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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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제가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번역을 했으면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주인공의 이름이 후안 벨몬테인데, 이는 유명한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작중에서 이름을 댈 때마다 사람들은 투우사의 이름을 들먹인다.


주인공이 왜 투우사의 이름을 같고 있을까? 투우가 무엇인가? 소와 정면으로 맞대면해서 결국 소의 등에 창(칼)을 꽂아 소를 죽이는 일을 하는 일 아닌가. 요즘은 동물학대라고 해서 많이 비판받고 있는데, 그 점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투우는 한쪽의 목숨을 건 대결이다. 물론 사람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한쪽이 당하는 일. 결과가 잘 바뀌지 않는 일.


그렇다면 귀향은 무엇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예전의 생활을 되찾는 일까지 포함한 장소의 이동이 귀향이라고 한다면, '귀향'도 쉽지 않다. 소설 속 벨몬테 역시 제대로 된 귀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배경은 독일과 칠레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나라가 '나치'에 의해 연결이 된다. 나치 부역자들이 남미로 많이 피신을 했었으니,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소설은 이 두 나라를 연결짓는 고리로 나치 시절에 금화를 훔쳐 달아난 독일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나치 치하에서 경찰이었지만 나치에 동조한다고는 할 수 없다. 나치가 숨겨둔 금화를 훔쳐 달아나려 한다. 어디로? 남미로...칠레로...


하지만 이들은 성공 단계에서 한 사람만 빠져나가고 한 사람은 잡히게 된다. 잡힌 사람이 끝까지 동료의 행방을 불지 않고 세월은 흘러 흘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사건은 다시 시작된다. 이 금화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을 고용한다.


그러니 소설은 두 축으로 시작한다. 금화를 가운데 두고 이를 찾기 위해 나서는 나치와 관련이 있는, 아니면 구동독 정보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금화를 찾으려는 보험회사. 


갈린스키가 구동독 정보부를 대표한다면 벨몬테는 보험회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갈린스키가 구동독 정보부를 대표하는 것은 맞지만 벨몬테는 보험회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귀향을 꿈꾸기 때문이다.


남미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게릴라 출신인 벨몬테. 그는 고문으로 말을 잃은 베로니카를 치료해준다는 조건에 일을 맡고 나선다. 그에게는 금화를 찾는 일은 귀향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귀향하는 곳이 독일이든 칠레든 아니면 그가 조건으로 내건 베로니카를 치료할 수 있는 덴마크 건 그것은 상관이 없다.


즉, 갈린스키에게 금화는 자신의 옛 영화를 대변하는 존재라면, 벨몬테에게 금화는 베로니카와 함께 귀향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금화를 사이에 두고, 이들은 투우처럼 대치하게 된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승자를 예측할 수 있다. 벨몬테가 승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의 귀향이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칠레가 민주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민주화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점을 세풀베다는 벨몬테를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국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분 명 입 밖으로 토해 내지 않았다. 칠레가 민주주의 체제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좋은 길로 나가고 있다거나 , 그 반대로 그 길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53쪽)  


자,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러니 벨몬테의 귀향도 진행 중이다. 그가 베로니카에게 가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고 있는 것은 그의 귀향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사실에서부터 남미의 민주화 투쟁 시기를 금화를 둘러싼 두 인물을 통해서 소설은 긴박하게 전개된다. 


금화를 먼저 찾기 위한 여정, 두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지닌 귀향. 그렇지만 이렇게 긴박하게 진행되는 소설 속에서도 정지된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정지되었다기보다는 이런 쫓고 쫓기는 삶에서 한발 비껴선 이들의 삶.


금화를 숨긴 독일인이 숨어 살던 곳, 그곳에 살던 사람들... 이들은 "그 빌어먹을 것들을 어서 가져가시오."(212쪽)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과거의 금화, 또는 현재의 삶을 더욱 부유하게 해줄 금화는 필요없다. 그들에게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이 더욱 소중하다. 그러니 그 금화를 빨리 갖고 사라지라는 말을 한다.


이들의 구성원이 깜빡깜빡하는 노인이나 듣지 못하는 여인들과 함께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투우처럼 피비린내 나는 일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고 남들을 돕고 사는 사람들. 


세풀베다는 작품의 말미에 이런 삶을 보여준다. 결국 베로니카에게 가면서 벨몬테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벨몬테가 베로니카와 만나는 순간, 그의 귀향은 완성될 수 있다.


'나의 사랑 베로니카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삶 앞에서 왜 죽음의 황금빛 섬광들만 바라보았는지를 생각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213쪽)   


그렇다. 여기서 '투우'는 끝나고 '귀향'이 시작되며 완성된다. 죽음의 황금빛 섬광들을 과거로 여기고 이제는 삶에 충실하려는 모습... 벨몬테가 마지막에 만났던 사람들의 삶 아니던가.


세풀베다의 소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권 읽을 때마다 좋은 느낌을 받는다. 재미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풍성하고...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에 세상을 뜬 세풀베다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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