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의 장미 -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리베카 솔닛 지음, 최애리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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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릭 아서 블레어(39쪽)에서 조지 오웰로


조지 오웰은 잘 알려진 작가다. 두 소설이 특히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동물농장] 또다른 하나는 [1984]. 이 소설들 외에도 [카탈로니아 찬가]도 많이 읽혔다. 그리고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나는 왜 쓰는가] 등도 제법 읽혔다고 할 수 있고.


전체주의에 반대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글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 작가. 그 정도다. 오웰은.


오웰 본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나에게는 에릭 아서 블레어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즉, 작가 조지 오웰은 존재해도, 그가 태어나서 자신의 집안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불리는 에릭 블레어란 이름은 내겐 존재하지 않는다.


한 집안의 작가가 아니라 그는 세계의 작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가로 존재한다. 오웰이라는 이름이 영국에 있는 오웰 강에서 따왔다는 사실도, 또 오웰적인(Orwellian)이라는 말이 있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오웰 작품을 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오웰의 한 면만을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책 끝부분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 내 감정을 대변한다.


‘이전에 오웰은‘시대의 양심’이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위대한 작가라는 데 동의하기는 해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작가였다. 그런데 이번 작업을 통해 알게 된 오웰은 감동적이었다.’(377-378쪽)


오웰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든 책이라는 점에 나도 동의한다.


2. 베카 솔닛


한마디로 믿음이 가는 작가다. 오웰의 글쓰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다. 솔닛 역시 마찬가지다. 솔닛의 글은 정치적이다. 우리 사회와 떨어지지 않는다.


솔닛은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다. 단순히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그런 사회 변화를 이루는데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언어를 통해서 거짓과 기만이 자리를 잡기도 하고, 언어를 통해서 거짓과 기만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늘 언어를 독점하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목적이 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목적. 그 언어 이면에 담겨 있는 목적을 알아채고 그것을 깨뜨리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가 바로 솔닛이다.


그렇다고 솔닛 글쓰기가 일방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단순한 구호로는 화려하게 수식되어 감춰진 허위를 밝혀낼 수 없다. 밝혀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글은 우선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영향을 주기 위해선 읽혀야 한다. 글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사람들이 읽을 만하다고 여겨야 한다. 그런 글쓰기, 솔닛은 하고 있다.

솔닛은 말한다. 오웰이 그런 작업을 했다고.


3.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이 책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때 한 작가는 조지 오웰이다. 그리고 그가 심은 장미는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우리가 흔히 ‘빵과 장미’라고 할 때 빵이 단순한 빵이 아니고, 장미가 장미를 넘어선다는 점을 알고 있듯이.


물론 오웰이 심은 식물은 장미다. 그리고 그는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또 식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글을 쓴다.


세계가 격변에 처해 있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기쁨을 찾아낸다.


이 기쁨,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요소다. 우리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긴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삶에는 아름다움이 따른다. 이 아름다움이 기쁨을 불러오기도 하고, 삶의 희망을 불러오기도 한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인 [1984]를 다시 읽으면서 솔닛은 이 소설에서 오웰이 표현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읽을수록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다. 의미가 하나만 담겨 있지 않은, 수많은 의미로 해석이 되는 소설들. 솔닛은 리좀이라는 말을 빌려온다. 어디로 벋어갈지 알 수 없는 상태. 그러나 많은 곳으로 분기되어 나가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존재들.


오웰 역시 마찬가지다. 오웰은 전체주의를 비판한 소설가로만 규정될 수 없다. 그는 사람이 기쁨을 얻으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원했다. 획일적인 사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규제하는, 그렇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해야지 하는 규정이 많은 사회는 바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세상,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이 지닌 성향은 인정하는, 그러한 삶이 바로 사람들의 삶이라고 한 사람.


그래서 솔닛은 이 책을 쓰면서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로 시작한다. 이미 오웰에게서 우리는 빵을 너무도 많이 얻었으므로. 오웰에게도 장미가 있음을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보여준다.


어느 곳을 펼쳐도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들이 있다. 가령 이런 구절들.


‘거짓말은 앎과 연결의 능력을 잠식한다. 앎을 차단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거짓말쟁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박탈한다. 정확한 정보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에 참여하기 위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기 주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상황을 알기 위해,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수적인데 말이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아는 것과 거짓말의 희생자가 아는 것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 (296쪽)


소위 말하는 황색언론이 하는 일. 그리고 그런 황색언론을 부추기고 지원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정치인들. 귀는 막고 입만 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들을 전체주의로 가고 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행복과 기쁨의 차이는 중요하다. 행복은 마치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다. 행복은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을 요구하는 듯한 데 비해, 기쁨은 어디서든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72쪽) ... 행복이 의존을 유도하는 마취제로 사용되는 반면, 기쁨은 사람들이 그 의존성에서 탈피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행하고 느끼는 능력의 성장이다.’(칼라 버그먼과 닉 몽고메리의 글을 인용. 73쪽)


기쁨은 이렇게 어떤 순간에도 느낄 수 있다. 그런 기쁨을 느끼는 삶을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웰이 추구한 삶도 행복하고 안락하게 오래 사는 삶이 아니라, 삶의 순간 순간 기쁨을 느끼는 충만한 삶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는 힘든 상황에서도 장미를 심는다.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다.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인 면에서 손을 떼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 기쁨(아름다움)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함께 존재했다. 솔닛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면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 심기를 대부분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오래가는 행위로 제안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해, 어떻게 하면 미래에 기여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장미를 심은 남자는 그것이 또한 미래의 편에서는 일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05쪽)


이런 말을 통해서 솔닛의 오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오웰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전체주의가 자유와 인권뿐 아니라 언어와 의식에까지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적시하고 묘사한 것이다. 그의 작업이 너무나 강한 설득력을 지녔으므로,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현재까지도 그림자를, 아니 봉화의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과를 더욱 풍부하고 심오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작업에 불을 지핀 연료, 즉 그의 이상주의와 헌신이다. 그가 소중히 여기고 욕망했던 것, 욕망 그 자체와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긍정적 평가, 그리고 그것들이야말로 전체주의 국가와 영혼을 파괴하는 그 침식력에 반대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그가 한 일은 이제 우리 각 사람의 일이다. 그건 항상 그랬다.’(359-360쪽)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솔닛이 하는 말.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쓸데없는 걱정


설마, 이 책을 읽은 무수한 정치인들이 장미를 심지는 않겠지. 그들은 지금도 무슨 건물 앞에, 공원에 자신의 이름을 단 기념식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오웰이 행한 방식과는 반대로. 그들은 미래의 편에 서기 위해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무를 심는다. 


아니, 미래에도 자신들이 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심는다고나 할까. 이들의 나무심기는 그래서 오웰의 장미 심기와 다르다. 그걸 같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무를 심는 행위는 좋다. 그 나무는 적어도 환경 오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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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01 1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의 힘이 미약하다고 느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때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레베카 솔닛의 글 안에서 오웰과 장미 나름 아름다운 조합이란 생각이 드네요^^

kinye91 2023-02-01 12:33   좋아요 3 | URL
앞이 보아지 않는다고 여길 때 오웰이 장미를 심고 돌보았듯이 무언가를 한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솔닛의 글이 참 좋은데 이 책도 아주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