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블과 함께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마농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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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확 바꿔주는 책이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다른 생물체들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는 시기라서, 이를 인류세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 환경 파괴, 지구 파괴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일이라서 자본세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다. 역시 타당하다.


그런데, 인류세나 자본세에는 현상을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한다. 너무도 거대한 체제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류는 성장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늘 언론에서 접하는 성장률에 관한 기사들을 보라. 성장이 안 되는 인류가 망하는 것처럼 서술된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 인구 감소가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구도 계속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 발상은 성장주의 발상이고, 인류중심주의 발상이다. 이런 관점이 바뀌지 않는 한, 인류세, 자본세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들이 말하는 인류세, 자본세의 틀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끝부분에 실린 카밀 이야기를 읽어보라. 해러웨이는 인류가 계속 늘면 그것은 공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카밀 5세에 가서 인류 인구를 30억으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때 해러웨이는 '쏠루세'를 주장한다.


'사람들이 그것의 일부이고, 그 속에서 지속성이 위기에 처한,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공-지하적symchthonic 힘과 권력을 위한 이름. 어쩌면, 단지 어쩌면, 다른 지구인들과 함께하는 진지한 헌신과 협동적인 일과 놀이가 동반돼야만, 사람들을 포함한 풍부한 복수종 무리를 위한 번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과거, 현재, 그리고 다가올 것으로서) 쏠루세 Chthulucene라고 부르겠다.' (173-174쪽)


즉 시 쏠루세에는 일방이 없다. 무조건적인 조화도 없다. 트러블이 있다.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생성과 파괴도 함께해야 한다. 생성을 위해서 파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쏠루세라는 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비유가 바로 퇴비다. 퇴비는 죽은 것들과 산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다. 이 공존을 통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간다. 바로 쏠루세가 그렇다.


이런 쏠루세를 받아들이면 지금 원인 분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려움과 함께하기 때문에, 실천이 늘 동반된다. 그것도 어느 한 종의 우세로서의 실천이 아니라 여러 종들이 함께하는 실천.


해러웨이의 이 책을 읽다보면 인구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솔닛이 [야만의 꿈들]에서 말했던 원주민들이 불을 질러 나무들을 불태우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본다. 즉, 얽히고 얽혀서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 내는 실뜨기처럼 우리들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과 어울려 살다보면 자연스레 자식이 아닌 친척을 만들게 된다. 즉,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생물학적 자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종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쏠루세'라는 개념에 들어있는 실천이고, 해러웨이가 말하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다. 바로 퇴비의 삶이기도 하고.


다양한 종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터무니 없는가? 아니다. 우리는 예전에 다양한 종들과 함께 살아왔다. 하다못해 귀신, 정령들과도 함께 살아오지 않았던가. 즉, 삶과 죽음이 함께하고, 다양한 종들이 함께 했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봐도 말하는 동물들이 나오고, 나니아에서는 모든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또 [샬롯의 거미줄]을 보라. 어린 시절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던 시절이 있다. 그것을 스스로 삭제하고 살아온 것이 현대인들의 삶, 즉 인류세와 자본세를 살아온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라는 장소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살기 힘든 장소가 될 테니... 해러웨이의 글들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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