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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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7쪽)로 소설은 시작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다. 우리말 문장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졌다. 주어와 서술어를 꾸며주는 말이 없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수식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이 간단한 문장에 여러 수식이 들어갈 수 있다. 여러 문장이 들어갈 수 있다. 소설은 그렇게 많은 문장들이 이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의 일들을 말해준다. 수많은 사건들과 수많은 감정들. 


그러다 소설은 첫문장의 주어인 아버지를 꾸며주는 말로 끝난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265쪽)


결국 죽은 사람은 어떤 수식어로 지칭되는 사람이 아닌, 그의 삶이 어떻더라도 내게는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즉, 다른 수식어로 불리던 아버지가 그 많은 수식어를 지니고 살아온 나의 아버지였음을 깨닫는 과정을 이 소설이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제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인데, 소설은 아버지가 해방이 되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삶들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서술자의 기억을 통해 듣는 과정이 전개되지만, 결국은 바로 서술자 자신이 해방되는, 아버지를 규정하고 있던 수많은 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소설 첫문장인 '아버지가 죽었다'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 신념, 평가 등을 다 떨쳐내고, 내가 규정했던 아버지가 죽었음을, 이제 내게서 그런 아버지가 떠나가고 그 모든 것을 지닌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왔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어떤 삶이 나를 구속하고 있었을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어떤 해방을 찾으려고 했을까? 바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이다. 이념으로 갈라진 우리나라 현대사가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고 있었는지를 이 소설은 아버지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의 삶이 아닐까? 아버지는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니까 겪게 되는 일일 뿐이라고 한다. 사람이닝께란 말. 이 말로 아버지는 자신의 이념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 한다. 


읽으면서 손을 뗄 수가 없게 되는데, 아버지의 삶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해가는 서술자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감춰졌던 진실들이 드러나고, 또 현재 우리나라 현실도 함께 드러내면서 소설은 아버지의 삶이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문장의 간결함을 메워주는, 자주 나오는 부사어가 있다. 하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하나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삶과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을 수식해주는 말을 찾으라면 나는 '하염없이와 항꾼에'를 찾겠다.


하염없이 : 1.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2.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로


어떤 의미여도 상관없다. 이 소설에서는 비슷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빨치산 투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삶은 바로 이런 '하염없이'라는 부사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가족을 잃고 또는 기다리면서 또는 그 가족으로 인해 사회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갔던 수많은 민중들의 삶을 표현하라면 바로 이렇게 '하염없이'라는 말로 꾸며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염없이'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장례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좌파, 우파 가릴 것이 없다. 여기에 이주민의 아이까지 나오니,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 하는 자리가 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빨갱이였던 아버지의 죽음에 보수와 진보, 그리고 이주민까지 함께 하는 모습.


소설은 이렇게 '하염없이'로 끝나지 않는다. 서술자가 아버지를 꾸미는 많은 말들을 떼어놓고, 아버지,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순간, 여태까지 아버지를 꾸미고 있었던 수많은 수식어들은 버려야 할 수식어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 속에 들어가 있는 말이 된다. 


그냥 그렇게 꾸미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바로 아버지였고, 나의 아버지였음을 서술자는 깨닫는다. 그 말을 이 소설에서 찾으면 '항꾼에'라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함께'라는 말의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함께 한다.


이 소설에는 이 '항꾼에'가 많이 나온다. 그렇게 함께 하는 삶.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도 여러 모습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고, 그 다양함이 바로 사람임을, 삶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재단하고 받아들일지 멀리 할지를 결정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돌아와 빨갱이라고 감옥생활까지 한 아버지의 삶은 바로 이 '항꾼에'에 담겨 있다.


아버지가 원하는 세상도 바로 그런 세상이었을 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잡고 아버지를 추모하는 모습. 그런 아버지의 유골을 아버지의 흔적 곳곳에 뿌리는 서술자, 자신들의 머리 위로 뿌려지는 유골의 모습에서, 아버지는 어떤 수식어 하나로 재단할 수 없는 그 모든 수식어가 '항꾼에' 담겨 있는 사람임을, 그런 삶을 살았음을 서술자는 깨닫게 된다.


우리 역시 소설을 읽으며 그 점을, 지금까지 '하염없이'처럼 의지와 의식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항꾼에'와 같이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의 전환. 그 전환에는 바로 어떤 특정 말로 사람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다양함이 함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설의 뒷부분에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쪽)


'어쩐지 아버지가 여기,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우리와 항꾼에.'(263쪽)


이 문장들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은 바로 이렇게 또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이고, 한면만 보이던 아버지의 다양한 면이 보이고, 그런 면이 모두 아버지였음을 깨닫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라고 했지만, 결국은 나의 해방일지로 나아간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닫혀 있던, 하나라고 믿고 있던 세계에서 열린 세계, 다양한 세계로 함께 나아갔으니까.  


재미있게 그러나 감명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이런 좋은 작품 앞으로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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