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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를 건너며 혁신교육을 꿈꾸다
오산시 스웨덴.핀란드 학교탐방단 지음 / 독서시대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혁신교육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우리 교육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특정한 집단, 특히 수구세력 쪽에서는 전교조라는 좌익집단이 주도하는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혁신교육을 빙자해서 이데올로기 교육을 한다고, 이런 혁신교육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또 그렇게 가고 있기도 하고. 진보는 좌익이고 좌익은 빨갱이고, 빨갱이는 우리나라에서 존재해서는 안되는 집단이라는 의식이 팽배한 우리나라에서 어떤 단체를 좌익으로 몰아가면 그 다음부터는 논쟁도 되지 않는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혁신교육에 대한 이미지는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특히 북유럽을 이야기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진보니 보수니 할 것 없이 모두 북유럽의 교육은 성공했으며, 이런 교육이야말로 혁신교육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을 한다. 다른 나라의 혁신은 칭찬의 대상이며, 우리나라의 혁신은 견제의 대상이다. 그런 부러움으로 교육견학을 많이 간다.

 

스웨덴, 네덜란드, 핀란드. 최근 몇 년 동안에는 핀란드 교육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유행이 되었다. 아마도 세계학력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핀란드, 핀란드 하면서도 정작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배우지 않았다. 아니, 정책입안자들이 도입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원점이다.

 

발트해를 건너며

혁신교육을 꿈꾸었다고 한다. 이들은 단지 꿈이 아니라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혁신교육은 꿈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어야 하고, 혁신교육의 성패는 우리의 생존과도 직결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인식이 없다면 혁신교육은 지지부진, 유야무야되고 만다.

 

오산시라는 혁신교육특구가 된 지역에서 국회의원, 시의원, 시청직원, 그리고 학교장, 교사들로 구성된 사람들이 이 발트해를 건너며 교육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고, 우리나라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돌아왔단다. 이들은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하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교육 견학을 하고 왔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하지만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되는 지금

과연 혁신교육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오산시가 속한 경기도는 어느 정도 성공사례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보아도 좋겠다. 그런데 이것이 전국적으로 퍼지지 않고 있다. 물론 이를 교육감의 차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겠으나, 이들이 견학하고 온 북유럽은 특정 지역에서만 성공한 것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거의 비슷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다. 왜? 교육과학기술부 문제인가? 이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정부기구인지... 오히려 혁신교육의 발목을 잡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혁신교육이 성공하려면 정말로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이 책을 꼼꼼이 읽어봐야 한다. 이 책에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지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우선 어떤 평등을 이루어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무상교육이 아니라, 의무교육이다. 이 개념을 명심해야 한다.

 

또 평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에 대한 신뢰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만큼 교사를 불신하는 나라가 있는가? 반대로 우리나라만큼 뛰어난(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뛰어나다고 말해야 하는지는 논외로 하고) 학생들이 교직에 진출하는 나라가 얼마나 되는가? 그럼에도 가장 저평가되고, 가장 인정받지 못하고, 가장 무시당하고, 전문가라는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는 존재가 교사 아니던가.

 

이 책에는 교사에 대한 신뢰를 많이 이야기한다. 혁신교육의 처음이자 끝은 바로 교사에 대한 신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신뢰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교육당국이 교사를 교육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함께 가려는 모습을 보일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세상에 교육당국에 무시당하는 교사를 어떤 학부모가 인정을 하겠는가 말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 미래를 여는

그런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북유럽의 사례들이 도움이 많이 된다. 그렇다고 북유럽에만 의존하면 안된다. 이미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의 전통교육에서도 이런 부분을 실현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즉 혁신교육은 생뚱맞은 외국의 교육이 아니라, 우리도 이미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었던 교육이라는 얘기다.

 

연암의 말인 '법고창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온고지신'이라고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다양한 외국의 사례들, 그리고 미래의 필요들을 조합하면 혁신교육은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아니, 혁신교육은 현실이 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하는 이번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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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생태시 교육
김성란 지음 / 제이앤씨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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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인정받는 사회. 신동엽의 '산문시1'에서처럼 대통령이 시인을 찾아가는 사회.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한 편의 시를 낭송할 수 있는 사회. 그러한 사회는 아마도 감수성이 풍부한 사회이리라.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아우르며 살아가는 그런 사회이리라.

 

그런데... 대부분 우리나라 학생들은 국어시간에 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는 답이 딱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시험공부하기 힘들다는 이유가 중심이 되는데.

 

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시험을 위해 머리로 암기하려고 하다보니,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이 되는 시를 학생들이 어려워하고 싫어할 수밖에 없다.

 

시는 그러면 안되는데.. 그냥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다음에 해석을 해도 늦지 않는데...

 

너무도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에서 시는 느리게 살아가는 대표적인 모습을 지닌 문학이리라.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빠르기보다는 느리기를 선택할테고, 나만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는 눈을 지닌 사람이고, 또 다른 존재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지닌 존재이리라.

 

그런 시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교육, 그것이 시교육이어야 할텐데... 그 중에서도 생태시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대부분의 시가 그렇지만 특히 더)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 시이기 때문에 요즘 같은 기술문명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생태시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겠다.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생태시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이렇게까지 반생태적인 사회의 모습을 지니지는 않게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시를 분석하여 그 중에서 생태시라 부를 수 있는 시를 골라내고, 이 중에서도 나희덕의 '배추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어떻게 생태시를 교육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사범대에서 국어교육을 배우는 학생이나 현직 국어교사들에게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시에 관심이 있고, 이를 남들과 공유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겠다.

 

단지 시를 감상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시와의 비교, 또 다른 사람과의 토론, 그리고 비평문 쓰기까지 종합적인 교육이 가능하다고, 그렇게 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어, 구체적인 생태시 수업의 모형으로 유익하겠단 생각이 든다.

 

교육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시를 읽고 사랑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시가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야 하겠지. 그것은 바로 시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발견했을 때 더 효과가 있을테고, 이런 면에서 생태시는 우리에게 시와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생태적인 삶. 결코 어렵지 않은 삶이다. 시를 통해서도 충분히 익힐 수 있는 삶이다. 생태시를 읽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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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는 학교 신나는 아이들 - 선구적 교육혁신 사례를 통해 살펴보는
밀턴 첸 / 타임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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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가 한국 교육을 부러워한다고 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이 사람, 정말 한국 교육에 대해서 알고 하는 말이야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리고 코웃음을 치고 말았는데...

 

이 책에도 가끔 한국 교육에 대해서 나온다. 교사의 질을 이야기할 때, 한국의 학생들은 상위 5%이내에 들어야 교육대에 진학한다는... 수치로 보면 너무도 자랑스러운, 그러나 내막을 알고나면 너무도 씁쓸한...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

 

이 당연한 말을 우리는 너무도 무시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외국에서 말하듯이 상위 5%안에 드는 뛰어난 학생들이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대나 사범대에 가는데, 그 중에서도 임용고사라는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만이 교사로 임용이 되는데, 우리나라 교사들의 수준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우리나라 교육은 학원에 넘기고 학교는 탁아소나 친구들 만나는 사교의 장소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소리가 나오고, 교사는 결국 아이들을 특정한 시간까지 맡아두었다가 별다른 사로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맡은 보모이지 않은가 하는 소리가 넘쳐나고 있는 이 나라 교육을 부러워하다니...

 

미국이나 우리나 교육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높은데, 실효성을 거둔 교육정책은 없나 보다. 이 책을 보니 미국도 벌써 20여년 전부터 교육개혁의 목소리가 높았고, 또 방법론도 많이 제기되었나본데, 현재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을 이끌고 있는 대통령의 입에서 한국을 본받자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그 많은 미국 유학파들에 의해 미국교육을 따라가야 한다고, 배우자고 하는 소리가 드높은데 말이다.

 

학교 현장에서는 북유럽이나 또는 일본의 배움의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면 교육정책입안자들은 미국식 자유경쟁교육에 더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형편 아니던가?

 

그래서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추구하고, 그것으로 평가를 하고, 교사나 학교를 순서지우고 차등 지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전국의 학교들을 줄세우기 위해 일제고사를 보고 말이다. 또 이 결과를 가지고 학교 평가를 하고 있으니... 세상이 참...

 

이런 미국에서 오래 전부터 교육개혁에 대해 나온 주장을 알기 쉽게 정리해서 낸 책이다. 단지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는개혁에 대한 방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찌보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어찌보면 쉬운 일인데... 사실 진리는 단순함 가운데 있지 않은가.

 

6가지 처방을 내리고 있다. 처방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고, 그렇게 한 결과들이 성공적이었음을 사례를 제시하며 보여주고 있다.

 

처방은 별 게 아니다. 사실 교육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그러한 처방들이다. 다만 이를 얼마나 뚝심있게 밀고나가느냐다.

 

. 학습에 대해 좀더 현명하게 생각하라.

. 진정한 학습과 참 평가를 실시하라.

. 최신 도구를 학생에게 주어라.

. 언제, 어디서나 배울 수 있게 하라.

. 교사, 전문가, 학부모는 서로 협력하라.

. 디지털 학습자들을 생각하라.

 

다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이기에 실천해야 하는데... 왜 아직도 미국에서도 이 일이 실천되지 않았을까 의문을 던져 본다. 무언가 걸림돌이 있다는 얘긴데... 그 걸림돌이 무엇일까?

 

교사일까? 아니다. 이 책에서도 아니라고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처방에 앞서 무엇보다도 교사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교사들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교육을 하더라도 교사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관계를 맺어줄, 사람으로서 격려를 해줄 온기를 지닌 교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되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우선 교육 주변의 환경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첨단 기술의 시대에, 교육은 시대를 뒤따라가지 말고 시대를 앞질러가야 한다고 하는데, 학교 현장에 들어온 기술기기들은 이미 한물 간 것들이 많다. 그것도 달랑 교실에 한 대씩.

 

이 책에서는 학생 한 명당 컴퓨터 한 대씩은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예산 타령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투자라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약간의 투자라고 하는데...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것을 실현한 주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얘기다.

 

예산과 교육에 대한 고정관념, 관료들의 행정편의주의 등등 여러가지가 아직도 교육개혁을 부르짖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늘 남탓만 할 수는 없는 일. 이 책에 나온 말대로 좋은 것들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번져 나간다고 한다.

 

교육개혁은 결국 교사들로부터 시작하여 학생들로, 그리고 학부모들로 번져가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장에서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교사들을 격려해야 한다. 그들로부터 교육개혁은 번져나갈테니 말이다.

 

이런 과정을 조급해 하지 말고 길게 여유를 가지고, 또 믿음을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를 우리들이 지닌다면... 교육개혁은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우리 눈 앞에 확 나타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러면 이책의 제목처럼 "살아나는 학교, 신나는 아이들"이 될테고, 우리나라는 행복이 넘치는 나라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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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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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은 죽었다"라는 말만큼이나 도발적이다. 신을 광범위하게 믿고 있던 시대에 니체가 던진 이 말은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을텐데...

 

신의 존재 증명과 더불어 인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느냐 하는 문제도 역시 계속되는 논란거리다. 어떤 이는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일뿐이라고 하고(일원론), 어떤 이는 인간은 물질과 정신으로이루어졌다고 하고(이원론), 이 중에서도 물질(육체)가 더 큰 작용을 한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 정신(영혼)이 더 큰 작용을 한다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옳은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통하게 되는데, 사후세계에 대한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또는 죽음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과도 통하는 해결하기 어려운, 어쩌면 해결할 수 없는, 또는 해결해서는 안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비슷한 질문이 더해졌다. "자유의지는 없다"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일뿐이라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은 당연한 주장에 불과하리라. 인간의 모든 행동은 뇌 활동의 결과이며, 뇌 활동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결합되어 이루어지고,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가 정신이라고 하는 생각하는 활동도 이루어진다고 하니, 우리의 생각, 의지, 행동은 결국 뇌의 활동을 밝히면 되는 일이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행동을 고칠 때, "그건 네 의지에 달렸어."라는 말보다는,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활동했느냐를 따져 뇌를 치유하면 된다는 주장, 그것이 인간은 물질적 존재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니,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다.

 

반면에 인간은 정신적 존재라고 하는 사람들, 아니면 정신이 더욱 큰 작용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은 말도안되는 주장이 된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문명을 이루었으며, 자기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능력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질문이다. 그리고 어떤 대답을 해도 반론이 들어올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인 해리스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의 저변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리고 또 알 수 없는 어떤 원인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결과는 같지만 제시된 원인이 달라짐에 따라 우리는 판단을 다르게 하게 되는데... 자, 그 결과를 이루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원인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무언가 답답하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은가. 무슨 행동을 해도 그것은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 어떤 원인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일 뿐이라는 얘기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범죄자는? 그는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그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이렇게 가다보면 회의주의에 빠지고, 반도덕적, 반사회적으로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자유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하도록 조건지워진 인간의 행동일 뿐이라고 한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사회가 더 도덕적이고 협동적일 수 있다고 한다. 왜냐고? 인간에게 "넌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어."라고 얘기하기 보다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란다. 즉, 사람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때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된 환경을 조정함으로써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면 타당하기도 하지만...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그 사람들은 그런 환경을 조성하려고 할까? 그들은 우연히 그러한 환경에서 지냈고, 그러한 환경이 자신의 생존, 생활에 더 좋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인가?

 

결국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비슷해지는 결론으로 가는 건가? 이기적 유전자도 한없이 이기적이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이타적일 수밖에 없다는, 그리고 단편화되고 파편화된 작은 유전자에서 통합적인 유전자체로 존재하기도 한다는. 여기에는 어떤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가 없다는.

 

책의 논리를 따라가면 책이 논리에 수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책의 내부에서 그 길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가끔 책의 바깥에서 그 책을 바라보면 안 보이던 길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길이 어떤 길인지도 판단할 수도 있고.

 

자유의지가 없다는 이 논리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물질로 둘러싸여 생활한 사람은 과연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까? 성범죄자의 화학적 거세, 사이코 패스의 뇌수술, 복제인간 문제, 또는 유전자로 그 사람의 질병, 반사회적 활동을 판단하는 문제 등에 어쩌면 이 책은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 말은 이러한 문제를 이 책의 저자도 의식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의지의 주술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정확히 유용함의 정도에 따라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변할 수 있는 지점에서는, 그들에게 변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변화에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점에서는,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자신과 사회를 개선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자연의 힘과 더불어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힘을 쏟을 대상은 다름 아닌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이 책 79쪽)

 

이 말은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지 말아라. 책임은 사회에도 있다. 즉,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병행하면서 개인에게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자유의지는 없다는 말을 좋게 해석을 하면 더 좋는 사회를 위해서는 개개인의 의지에 호소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아니, 그렇게 듣고 싶다. 이건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샘 해리스의 이 책 주장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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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 원자폭탄의 창조자이자 파괴자이고 싶었던 두 천재 이야기
실번 S. 슈위버 지음, 김영배 옮김 / 시대의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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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인슈타인이야 워낙 알려져 있어서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다못해 우리나라 광고에까지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천재의 대명사다. 그리고 천재란 말 속에는 일반 사람과는 다른 모습이 담겨져 있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아는 사람만 아는 과학자다. 그가 원자폭탄 만들기의 책임자(이 책을 읽다보면 그는 책임자라기보다는 군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로서 큰역할을 한 사람이다. 양자역학 쪽에서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그의 과학적 업적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과학 쪽으로는 그의 개인적인 업적은 다른 위대한 과학자들에 비해 그리 내세울만하지 않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에 비하면 더더욱.

 

그럼에도 둘을 비교하는 책을 내었다. 무언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데...이들은 원자폭탄과 관련이 있고, 또한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물리학자라는 사실과 또한 한 때 함께 일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관련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넘볼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냈다는 사실도.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둘은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집단으로 연구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활동하기를 좋아한 반면,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 쪽에 서 있었고, 개인적인 연구보다는 집단지성을 옹호하고 추진하는 편이었다는 점에서 상반된 입장에 선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에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오펜하이머는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관점(특히 더 권위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자폭탄 이후 둘의 행적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선명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반핵운동에 앞장서지만,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과는 다른 방향에서 운동을 한다.

 

즉 통합이론을 확립하려는 아인슈타인이 개인적인 행동에서도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이며 살았다면, 오펜하이머는 통합이론을 인정하지 못하듯이 자신의 행동에서도 여러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이를 저자는 세가지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물리학자로서, 고등연구소 소장으로서, 공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일관성으로 자신의 삶을 이어나갔다면, 오펜하이머는 상항 속에서 자신을 형성시켜나갔다고 할 수 있다.

 

누구의 모습이 더 좋다는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다만 둘 다 끊임없는 지적 욕구를 지니고 있었으며,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즐겨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분야든, 다른 사람의 분야든 소통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과 더불어 이들은 과학자이지만 철학, 윤리적인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요즘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과학이라는 틀에만 얽매여 있다면 더이상 과학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어쩌면 오펜하이머 자신도 자조하듯이 기술자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생각할 수 있다.

 

난해한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 대신에 이 두사람에 대해서 쓰고 있어서 읽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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