 했는지를...


따라서 솔닛과 다른 사람들이 그 공간을 걷는 행위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그렇기에 솔닛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네바다와 요세미티에서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걷기는 문제와 대면하는 행위라고 했다. 솔닛의 이런 걷기가 끝났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걷기는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다. 


삼보일배, 오체투지...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 온몸을 던지면서 걷는다. 왜? 그냥 걸으면 봐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을 던져야 겨우 그제서야 아, 사람들이 있구나! 사람들이 걷고 있구나! 무슨 문제가 있구나! 한다.


솔닛이 걷고 또 걸었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온몸을 던지면서 걸어도 문제를 없는 것처럼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홀로 걷지 않고 함께 걷는다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가 보이면 해결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걷기는 문제를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솔닛이 말하듯이 걷기는 바로 책임을 지는 행위, 기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를 이끌어간다고 하는 과학자들, 기술자들 역시 걷기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솔닛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걷기의 장점이 현대 과학자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유럽 물리학자는 고전 교육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학은 물론 정치, 시,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진 엄청난 교양인이었다. 그들의 산책은 풍경 감상, 낭만주의적이고 괴테적인 전통에 따른 자연 숭배, 허물 없고 위계적이지 않은 소크라테스적 전통에 따른 걷기, 사무실이나 교실에서가 아니라 길 위에서 걸으며 나눈 대화 등에 대한 취향을 분명히 보여주기도 했다.'(180쪽)   

   

단지 과학 분야만 그럴까?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 걷기를 통해서 공간과 시간, 인간이 합쳐진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 점을 솔닛의 글이 다시금 깨우쳐 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1-16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공간은 걷는 행위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이 문장에 꽂혀서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kinye91 2024-01-1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닛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요. 특히 ‘걷기‘에 대해서는 더더욱요.
 
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13쪽)


카프카 [변신]에서 게오르그 잠자가 깨어났더니 벌레로 변해 있었다는 문장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시작은 변신으로 시작한다. 무엇이 변신했다는 말인가? 첫문장을 보면 잘 알 수가 없다. 카프카처럼 사람이 다른 존재로 변신한 것일까? 아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곧 사람이 다른 존재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사람으로 변신한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짐 샘스는 사람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퀴벌레 이름이다. 그리고 그가 변신한 거대 생물체는 바로 인간이다. 그것도 영국의 수상.


마찬가지로 다른 각료들도 바퀴벌레들이 변신한 존재로 나타난다. 몇 각료를 빼고는. 하지만 본래 인간이었던 장관은 그들의 세상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바퀴벌레로 장악된 정부에서 역방향주의가 통과가 된다.


그렇다면 역방향주의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어떤 것? 설명을 보면 이 소설은 영국의 브렉시트를 풍자하고 있다고 한다.


즉, 영국의 브렉시트는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이고, 그것이 과연 영국민의 행복을 보장할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바퀴벌레의 변신으로 나오고, 또 그들의 정책이 역방향주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브렉시트에 반대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 대통령으로 나오는 인물은 누가 읽어도 트럼프를 연상시키고 있으니, 영국과 미국에서 벌어진 경제 정책이 국민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소설의 끝부분을 보라. 과연 역방향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우리는 우회적인 수단을 통해, 그리고 많은 실험과 실패 끝에, 인간의 파멸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지구온난화는 확실한 전제조건이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고착화된 계급, 부의 집중, 뿌리 깊은 미신, 루머, 분열, 과학과 지성과 낯선 이들과 사회적 협력에 대한 불신을 꼽을 수 있지요.' (123쪽)


이 말은 역방향주의는 개방이 아니라 폐쇄로, 협력이 아니라 갈등으로, 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책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다음 구절을 보면 역방향주의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알게 된다.


'역방향주의라는 광기가 일반 대중을 더 가난하게 만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번성할 것입니다.' (123쪽)


이때 바퀴벌레를 우리가 아는 바퀴벌레로 생각하지 말자. 보통 사람들에게 기생해 사는 존재로 보면,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바퀴벌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바퀴벌레들의 농간을 간파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삶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잘 보여준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잠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들은 성공해서 의기양양하게 돌아간다.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오는 미국 대통령이 왜 트럼프만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까?  이 소설에 나오는 바퀴벌레와 같이 변신한 종족들이 우리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이 소설이 꼭 영국의 브렉시트를 풍자한 소설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니, 소설을 읽으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린치핀 -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
세스 고딘 지음, 윤영삼 옮김 / 라이스메이커 / 2019년 12월
평점 :
품절


세상에 경전이 많다. 경전이 한 권이라면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싸울 일이 없겠지. 하지만 그 많은 경전들을 관통하는 내용이 다 다를까? 몇몇은 다르기도 하다. 유일신,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경전처럼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신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 경전이 설파하고 있는 인간들이 실천해야 하는 내용을 보면 대동소이하다. 


그러니 어떤 경전을 읽고 그 경전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면 세상은 자비와 사랑과 평화가 넘치게 될 것이다. 상대를 비방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내 일처럼 돕고, 자신을 항상 뒤돌아보고 개선하려고 하며, 나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린치핀]이란 이 책도 마찬가지다. 경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경전에 비유하기가 너무 거창하다면 교과서에 비유하면 된다. 물론 이 책에서는 학교를 비판한다. 학교에서는 린치핀이 아닌 톱니바퀴를 양산한다고 하니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 톱니바퀴가 되는 길밖에 없다. 이는 곧 실패를 의미한다. -431쪽)


교과서란 말은 틀에 박힌이란 의미로 많이 쓰이니, 틀을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이 책의 취지와는 맞지 않으니 빼자. 경전이 맞다. 경전은 순응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전은 단순히 순응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순응이 아니라 경전대로 살아간다면 세상을 바꾸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만 보아도 그렇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는 경전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 아니었다. 불교는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계급으로 나뉘어진 사회를 비판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는 바로 혁명적이다. 누구나 소중한 사람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교 역시 마찬가지다. 공자의 사상이 순응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맹자를 보라. 왕을 쫓아낼 수 있는 근거를 제기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사람답게 사는 방법, 그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놓은 책들이 경전이다.


이런 점에서 경전은 우리 삶에 많은 도움을 준다. 왜 [린치핀]이란 책을 이야기하면서 경전을 들먹였냐고? 그것은 이 책이 바로 경전과 같은 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읽으면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래야 린치핀이 되고, 이 사회에서 우리는 톱니바퀴가 아니라 린치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 특히나 인공지능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대체불가능한 린치핀이 되어야 한다고...


린치핀은 <다음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이 풀이되어 있다.


린치핀은 마차나 수레의 바퀴를 고정시키기 위해 축에 꽂는 핀으로서 안보 ・ 외교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는 핵심 국가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미국은 린치핀이란 용어를 미국 ・ 일본 간 동맹 관계에서 주로 쓰다가 오바마 행정부인 2010년 6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처음으로 한미동맹 관계를 린치핀이라고 표현했다. (출전 : 린치핀 - Daum 백과)


영어 사전을 보면 linchpin : 1. 바퀴를 굴대에 고정시키는 핀 2. 중핵을 이루는 중요인물 3. 급소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린치핀은 중요한,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현대사회에서 대체불가능한 인물이 바로 린치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린치핀이 될 수 있는가?


많은 방법이 - 이 책에서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방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구체적인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으니 - 있지만, 그 방법은 경전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실천은 개인의 몫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 경전에 쓰여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린치핀이 되는 방법을 읽고 머리 속에 간직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니 이 책은 경전이다.


하지만 경전에도 우리가 기억하는 문구들이 있기 마련이니,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린치핀이 되기 위한 자세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학교에서는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고, 저자는 학교의 교육은 톱니바퀴를 양산하지 절대로 린치핀을 길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긴 경전을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으니까...


린치핀이 가진 일곱 가지 능력이라는 장을 기억하면 된다. 적어도 이런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면 되니까...


1. 조직 구성원들이 접촉할 수 있는 고유한 통로를 만든다.

2. 고유한 창의성을 발휘한다.

3. 매우 복잡한 상황이나 조직을 관리한다.

4. 고객들을 이끈다.

5. 직원들에게 영감을 준다.

6. 자신의 분야에 깊은 지식을 제공한다.

7. 독특한 재능을 지닌다.  (417-418쪽)


이런 말들을 뭉뚱그릴 수 있는 말이 '관계, 예술, 선물'이라는 말들이다. 이 세 단어는 이 책에 많이 나온다. 


관계는 중요하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이 관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진심을 다한 만남, 이런 만남은 선물이다. 선물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좋아서 준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좋은 것, 그것이 선물이다. 이런 선물을 주는 자세,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그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즉 관계에서 예술은 선물로 나타나게 된다.


[린치핀]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나는 린치핀인가, 톱니바퀴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행동들은 린치핀에서 멀어진 행동들이 아니었나. 내 삶도 린치핀이 아닌 톱니바퀴에 불과하지 않았나, 언제든 대체가능한 존재가 나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 책의 저자가 말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하니, 그것이 린치핀이 되는 가장 기본이라고 하니, 어쩌면 이 책은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경전이 아무리 좋은 소리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름모모 2024-01-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천하는 움직임이 되는 오늘이 되도록 !!! 다짐해 봅니다.

kinye91 2024-01-09 10:52   좋아요 0 | URL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귀향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원제가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번역을 했으면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주인공의 이름이 후안 벨몬테인데, 이는 유명한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작중에서 이름을 댈 때마다 사람들은 투우사의 이름을 들먹인다.


주인공이 왜 투우사의 이름을 같고 있을까? 투우가 무엇인가? 소와 정면으로 맞대면해서 결국 소의 등에 창(칼)을 꽂아 소를 죽이는 일을 하는 일 아닌가. 요즘은 동물학대라고 해서 많이 비판받고 있는데, 그 점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투우는 한쪽의 목숨을 건 대결이다. 물론 사람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한쪽이 당하는 일. 결과가 잘 바뀌지 않는 일.


그렇다면 귀향은 무엇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예전의 생활을 되찾는 일까지 포함한 장소의 이동이 귀향이라고 한다면, '귀향'도 쉽지 않다. 소설 속 벨몬테 역시 제대로 된 귀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배경은 독일과 칠레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나라가 '나치'에 의해 연결이 된다. 나치 부역자들이 남미로 많이 피신을 했었으니,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소설은 이 두 나라를 연결짓는 고리로 나치 시절에 금화를 훔쳐 달아난 독일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나치 치하에서 경찰이었지만 나치에 동조한다고는 할 수 없다. 나치가 숨겨둔 금화를 훔쳐 달아나려 한다. 어디로? 남미로...칠레로...


하지만 이들은 성공 단계에서 한 사람만 빠져나가고 한 사람은 잡히게 된다. 잡힌 사람이 끝까지 동료의 행방을 불지 않고 세월은 흘러 흘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사건은 다시 시작된다. 이 금화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을 고용한다.


그러니 소설은 두 축으로 시작한다. 금화를 가운데 두고 이를 찾기 위해 나서는 나치와 관련이 있는, 아니면 구동독 정보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금화를 찾으려는 보험회사. 


갈린스키가 구동독 정보부를 대표한다면 벨몬테는 보험회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갈린스키가 구동독 정보부를 대표하는 것은 맞지만 벨몬테는 보험회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귀향을 꿈꾸기 때문이다.


남미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게릴라 출신인 벨몬테. 그는 고문으로 말을 잃은 베로니카를 치료해준다는 조건에 일을 맡고 나선다. 그에게는 금화를 찾는 일은 귀향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귀향하는 곳이 독일이든 칠레든 아니면 그가 조건으로 내건 베로니카를 치료할 수 있는 덴마크 건 그것은 상관이 없다.


즉, 갈린스키에게 금화는 자신의 옛 영화를 대변하는 존재라면, 벨몬테에게 금화는 베로니카와 함께 귀향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금화를 사이에 두고, 이들은 투우처럼 대치하게 된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승자를 예측할 수 있다. 벨몬테가 승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의 귀향이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칠레가 민주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민주화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점을 세풀베다는 벨몬테를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국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분 명 입 밖으로 토해 내지 않았다. 칠레가 민주주의 체제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좋은 길로 나가고 있다거나 , 그 반대로 그 길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53쪽)  


자,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러니 벨몬테의 귀향도 진행 중이다. 그가 베로니카에게 가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고 있는 것은 그의 귀향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사실에서부터 남미의 민주화 투쟁 시기를 금화를 둘러싼 두 인물을 통해서 소설은 긴박하게 전개된다. 


금화를 먼저 찾기 위한 여정, 두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지닌 귀향. 그렇지만 이렇게 긴박하게 진행되는 소설 속에서도 정지된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정지되었다기보다는 이런 쫓고 쫓기는 삶에서 한발 비껴선 이들의 삶.


금화를 숨긴 독일인이 숨어 살던 곳, 그곳에 살던 사람들... 이들은 "그 빌어먹을 것들을 어서 가져가시오."(212쪽)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과거의 금화, 또는 현재의 삶을 더욱 부유하게 해줄 금화는 필요없다. 그들에게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이 더욱 소중하다. 그러니 그 금화를 빨리 갖고 사라지라는 말을 한다.


이들의 구성원이 깜빡깜빡하는 노인이나 듣지 못하는 여인들과 함께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투우처럼 피비린내 나는 일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고 남들을 돕고 사는 사람들. 


세풀베다는 작품의 말미에 이런 삶을 보여준다. 결국 베로니카에게 가면서 벨몬테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벨몬테가 베로니카와 만나는 순간, 그의 귀향은 완성될 수 있다.


'나의 사랑 베로니카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삶 앞에서 왜 죽음의 황금빛 섬광들만 바라보았는지를 생각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213쪽)   


그렇다. 여기서 '투우'는 끝나고 '귀향'이 시작되며 완성된다. 죽음의 황금빛 섬광들을 과거로 여기고 이제는 삶에 충실하려는 모습... 벨몬테가 마지막에 만났던 사람들의 삶 아니던가.


세풀베다의 소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권 읽을 때마다 좋은 느낌을 받는다. 재미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풍성하고...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에 세상을 뜬 세풀베다를 기리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