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묻다
채운 지음 / 봄날의박씨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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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예술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부터, 예술은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그리고 결국은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간다.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물음에 대한 답은 결국 예술은 우리 삶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라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질문을 하는 예술은 예술 자체로만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하지 않고 어떤 관계 속에서 빛을 발할 수도 어둠에 묻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술에서 빛을 찿아내는 역할, 그것을 바로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을 묻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기존에 갖고 있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묻을 수 있다.


즉, 이 책은 묻는(질문하는) 행위와 묻는(매장하는) 행위가 예술에는 다 필요하다고 한다. 예술이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기존에 갖고 있던 틀을 깨도록 하는 일. 그 틀에 갇힌 삶은 묻힌 삶이다. 이 묻힌 삶에서 나오도록 묻는 행위를 하는 역할, 예술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술을 묻다라는 말은 네 삶이 어떠냐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틀을 깨는 일, 틀에 안주하게 하는 일, 예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하고 질문을 하면, 틀을 깨는 일을 하는 예술이 좋은 예술이라고 한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판이 없다는 것. 도판 대신 큐알 코드가 있는데, 해당 작품을 보려면 큐알 코드를 읽는 장치를 대어야 한다는 점이 귀찮기는 하지만, 대신 더 자세히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한 작품들을 통해서 예술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으니, 이 책을 읽으면 각 작품에 대한 해석보다는 예술 전체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하게 될 수 있다.


예술을 묻는다는 말은 결국 삶을 묻는다는 말이 되니, 기존에 살아왔던 삶을 묻고, 새로운 삶에 대한 물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술을 통해 삶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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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갈 땐, 주기율표 - 일상과 주기율표의 찰떡 케미스트리
곽재식 지음 / 초사흘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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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외우기 싫어서 포기했던 화학. 

구구단은 어떻게 어떻게 자연스레 외워졌는데, 지금도 구구단은 잊어버리지 않고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데, 주기율표는 왜 외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주기율표가 왜 중요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기율표보다는 화학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몰라서이기도 했다.


화학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면서 화학의 기본이 되는 주기율표를 이해할 생각을 못했으니, 화학은 점점 나와 멀어질 뿐이었는데...


최근에 화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으면서 주기율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게 됐다.


여러 사람, 여러 시대를 거쳐 주기율표가 계속 보충되고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나트륨(Na)이 소듐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칼륨(K)이 포타슘으로 플루오르(F)가 플루오린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화학협회에서 명칭을 바꾼 이유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을 쓰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쓰는 용어를 쓰는 것이 더 편하다고 여겨서였을까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 바뀐 명칭들을 더이상 헷갈리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이 책, [휴가 갈 땐, 주기율표]를 만났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원소 기호 외우지 않아도, 주기율표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 순서가 생각나도록 되어 있다.


총 20개의 원소, 아니 주기율표 20번째까지만 다루고 있는데, 첫번째인 수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인 칼슘으로 끝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로 하는 이 원소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하나의 원소가 다른 원소들과 결합할 때 어떤 물질이 되는지, 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우리 생활과 관련지어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화학에 대해서 나처럼 싫어하던 사람도 재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20번째 원소 주기율표를 보자. 그리고 각 원소에 우리 생활의 어떤 것들과 연결지어 놓았는지도 보자. 정말, 우리 생활 자체가 화학임을 이 주기율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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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06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쓰는 작가예요
이렇게 배웠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

kinye91 2023-02-06 15:5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과학을 일상과 관련지어 잘 알려주고 있어서 좋았어요.
 
노예 12년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67
솔로몬 노섭 지음, 원은주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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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노예 해방이 된 지 100년이 넘었다. 흑인 대통령이 미국에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거의 노예 해방 선언이 된 지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버스에서 흑백 차별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과연 지금 미국에서 흑백 차별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 있나?


흑인들이기때문에 느끼는 위협이 아직도 있지 않을까? 미국이 민주주의의 모범인 나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경제적 불평등은 말하지 않더라도 피부색에 따른 차이,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은 흑인을 차별하던 시대에서 얼마나 멀리 왔을까? '헬프'나 '히든 피겨스' 또는 '그린북'같은 영화가 여전히 상영되는 이유는, 흑인 차별이 과거의 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여전히 보이지 않게 흑인을 차별하는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행하는 일을 반성하자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면으르 보면 과연 미국은 흑인을 차별하던 그 부끄러운 과거를 얼마나 극복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그들은 그 부끄러운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국을 만들었을까? 미국이 강대국이 된 이유는 흑인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과 기여가 있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노동, 보이지 않는 역할, 이것으로 인해 미국 사회는 지금 세계 최강국이 되었고,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올라섰음에도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화신인양 행동하고 있다.


자신들이 누리는 민주주의에 흑인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잊고서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미국에서 또 전세계에서 계속 읽혀야 한다. 흑인들이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를, 백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한다. 마찬가지로 노예를 착취하던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홀로코스트가 몇 해동안 일어난 일이라면 흑인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한 시기는 100년을 훌쩍 넘어서기 때문이다.


인간을 피부 색깔만으로 인간이 아닌 동물처럼 대한 역사. 자유인임에도 불구하고 납치되어 노예로 12년을 살아야 했던 솔로몬 노섭. 그가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는 백인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백인들의 도움은. 이 책을 읽어보면 그가 노예상인들을 고소했지만, 법정에서 그는 진술할 권리도 얻지 못한다. 오로지 백인들만이 진술한다. 그리고 노예상인들이 백인이므로 그들의 진술이 신빙성을 얻어 그들은 처벌받지도 않는다.


분명 납치되어 노예 생활을 12년 동안 했음에도 솔로몬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단지 책을 한 권 내고 유명인사가 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뒤에 실린 약력을 보면 더 기가 막힌다. 그후 그의 삶은 알려지지 않았다. 실종되었다고 하는데... 자유인으로 태어나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흑인이지만, 그는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모든 백인이 다 악인은 아니라고 한다. 착한 주인도 있었다고 쓰여 있다. 당연하다. 흑인을 차별하는 시대에 자유인에서 노예로, 다시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온 그가 책을 쓸 때 과연 백인이 모두 나쁘다고 쓸 수 있을까?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 북부 미국이라고 하지만, 그 곳에서도 흑인은 백인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책에 모든 백인은 나쁘다라고 쓴다면 과연 그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노예제를 인정하고 노예를 부리는 틀 안에서 착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단지 노예를 인간적으로 대해줘서? 그것이 인간적으로 대해줬다는 것인가?


그들이 노예를 인간으로 생각했다면, 이 책에 나오는 백인 배스처럼 노예제를 반대해야 한다.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대우를 받아야 했던 흑인들. 그들을 거의 100년 넘게 노예로 부렸던 미국인들... 그들은 과거를 반성하고,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하고 있는지, 과연 지금의 미국은 노예제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노예제도 있지만, 현대 세계는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지 않나. 옴짝달싹 못하게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도. 그런 제도를 인식하고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이 책은 단지 과거 노예제의 문제점만을 말하고 있는 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 시대의 노예제처럼 사람을 힘들게 하고 착취하는 제도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야말로 덧붙이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건 바로잡아야 한다. 20쪽. '쿼드룬'이라는 말에 대해 옮긴이 주가 달려 있는데...

쿼드룬(흑백 혼혈인 물라토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나 흑인의 피가 사분의 일 섞인 인종-옮긴이)라고 되어 있다. 

단순히 생각해 보자. 물라토(흑+백)+흑인(흑+흑)이라면 흑인의 피가 사분의 삼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물라토와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흑인의 피가 사분의 일이 섞였다는 계산이 된다.

내가 읽은 책이 2014년 초판 1쇄 책이니, 아마 그 후 판본에서는 수정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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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2-02 15: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읽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도 미국 흑인 노예 스토리네요 그들이 과연 인간이기나 했는지 진정 묻고 싶네요... 보다가 가슴이 답답해져서 진도가 잘 안나가요. 그래도 결국 자유를 찾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kinye91 2023-02-02 17:21   좋아요 1 | URL
과거 노예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사람으로 인정했다면 그렇게 대우할 수가 없었겠죠. 이 책은 노섭이란 사람의 경험담인데, 지금 미국을 보면 그때로부터 흑인들이 얼마나 나아진 생활을 하는지 의구심을 갖게 돼요. 예전 흑인들의 삶을 다룬 책들을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지죠. 그래도 읽어야 기억하고,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오웰의 장미 -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리베카 솔닛 지음, 최애리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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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릭 아서 블레어(39쪽)에서 조지 오웰로


조지 오웰은 잘 알려진 작가다. 두 소설이 특히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동물농장] 또다른 하나는 [1984]. 이 소설들 외에도 [카탈로니아 찬가]도 많이 읽혔다. 그리고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나는 왜 쓰는가] 등도 제법 읽혔다고 할 수 있고.


전체주의에 반대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글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 작가. 그 정도다. 오웰은.


오웰 본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나에게는 에릭 아서 블레어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즉, 작가 조지 오웰은 존재해도, 그가 태어나서 자신의 집안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불리는 에릭 블레어란 이름은 내겐 존재하지 않는다.


한 집안의 작가가 아니라 그는 세계의 작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가로 존재한다. 오웰이라는 이름이 영국에 있는 오웰 강에서 따왔다는 사실도, 또 오웰적인(Orwellian)이라는 말이 있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오웰 작품을 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오웰의 한 면만을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책 끝부분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 내 감정을 대변한다.


‘이전에 오웰은‘시대의 양심’이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위대한 작가라는 데 동의하기는 해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작가였다. 그런데 이번 작업을 통해 알게 된 오웰은 감동적이었다.’(377-378쪽)


오웰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든 책이라는 점에 나도 동의한다.


2. 베카 솔닛


한마디로 믿음이 가는 작가다. 오웰의 글쓰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다. 솔닛 역시 마찬가지다. 솔닛의 글은 정치적이다. 우리 사회와 떨어지지 않는다.


솔닛은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다. 단순히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그런 사회 변화를 이루는데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언어를 통해서 거짓과 기만이 자리를 잡기도 하고, 언어를 통해서 거짓과 기만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늘 언어를 독점하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목적이 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목적. 그 언어 이면에 담겨 있는 목적을 알아채고 그것을 깨뜨리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가 바로 솔닛이다.


그렇다고 솔닛 글쓰기가 일방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단순한 구호로는 화려하게 수식되어 감춰진 허위를 밝혀낼 수 없다. 밝혀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글은 우선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영향을 주기 위해선 읽혀야 한다. 글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사람들이 읽을 만하다고 여겨야 한다. 그런 글쓰기, 솔닛은 하고 있다.

솔닛은 말한다. 오웰이 그런 작업을 했다고.


3.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이 책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때 한 작가는 조지 오웰이다. 그리고 그가 심은 장미는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우리가 흔히 ‘빵과 장미’라고 할 때 빵이 단순한 빵이 아니고, 장미가 장미를 넘어선다는 점을 알고 있듯이.


물론 오웰이 심은 식물은 장미다. 그리고 그는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또 식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글을 쓴다.


세계가 격변에 처해 있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기쁨을 찾아낸다.


이 기쁨,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요소다. 우리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긴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삶에는 아름다움이 따른다. 이 아름다움이 기쁨을 불러오기도 하고, 삶의 희망을 불러오기도 한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인 [1984]를 다시 읽으면서 솔닛은 이 소설에서 오웰이 표현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읽을수록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다. 의미가 하나만 담겨 있지 않은, 수많은 의미로 해석이 되는 소설들. 솔닛은 리좀이라는 말을 빌려온다. 어디로 벋어갈지 알 수 없는 상태. 그러나 많은 곳으로 분기되어 나가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존재들.


오웰 역시 마찬가지다. 오웰은 전체주의를 비판한 소설가로만 규정될 수 없다. 그는 사람이 기쁨을 얻으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원했다. 획일적인 사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규제하는, 그렇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해야지 하는 규정이 많은 사회는 바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세상,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이 지닌 성향은 인정하는, 그러한 삶이 바로 사람들의 삶이라고 한 사람.


그래서 솔닛은 이 책을 쓰면서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로 시작한다. 이미 오웰에게서 우리는 빵을 너무도 많이 얻었으므로. 오웰에게도 장미가 있음을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보여준다.


어느 곳을 펼쳐도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들이 있다. 가령 이런 구절들.


‘거짓말은 앎과 연결의 능력을 잠식한다. 앎을 차단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거짓말쟁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박탈한다. 정확한 정보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에 참여하기 위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기 주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상황을 알기 위해,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수적인데 말이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아는 것과 거짓말의 희생자가 아는 것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 (296쪽)


소위 말하는 황색언론이 하는 일. 그리고 그런 황색언론을 부추기고 지원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정치인들. 귀는 막고 입만 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들을 전체주의로 가고 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행복과 기쁨의 차이는 중요하다. 행복은 마치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다. 행복은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을 요구하는 듯한 데 비해, 기쁨은 어디서든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72쪽) ... 행복이 의존을 유도하는 마취제로 사용되는 반면, 기쁨은 사람들이 그 의존성에서 탈피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행하고 느끼는 능력의 성장이다.’(칼라 버그먼과 닉 몽고메리의 글을 인용. 73쪽)


기쁨은 이렇게 어떤 순간에도 느낄 수 있다. 그런 기쁨을 느끼는 삶을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웰이 추구한 삶도 행복하고 안락하게 오래 사는 삶이 아니라, 삶의 순간 순간 기쁨을 느끼는 충만한 삶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는 힘든 상황에서도 장미를 심는다.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다.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인 면에서 손을 떼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 기쁨(아름다움)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함께 존재했다. 솔닛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면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 심기를 대부분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오래가는 행위로 제안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해, 어떻게 하면 미래에 기여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장미를 심은 남자는 그것이 또한 미래의 편에서는 일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05쪽)


이런 말을 통해서 솔닛의 오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오웰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전체주의가 자유와 인권뿐 아니라 언어와 의식에까지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적시하고 묘사한 것이다. 그의 작업이 너무나 강한 설득력을 지녔으므로,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현재까지도 그림자를, 아니 봉화의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과를 더욱 풍부하고 심오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작업에 불을 지핀 연료, 즉 그의 이상주의와 헌신이다. 그가 소중히 여기고 욕망했던 것, 욕망 그 자체와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긍정적 평가, 그리고 그것들이야말로 전체주의 국가와 영혼을 파괴하는 그 침식력에 반대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그가 한 일은 이제 우리 각 사람의 일이다. 그건 항상 그랬다.’(359-360쪽)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솔닛이 하는 말.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쓸데없는 걱정


설마, 이 책을 읽은 무수한 정치인들이 장미를 심지는 않겠지. 그들은 지금도 무슨 건물 앞에, 공원에 자신의 이름을 단 기념식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오웰이 행한 방식과는 반대로. 그들은 미래의 편에 서기 위해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무를 심는다. 


아니, 미래에도 자신들이 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심는다고나 할까. 이들의 나무심기는 그래서 오웰의 장미 심기와 다르다. 그걸 같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무를 심는 행위는 좋다. 그 나무는 적어도 환경 오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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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01 1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의 힘이 미약하다고 느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때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레베카 솔닛의 글 안에서 오웰과 장미 나름 아름다운 조합이란 생각이 드네요^^

kinye91 2023-02-01 12:33   좋아요 3 | URL
앞이 보아지 않는다고 여길 때 오웰이 장미를 심고 돌보았듯이 무언가를 한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솔닛의 글이 참 좋은데 이 책도 아주 좋았어요.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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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7쪽)로 소설은 시작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다. 우리말 문장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졌다. 주어와 서술어를 꾸며주는 말이 없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수식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이 간단한 문장에 여러 수식이 들어갈 수 있다. 여러 문장이 들어갈 수 있다. 소설은 그렇게 많은 문장들이 이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의 일들을 말해준다. 수많은 사건들과 수많은 감정들. 


그러다 소설은 첫문장의 주어인 아버지를 꾸며주는 말로 끝난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265쪽)


결국 죽은 사람은 어떤 수식어로 지칭되는 사람이 아닌, 그의 삶이 어떻더라도 내게는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즉, 다른 수식어로 불리던 아버지가 그 많은 수식어를 지니고 살아온 나의 아버지였음을 깨닫는 과정을 이 소설이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제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인데, 소설은 아버지가 해방이 되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삶들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서술자의 기억을 통해 듣는 과정이 전개되지만, 결국은 바로 서술자 자신이 해방되는, 아버지를 규정하고 있던 수많은 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소설 첫문장인 '아버지가 죽었다'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 신념, 평가 등을 다 떨쳐내고, 내가 규정했던 아버지가 죽었음을, 이제 내게서 그런 아버지가 떠나가고 그 모든 것을 지닌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왔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어떤 삶이 나를 구속하고 있었을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어떤 해방을 찾으려고 했을까? 바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이다. 이념으로 갈라진 우리나라 현대사가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고 있었는지를 이 소설은 아버지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의 삶이 아닐까? 아버지는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니까 겪게 되는 일일 뿐이라고 한다. 사람이닝께란 말. 이 말로 아버지는 자신의 이념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 한다. 


읽으면서 손을 뗄 수가 없게 되는데, 아버지의 삶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해가는 서술자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감춰졌던 진실들이 드러나고, 또 현재 우리나라 현실도 함께 드러내면서 소설은 아버지의 삶이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문장의 간결함을 메워주는, 자주 나오는 부사어가 있다. 하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하나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삶과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을 수식해주는 말을 찾으라면 나는 '하염없이와 항꾼에'를 찾겠다.


하염없이 : 1.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2.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로


어떤 의미여도 상관없다. 이 소설에서는 비슷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빨치산 투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삶은 바로 이런 '하염없이'라는 부사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가족을 잃고 또는 기다리면서 또는 그 가족으로 인해 사회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갔던 수많은 민중들의 삶을 표현하라면 바로 이렇게 '하염없이'라는 말로 꾸며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염없이'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장례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좌파, 우파 가릴 것이 없다. 여기에 이주민의 아이까지 나오니,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 하는 자리가 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빨갱이였던 아버지의 죽음에 보수와 진보, 그리고 이주민까지 함께 하는 모습.


소설은 이렇게 '하염없이'로 끝나지 않는다. 서술자가 아버지를 꾸미는 많은 말들을 떼어놓고, 아버지,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순간, 여태까지 아버지를 꾸미고 있었던 수많은 수식어들은 버려야 할 수식어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 속에 들어가 있는 말이 된다. 


그냥 그렇게 꾸미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바로 아버지였고, 나의 아버지였음을 서술자는 깨닫는다. 그 말을 이 소설에서 찾으면 '항꾼에'라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함께'라는 말의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함께 한다.


이 소설에는 이 '항꾼에'가 많이 나온다. 그렇게 함께 하는 삶.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도 여러 모습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고, 그 다양함이 바로 사람임을, 삶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재단하고 받아들일지 멀리 할지를 결정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돌아와 빨갱이라고 감옥생활까지 한 아버지의 삶은 바로 이 '항꾼에'에 담겨 있다.


아버지가 원하는 세상도 바로 그런 세상이었을 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잡고 아버지를 추모하는 모습. 그런 아버지의 유골을 아버지의 흔적 곳곳에 뿌리는 서술자, 자신들의 머리 위로 뿌려지는 유골의 모습에서, 아버지는 어떤 수식어 하나로 재단할 수 없는 그 모든 수식어가 '항꾼에' 담겨 있는 사람임을, 그런 삶을 살았음을 서술자는 깨닫게 된다.


우리 역시 소설을 읽으며 그 점을, 지금까지 '하염없이'처럼 의지와 의식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항꾼에'와 같이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의 전환. 그 전환에는 바로 어떤 특정 말로 사람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다양함이 함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설의 뒷부분에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쪽)


'어쩐지 아버지가 여기,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우리와 항꾼에.'(263쪽)


이 문장들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은 바로 이렇게 또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이고, 한면만 보이던 아버지의 다양한 면이 보이고, 그런 면이 모두 아버지였음을 깨닫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라고 했지만, 결국은 나의 해방일지로 나아간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닫혀 있던, 하나라고 믿고 있던 세계에서 열린 세계, 다양한 세계로 함께 나아갔으니까.  


재미있게 그러나 감명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이런 좋은 작품 앞으로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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